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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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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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