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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발 금성당, 이말산


' 구파발 이말산 봄나들이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금성당 이말산 숲길

▲  금성당

▲  이말산 숲길

 


봄이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서남쪽 끝
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파발을 찾았다.

구파발(舊把撥)은 서울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스런 모습
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구파발과 진관동 지역의 전원(田園) 풍경을 좋아했
고 그런 풍경이 쭉 유지되기를 바랬지만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이 땅의 현실 앞에 결
국 아파트 일색의 은평뉴타운으로 강제 성형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구파발 주변에서 밭두렁과 논두렁 등의 경작지와 시골 풍경은 많이 사라졌으나 은평
뉴타운을 둘러싼 이말산과 북한산(삼각산), 앵봉산은 크게 건드리지 않아 산 속의 조그만
도시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게다가 못자리골천, 구파발천 등의 짧은 하천이 뉴타운
내부를 흘러가고 뉴타운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르고 있어 은근히 배산임수(背山臨
水)의 형태까지 보인다. 그 뉴타운 한복판에 이말산이 자리해 뒷동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 자락에 조선 후기 무속신앙의 현장인 금성당이 있다. 이번 나들이는 바로 금성당
과 이말산을 잡으러 간 것이다.


♠  서울에 숨겨진 옛 무속신앙의 현장, 조선시대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재 258호

▲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의 외경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 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고고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은 거의 새집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19세기 말에 지어진 무속신앙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박
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은 2번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
담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을도 강제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진관동(津寬洞)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의
각심절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져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개발의 칼질로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1970년대
에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다행히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
행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게 되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고, 금성당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개발의 칼질
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이 영 바람직하지 않아 제자리에 2010년 복원, 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원을 닦
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원대륙, 히말리야,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
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는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구청은 그에게 금성당
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
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가
깊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매우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금성당 대문 (대문채)

▲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
聖地)로 1880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
로 조선 때 무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
신과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의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
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사를 지내기에 좋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
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10~17시)에
만 잠깐씩 문이 열리며,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물들은 요일에 상관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금성당 입장은 보통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나는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온 터라 전시 유물은 만나지 못했다. 금성당은 매주 문이 열
려있지만 정작 박물관의 중심인 본채와 행랑 내부는 1주에 딱 이틀만 만날 수 있는 비싼 존재
였던 것이다. 하여 여러 달 이후 금요일에 다시 인연을 지어 내부 유물까지 싹 살폈다.


▲  굳게 닫혀진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  안채 서쪽에 기대어 선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개성 넘치게 생긴 저 작은 존재들은 몽골이나 히말리야, 티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날은 박물관 공개일이 아니므로 전
시 공간으로 쓰이는 부엌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민속유물이 있는 마루만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그날 만난 박물관 유물은 안채 마루와 안채 서쪽 벽에 있는 석조 유물 뿐이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안채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장식용으로 놓여진 장독대들이 있다. 그 옆에 부뚜막이 있
는데 금성당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 부엌과 여기서 음식을 했으며, 누렇게 뜬 저 가마솥을
거쳐간 음식과 국거리는 동해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이제는 은퇴하여 뒷방 마님
처럼 아주 잉여로운 신세가 되었다.


▲  안채 뒤쪽 (굴뚝과 돌로 다져진 화단)
금성당은 보이지 않는 뒷통수 부분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단을 닦아서
나무와 꽃을 심었고, 본채 뒤쪽에는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수집한 여러
스타일의 장독대들이 놓여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①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②

▲  봄이 내려앉은 금성당 동쪽 돌담

▲  금성당 본채의 뒷모습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가득 들어
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
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389-6522)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조선시대에 거대한 공동묘지 속으로, 이말산(莉茉山)

▲  최효원 묘역 (해주최씨와 남양홍씨 묘역)

