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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향산 정상부 주변 (윗쪽 건물은 육향정, 바로 앞에 있는 비각은 대한평수토찬비)

삼척항 서쪽에 낮게 누워있는 육향산은 해발 20m 내외의 작은 숲동산이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동해

바다를 지켰던 삼척포진이 있었는데, 삼척포진과 그곳을 지키던 진성(삼척포진성)은 사라지고 지금은
삼척 지역의 대표 비석으로 꼽히는 척주동해비와 대한제국 시절에 세워진 대한평수토찬비. 조선 후기
선정비 7기 등의 늙은 비석들이 넉넉히 전한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바로 척주동해비를 보기 위함
이다.

 

2. 삼척포진성터 표석

삼척포진은 관동지방 9개 군의 수군을 통솔했던 수군 기지이다. 1384년 요전산성에 진영을 설치한 것

이 시초로 멀리 울릉도와 독도 해역까지 수비했는데, 첨절제사 겸 토포사가 이곳을 관리했다.

1520년 죽관도(육향산) 북쪽으로 군영을 옮기고 둘레 900척, 높이 8척의 석성(삼척포진성)을 구축해

그 안에 삼척포진 관아와 토포아문, 진동루, 둔전 등을 설치했는데, 1898년 삼척포진이 폐지되면서 껍

데기만 남게 된다.

이후 1916년 왜정이 삼척항을 만든다며 삼척포진성과 그에 딸린 것들을 싹 부셔버리면서 흔적을 더듬

기 어려우며, 1987년 6월 육향산 정상 밑에 삼척포진의 역사를 머금은 검은 피부의 표석을 세워 세월

의 저편으로 강제로 사라진 삼척포진(삼척포진성)을 추억한다.

 

3. 삼척포진성터 표석 주변 (육향산 정상 밑)

 

4. 대한평수토찬비를 머금은 1칸짜리 맞배지붕 비각(우전각)

 

5. 우전각에 깃든 대한평수토찬비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내며 척주동해비를 남겼던 미수 허목이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으로부터 형

산신우비(형산의 우제가 썼다는 비석)의 탁본 일부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탁본의 77자 중에서 48자를

목판에 새겨 삼척부 관아에 보관하게 했다.

그 목판은 삼척 관아에 쭉 전해오다가 1904년 고종이 명을 내려 목판에 담긴 내용을 머금은 비석을 세

워 척주동해비 곁에 두니 그것이 대한평수토찬비이다. 비석은 삼척군수 정운석과 고종이 칙사로 보낸

강홍대가 만들었으며, 척주동해비와 늘 한 덩어리를 이루는 존재이다. (이들 비석은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란 이름으로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6. 척주동해비를 머금은 1칸짜리 동해비각

 

7. 척주동해비

삼척 지역에서 꽤 유명한 척주동해비는 1661년에 삼척부사 허목이 세웠다. 그 시절 삼척은 동해바다
가 흥분하면 파도가 삼척 고을과 해변 마을을 마구 때려대기 일쑤였고, 강과 하천이 넘치는 등 수해가

극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철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동해송을 친히 짓고 그의 주특기인 전서체로 그

내용을 써서 정라진 앞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워 동해바다를 달랬는데, 이상하게도 동해바다가 얌전해

져 수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허나 동해비를 시샘한 바다의 계속적인 풍랑 공격으로 비석이 파손되자 1709년 이를 모사해 육향산 북

쪽 자락(선정비들이 있는 곳)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으며, 1969년 육향산 정상으로 이전되면서 늘 바다

를 굽어본다.

바다 파도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해서 퇴조비라 불리기도 하며, 비석 이름에 쓰인 척주는

삼척의 옛 이름이다. 전서체 부분에서 천하 1인자로 칭송을 받았던 허목의 서체가 담긴 비석으로 유명

해 탁본 수요가 많았으나 이제는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고 있어서 탁본은 어렵다.

 

8. 육향정

육향산 정상에 들어앉은 육향정은 6각형 정자이다. 1947년 12월에 대동청년단 김진구가 중심이 되고

김진원의 발의로 김몽순, 김형국 등 지역 유지들이 조국 해방을 기념하고자 기공하여 1948년 5월 완

성을 본 것으로 육향정 현판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글씨이다.

 

9. 육향정기

1963년 2월에 당성 홍종범이 쓴 것으로 육향정을 세운 이유와 육향정의 내력을 담고 있다.

 

10. 척주동해비를 품고 있는 동해비각 (육향정에서 바라본 모습)

 

11. 육향산 정상부에 나란히 자리한 육향정과 동해비각(척주동해비)

 

12. 굳게 닫힌 미수사 정문

육향산 남쪽에 자리한 미수사는 미수 허목의 사당이다. 허목은 삼척부사 재임 시절(1660~1662)에 삼

척의 역사와 문화, 생활, 풍습, 자연을 담은 '척주지'를 발간하고 향약과 리사제 실시, 수리시설 확충,

척주동해비 건립 등의 공적을 남겼는데, 삼척 지역 사람들은 경행서원을 세워 그를 두고두고 기렸다.

허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으로 경행서원이 사라지면서 허목은 120년 이상 제삿밥을 받지 못

했다.

 

이후 허목의 후손인 가락종친회에서 1990년부터 매년 봄(3월)에 척주동해비 앞에서 제를 올려 끊어

진 허목에 대한 제사를 다시 봉행했으며, 미수허목선양위원회가 발족되어 육향산 남쪽에 미수사란 사

당을 세우고 매년 봄(음력 3월 9일)에 미수허목춘향제란 이름으로 제를 올린다. (여기서 춘향제는 봄

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함)

 

13. 담장 밖에서 바라본 미수사

미수사는 제향일과 일부 날 외에는 늘 닫힌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허나 근래 지어진 사당이고, 담

장 밖에서 까치발로 보일 것은 다 보이기에 굳이 담장을 넘거나 문을 뚫을 필요는 없다.

 

14. 삼척 지역의 대표 항구인 삼척항 (육향산 동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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