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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동쪽 한양도성 성곽 (남산 방향)

백범광장과 남산식물원, 분수대 일대 발굴조사로 햇살을 본 한양도성 성곽의 흔적들로 백범광장 서
쪽 성곽은 복원을 했고,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동쪽 성곽은 일부분 복원했다.
다만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으로 삼은 곳은 성곽을 복원하지 않고 발굴 때 나온 모습 그대로 두어 보호
각을 높게 씌우고 유적전시관으로 삼았다.

 

2.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중심부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3. 남산 방공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동쪽에는 왜정 말기에 지어진 방공호가 있다. 산자락을 다듬어 석축을 쌓고 그
한복판에 굴을 낸 형태로 유사시 피난처 및 군사작전용으로 지어졌다.

왜국은 1937년 왜국 칙령 제661호 방공법 조선시행령에 따라 서울 곳곳에 방공호 시설을 만들었다.
이곳 방공호도 그 과정에서 지어진 것으로 방공호 문을 들어서 계단을 내려가면 10평 정도의 방이 있
고, 그 방에서 다른 방향으로 긴 통로가 있는데, 중간 지점부터 내부가 붕괴되어 들어갈 수 없다.

 

이곳 방공호는 해방 이후 땅에 묻혔던 것을 2009~2014년까지 이곳 일대를 조사하면서 다시 양지로
나오게 되었는데, 방공호 내부 상태가 붕괴 위험 등으로 좋지 못하여 내부 관람은 막고 있다.

 

4. 출입이 금지된 방공호의 속살 (방공호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

 

5. 왜정 때 쓰러진 성곽 아랫도리가 보존된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이곳은 노천식 전시관으로 관람시간에 제한(9~19시, 겨울은 18시)이 있으나 전시관 바깥에서도 어
지간한 것은 거의 보인다.

 

6.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서쪽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와 방공호

 

7. 조선신궁 배전터

왜정은 이곳에 조선신궁이란 괴상한 건물을 지었다. 1920년에 짓기 시작해 1925년에 완성된 조선신
궁은 중심 건물인 배전을 비롯해 15동의 집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좋지 못한 등장으로 남산 정상
에 있던 유서 깊은 국사당은 속이 개좁은 왜정의 격한 눈치로 제자리를 떠나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겨
야 했으며, 백범광장과 남산도서관을 지나던 한양도성도 강제로 철거되어 사라졌다.

 

조선신궁의 중심 건물인 배전은 제사, 참배를 하는 사당으로 1945년 8월 이후, 배전을 포함 신궁 전
체가 보기 좋게 철거되었다. 다만 신궁 주변 계단은 살아남아 남산공원 계단길로 살아갔는데, 2013
년 이곳을 조사하면서 땅속에 묻힌 배전터가 발견되어 그 흔적을 땅위로 끄집어 냈다.

배전터는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의 기둥이 세워진 맞배지붕식 건
물로 이땅에서 유일하게 남은 조선신궁의 흔적이다.

 

8. 한양도성 성곽터 바로 윗쪽에 자리한 조선신궁 배전터

무참히 밀어버린 한양도성 성곽 바로 윗쪽에 신궁의 중심 건물(배전)을 세웠다는 점이 영 찝찝하다.
세상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백제와 가야가 왜열도를 속방으로 다스렸고, 신라와 고려가 왜열도를
신나게 털고 살았지만 조선이란 암흑시대 이후부터 오히려 우리가 왜에게 털리고 결국 이 좁은 땅
까지 그것들에게 접수를 당하고 만다. 다행히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왜정의 휴유증은 여
전히 진행중이다.

 

9. 발굴조사로 드러난 한양도성 성곽의 아랫도리 흔적들

왜정은 한양도성 성곽을 밀어버리고 그 아랫도리를 땅에 묻고 그 위에 조선신궁을 지었다. 2009~
2014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된 성곽의 아랫도리 흔적들, 그 흔적을 그대로 둔 채, 크게
보호각을 씌워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으로 삼았다.

 

10.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중심부

땅속에 묻힌 성곽 아랫도리 흔적 앞에 탐방로를 내었다. 이 탐방로는 방공호와 유적전시관 동쪽 성곽
까지 이어진다.

 

11. 하얀 보호각에 씌워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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