금성당을 둘러보고 이말산의 품으로 들어서고자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은평공고) 뒤쪽으로 이동
했다. 그 구석에도 아파트(우물골2단지 7블록)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동쪽 산자락을 올라서니
말끔한 모습의 최효원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묘역의 주인공인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버지이
다. 숙빈최씨와 영조는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인 최효원은 인지도가 극 밑바닥이라
아는 이가 적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해주최씨 집안으로 자는 의경(義敬)이며, 아버지는 최태일(崔泰逸), 어머지는 평강장씨(
平康張氏)이다. 남양홍씨인 홍계남의 딸과 혼인했으며,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해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 副司果, 종6품)까지 지내다가 34살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막내딸은 궁궐 무수리로 들어갔다. 그
녀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시 폐위의 고통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복귀
를 빌었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면서 예민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인
연으로 연잉군<延礽君, 영조>를 낳게 되었고 희빈장씨의 모진 구박을 이겨내면서 숙빈최씨로
승급된다.

1734년 영조는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면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손질했다. 딸과 외손주 덕분에 그의 존재와 무덤이 적게나마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최효원묘는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는 양석(羊石)도 1쌍 있었으나 1988년경 어느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이 그 무거운 돌덩이를
훔쳐가 버렸다.
묘비는 지붕돌을 갖춘 2면비로 내용은 영조가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서
평군 이요(西平君 李橈)가 썼다. 이요는 왕족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음악과 글씨에 능했는데,
영조(英祖)의 신임이 두텁자 부정하게 재산을 모아 사치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최효원 묘역에는 총 6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뿐 아니라 장인(홍계남)
과 처남(홍계웅)의 묘도 같이 있다. 이는 최효원이 처가 묘역에 묻히면서 두 집안(해주최씨+
남양홍씨)이 같이 있게 된 것으로 장인과 처남 무덤 사이에 아주 눈에 띄도록 큼지막하게 자
리해 있어 딸과 외손주의 덕을 톡톡히 봤음을 알려준다. (최효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는
여기서 가까운 불광2동에 따로 있음)
이들 무덤은 묘비부터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대체로 17~18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이 너무 과한 탓에 무덤 밑도리에 20세기 스타일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옛 무덤으로서의 멋이 다소 떨어졌다. 윗도리는 17~18세기 옷인데 밑에는 20세기 옷을 입혀놓
았으니 그게 어디 어울리겠는가?

* 최효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85

      ◀  홍계웅(洪繼雄)과 김화김씨 묘
홍계웅은 홍계남의 아들로 최효원의 처남이자
숙빈최씨의 외삼촌이 된다. 최효원보다 낮은
봉분(封墳)과 머리가 둥근 묘비, 그리고 상석
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최수강(崔壽崗)과 김해김씨 묘
최수강은 최효원의 손자이자 최후의 아들로 영
조 시절에 무관을 지냈다. 왼쪽 비석은 최수강
의 아들인 최진해(崔鎭海)와 해풍김씨의 묘비
이다.

▲  늘씬하게 생긴 최수강 묘비

▲  최후(崔厚) 묘비


▲  최후와 순흥안씨 묘
최후는 최효원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오라버니로 외할아버지(홍계남) 무덤 바로
앞에 있다.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갖추고 있어 최효원 묘 못지
않은 규모를 지녔다.

▲  최효원의 장인인 홍계남(洪繼男) 묘비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탄 것일까? 다른 비석에 비해 피부가 너무 검다.

▲  장대한 세월에게 목을 빼앗긴 가련한 동자석(童子石)

최효원 묘역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말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이말산은 구파발역 동쪽에 자
리한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뫼로 군부대가 있는 북쪽 끝을 제외하고 모두 은평뉴타운에 감
싸여 있어 자연히 은평뉴타운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었다.

