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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회기동 연화사, 청량리 청량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동대문구 연화사, 청량사 '

천장산 연화사

▲  천장산 연화사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청량사 동별당

▲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  청량사 동별당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중심으
로 열심히 절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이번 초파일에는 예전에 1번 찾았던 연화사와 그 부
근에 미답(未踏)으로 버젓히 남아있던 청량사를 주메뉴로 정했다.
청량사는 연화사보다 더 오래된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나를 몸살 나게 만들
정도의 늙은 유물이 없어 계속 발걸음을 미루다가 이번에 그를 꺼내 들었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1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
에서 내려 경희대 옆에 자리한 회기동(回基洞) 연화사를 찾았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
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2층) 내부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청량리 뒤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청량사 대웅전(大雄殿)

연화사를 나와서 빼곡히 들어찬 회기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삼육초등학교 남쪽
이자 영휘원 동남쪽에 자리한 청량사가 뒷통수를 보인다. 담장 너머로 청량사가 기와집 머리
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를 잠시 답답하게 만든다
. 그래서 골목길(제기로31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그제서야 문이 모습을 비추었고
,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청량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번에 처음 인연을 지은 청량사는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 북쪽이자 영휘원 동남
쪽으로 천장산 남쪽 끝자락에 안겨져 있다. 연화사가 경희대에 감싸여 있다면 청량사는 주택
가와 삼육초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간신히 경내 동쪽과 남쪽에 숲 일부가 남아있어 산
사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무려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허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처음에는
북한산(삼각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최근까지 '삼각산 청량사'를 칭했다. 고려 예종(
睿宗)이 1117년 9월 학자이자 승려인 식암 이자현(息庵李資玄, 1061~1125)을 불러 청량사에
머물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데, 그가 머문 절이 과연 이곳인지도
심히 의문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71년 부분에 삼각산 청량사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삼각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조선 초기 문신인 김정
(金淨)이 1504년에 청량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이후 절은 홍릉수목원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 자리를 물색했
는데, 공교롭게도 청량사 자리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그곳에 능을 쓰기로 했다. 상황이 그
리 되자 절은 강제로 제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어 현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일부에서는 돌곶이승방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나 김정호(金
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릉수목원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임업시
험장 쪽에 석관사(돌곶이절)가 따로 나와있어 별개의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허나 홍릉을 조성
하면서 절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돌곶이절도 청량사에 합쳐지면서 자연히 돌곶이승방의 역사
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돌곶이승방은 서울 주변 4대 비구니 승방의 하나이다.
그렇게 두 절이 합쳐지자 비구니 남채백(南彩白)이 1895년 석관사에서 법당과 칠성각을 가져
와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연화사처럼 완전 숲속의 절이었다. 주변 풍경이 고와서 왜정(倭政) 때는 서울 근교 경
승지이자 휴양지, 집회 장소로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특히 애국지사와 고승들의 발걸
음이 많았다.
별건곤(別乾坤) 제23호(1929년 9월)에는 청량사 절밥이 명물이라는 내용이 있고, 개벽(開闢)
에서도 청량사에 소풍을 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며,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는
'청량사라고 하면 시원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청량하지 않고 인근 홍릉의 수림(樹林)이 있고
교통이 편해서 군중이 몰리는 것이다'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는데, 1929년 왜경은 청량사를 수색하여
폭탄을 제조한 청년들을 검거했고, 1930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원 수십 명을 체포했으
며, 경성농업전문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1930년에 여기서 철기단(鐵騎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대(서울대) 학생들의 연구회 조직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1938년 연희전문(연세대) 동지회 흥업구락부가 자주 집회를 가졌다.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며, 1939년 8월 29일(음력 7월 1일)에 그의 회갑
연이 여기서 열렸는데, 이광(李珖),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안종
원(安鍾元) 등 2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참여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면서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
의 의지를 다졌다. 불교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
판은 그의 글씨이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절을 손질했으며, 1988년 전통사찰 5-2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
은 연화사보다 넓은 편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크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보전, 무량수전, 동별당, 칠성각, 관음전 등 10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경내를 크게 대웅전 구역과 동별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정문화재는
아직 없는 실정이나 1871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그 외에 1938년
에 조성된 후불탱과 신중탱, 칠성탱 등을 지니고 있다.