산의 이름은 말리화(茉莉花)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리(이말)는 말리화
차, 쟈스민차, 향편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것이 화차(花茶)
가 된다.
허나 말리화차가 외래종인 것을 감안하면 이 산에 정말 그것이 많았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말리화를 재배하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말산에 안긴 무덤 중
숙종~영조 시절에 활동했던 이영수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다른 이말산
(李末山)이라 쓰여 있어 말리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회의감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영조 시절 무덤인 이세철 묘비와 홍세태(洪世泰)의 묘지명(墓誌銘) 등에는 이말산(茉
莉山)이라 나와있어 18세기부터 한자가 슬쩍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두(吏讀)처럼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만 가져와 표기한듯싶다. 참고로 지금 이말산에는 말리화는커녕 비슷한 꽃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산은 1977년 진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공원의 역할을 했으나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꾸며진 것은 은평뉴타운 개설 이후이다. 둘레길 유행에 따라 은평구는 그 산에 은평둘레길3코
스인 이말산 묘역길(거리 2.7km)을 닦았는데 그 길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주능선을 가로질러
은평한옥마을까지 이어진다.


▲  묘비와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무덤 봉분은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산길이 되어버렸다.


조선 때는 한양도성(서울) 밖 10리 이상부터 무덤을 쓸 수 있었는데, 북서쪽은 이말산, 북동
쪽은 초안산(楚安山,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 관련글 보러가기)이 그 적격지였다. 게
다가 이들은 앞뒤로 하천이 흘러 은근히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무덤 선호지로 인기
가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 같은 왕족부터 해서 양반사대부, 중
인, 상궁, 내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이말산에 뼈를 묻으면서 지금까지
수습된 무덤만 1,700여 기에 달한다. (은언군묘는 파괴되어 사라짐) 이중 무연고가 313기, 나
머지는 연고가 있으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도 13종 1,488기가 확인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살아있는 조선시대 무덤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비슷한 성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무덤들이 몰려있는 곳을 중심으로 국가
사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고, 각심절 마을에 있는 정간공 이명(貞簡公 李蓂) 묘역은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말산은 그보다 무덤도 더 많고 그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에
도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초안산과 더불어 내시(내관) 무덤이 많은 곳으로 꼽히며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무덤
과 무덤 석물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답사지로는 아주 좋다. 또한 산 곳곳에 무덤이 널려있고
심지어 산길에도 파괴된 무덤의 잔해들이 즐비해 산책의 흥미를 유발시키며 여름에는 납량(納
凉) 놀이를 벌이기에도 좋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무덤이나 인상을 쓴 문인석,
동자석이 툭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염통이 제대로 수축될 것이다.


▲  낙엽에 묻혀 고통받고 있는 상석과 향로석
저런 꼴을 보면 무덤을 쓰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후손의 관리가
끊기면 바로 게임 끝나는 것임)

▲  세상을 등지며 꺼꾸로 엎어진 문인석(文人石)
자신을 살피지 않는 무심한 세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일까? 얼굴을
땅에 묻고 세상을 등진 채, 엎어져 있다.

▲  봄이 뿌려지고 있는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①
망나니의 칼과 세월의 칼날은 모두 목만 취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목을 취해야
될 썩은 작자와 무리들이 적지 않거늘 왜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죄없는 저들만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②

▲  이말산 능선길 (북쪽 방향)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①

이말산은 흙산이라 산길과 능선길이 거의 부드럽다. 산세도 일부를 제외하면 느긋한 편으로
구파발역(3호선)과 진관동주민센터, 진관초교, 약수사, 연화사, 우물골2단지7블록,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장 등에서 접근하면 되며, 구파발역에서 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까지 30~40분
이면 충분하다. (거기서 부근으로 하산하면 40~50분이면 끝)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②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③
산길 주위로 방치된 옛 무덤들이 적지 않다. 하여 밤에 오면(달이 뜨지 않은
밤이나 비오는 날 밤)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다.

▲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묘비는 사라졌지만 상석과 향로석은 잘 남아있다.

▲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북한산이 남성적인 뫼라면 이말산은 귀여운 여동생 같은 작고 아늑한 뫼이다.


♠  이말산 마무리

▲  무덤이 떼거지로 나타나다 (묘비 1기와 상석 6기)

이말산 동북쪽 끝 봉우리에는 네모난 쉼터와 약간의 운동시설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군부대로 막혀있어 서쪽(진관초교)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길로 돌아나가야 되는데, 일몰까
지는 아직 여유가 넘쳐 남쪽 길로 다시 나가면서 옛 무덤들을 보물찾기 하듯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남쪽을 바라보며 능선길을 거닐다 보니 앞서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쏙쏙 시야에 걸려든다. 특
히 제각말5-3단지 뒤쪽인 동쪽 산자락에 여러 기가 몰려있는 무덤군들이 여럿 나타나 나에게
적지 않은 흥분감을 주었다. 역시 한쪽 방향으로만 향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대부분 묘비(묘표)를 지니고 있다. 그들 중 1기는 문인석까지 지니고 있어
잘나가던 집안의 묘역임을 알려준다. (누구 묘역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묘비만 뿌리가 뽑힌 채,
자빠져 있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어 버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다 부질없다.

▲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깨지고 요절난 묘비들

▲  칠원윤씨 윤용(尹鎔) 묘역

윤용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631년 이곳에 무
덤을 썼으며<묘비에는 이곳 지명이 '양주군 신혈리 택사(神穴里 澤寺)'로 나옴> 부인 예안이
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비(묘표)와 상석, 조그만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고 있으며, 후손들의 손길이 여전하여 호석도 새로 갖추었다.


▲  칠원윤씨 윤응린(尹應麟), 하동정씨 부부묘
윤응린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냈다. 비석과 호석은
20세기에 후손들이 새로 갈아넣은 것들이라 장대한 시간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  상선(尙膳) 노윤천(盧允千) 묘역

노윤천은 16세기에 활동했던 내시(내관)이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 때 승전색(承傳色)으로
써 왕명을 전달한 공이 있어 그해 8월, 가자(加資)되었으며 1546년 1월, 위사원종공신(衛社原
從功臣)에 책록되기도 했다.
세월의 불도저 같은 흐름 앞에 무덤 봉분은 사라지고 묘표(묘비)와 상석, 문인석 1기가 남아
있으며, 향우측에 비슷한 모습의 묘표가 있어 이곳이 그의 선영(先塋)이었음을 알려준다. 묘
비는 피부가 많이 손상되어 대부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표정 하나
잃지 않은 노윤천 묘역 문인석

▲  정체성을 잃은 어느 상석
무덤 상석이 졸지에 잠깐 쉬었다 가는
산길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녹음이 짙어가는 이말산 서쪽 능선길
능선길을 거닐며 무덤과 석물을 찾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이번 이말산 더듬기에서
대략 찾아낸 무덤만 어림잡아 200기는 넘을 것이다.


▲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이말산 정상은 산 서쪽 부분에 있다. 정상(132.7m)은 평평한 넓은 공간으로 방공호 등의 군사
시설이 있으나 이곳이 공원으로 해방되면서 버려진 상태이며 은평뉴타운과 앵봉산, 북한산 향
로봉 등이 시야에 보이나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조망의 깊이는 별로이다.


▲  소탈한 모습의 이말산 정상 표목(標木)

▲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



▲  이말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약수사(藥水寺)

이말산 정상에서 구파발역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깜찍하게 손짓하는 개나리들에게 마음이 끌
려 약수사로 길을 틀었다.
4~5분 정도 내려가니 산과 아파트 경계에 자리한 약수사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절은 고색이 아
직 여물지도 못한 20세기 후반 현대 사찰로 20여 일 정도 남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벌써부터 연분홍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다듬은 상태였다. 그 오색 연등에 순백 벚꽃까지
어우러져 조촐하게 별천지를 구가하고 있어 이말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담느라 힘겨운 두 눈
의 피로감을 크게 덜어준다.


▲  오색 연등으로 정신이 없는 약수사 경내
약수사를 끝으로 4월 한복판에 찾아간 이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말산, 진관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7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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