청량리의 이름이 바로 청량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현장을 이제서야 가본다. 절의 인지도가
낮아서 연화사보다 찾는 이는 좀 적으나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이자 애국지사들의 활동터로
바쁘게 살았던 현장이라 다시 왕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청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제기로31길 10-3, ☎ 02-962-7390)


▲  대웅전 앞에 닦여진 관불의식의 현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1938년에 그려진 후불탱과 신중탱 등 여러 탱화가 들어있으며, 건물 앞에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아기부처가 곱게 꽃단장이 된 연화대에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 뜨락에는 쉼터를 닦아 절을 찾은 이들에게 커피와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고 연
등 만들기 등의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커피 1잔을 받아 쉼터 의자에서 목구멍에
깃든 갈증을 단죄하며 5분 정도 쉬었다.


▲  곱게 연등 옷을 걸친 대웅전 앞 소나무

약 70~80년 정도 묵은 잘생긴 소나무에 오색 연등을 달아놓았다.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
다가 햇님이 칼퇴근을 하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등
야경을 드러낸다.


▲  늠름하게 생긴 대웅전 석가여래상과 뒷쪽에 걸린 후불탱(1938년 작)

▲  대웅전 독성탱과 산신탱

▲  1938년에 제작된 대웅전 신중탱


▲  천장산 청량사 대법전 건립탑(大法殿 建立塔)
1996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특이하게 8각형 부도탑(승탑)
스타일로 지어졌다.

▲  극락보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보통 석가탄신일 관불의식의 현장은 경내에 1곳 또는 2곳을 두기 마련이나 청량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앞, 무량수전 옆구리 등 무려 3곳이나 닦아 놓았다. 하여 사람들 눈치 없이 정말 여
유롭게 아기부처에게 냉수욕을 시켜주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대웅전과 무량수전 사이에 자리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조그만 덩치의 아미타불이 훤칠한 외모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쪽에 걸린 후불탱도 제법
고색이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극락보전 신중도(신중탱)

이곳 신중탱은 청량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무려 1871년에 조성되었다. 지방문화재감으로 전
혀 손색이 없어 보이나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절에서 문화재 신청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  한 지붕 두 가족,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각각
산신탱과 칠성탱 간판을 내걸고 있으나 원래 이름은 칠성각이다.

▲  칠성각 산신탱과 칠성탱(오른쪽)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탱은 1938년에 그려졌다.

▲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無量壽殿)

동별전 구역 북쪽 높은 곳에 들어앉은 무량수전은 앞서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이
미 극락전이 있어 그를 봉안했음에도 뜻도 비슷한 별도의 무량수전까지 두어 그의 공간을 또
마련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미타도량를 칭하고자 미리 밑밥을 닦아놓는 모양이다.


▲  무량수전 옆 3층석탑과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피부의 키 작은 3층석탑 앞에도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여기는 조금 구석이라 썰렁했다.

▲  무량수전 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  동별당(東別堂)


▲  관음전에서 바라본 동별당 방향
기와집이 첩첩히 둘러진 동별당은 청량사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닦여진
공간으로 요사, 선방, 공양간 등을 지니고 있다.

▲  관음전
2층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건물 외벽을 돌로 견고하게 장식했다.
관음전 공간은 2층이며, 1층은 요사(寮舍) 등으로 쓰인다.

▲  관음전 내부

청량사 경내를 30분 정도 말끔하게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연화사에서 배
부르게 공양밥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하여 이곳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밥 섭취를
문의하니 동별당 지하층으로 가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대웅전 주변에 있는 줄 알았음)
하여 그곳으로 내려가니 공양시간은 20분 전에 끝났다고 그런다. (그때가 14시 20분) 허탈해
하며 발을 돌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은 백설기를 1개 건네준다. 하여 그것으로 이곳의 인
심을 조금 느끼고, 관음전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청량사와의 짧은 첫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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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5월 3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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