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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암산 한우물

호암산(393m)의 서남쪽 봉우리 정상부 서쪽 밑에 한우물이란 큰 우물 유적이 있다. 그는 석구상과

함께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이름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 용복, 용초 등 하늘과

용에 관련된 별칭을 지니고 있어 오랜 세월 속세에서 꽤 애지중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산 정상부 옆이라 마땅한 수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오는데,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았다는 7~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7~8세기 우물(못) 흔적이 나왔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

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못(우물)

을 구축했다.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완전히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 때 신라 우물터

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이 신라 때 우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이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 '仍

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

에서 30cm까지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

산성에 머물면서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

늘에 기우제를 지냈다)'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

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도 있

다.

또한 석구지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물에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우물 남쪽에

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

을 막는다.

 

2. 한우물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우물 서쪽 벼랑에는 한우물전망대가 닦여져 천하를 굽어본다. 여기서는 호암산 북쪽 자락과 목골산,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마포구, 서대문구, 용산구, 은평구, 그리고 멀리 고양과 파

주 지역까지 훤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이날은 대기 상태도 아주 좋아서 지금까지 누렸던 호암산 조망

중 완전 최상급이었다.

 

3. 한우물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지역, 광명시, 호암산 북쪽 자락, 목골산,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영등포

구, 마포구, 서대문구, 광명시, 부천시,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 한우물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서쪽 방향)

호암산 남쪽 자락과 시흥동, 독산동, 광명시, 도덕산~구름산~가학산,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지역

까지.

 

5.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한우물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은 불영암)

 

6. 한우물에서 바라본 초가을 파란 하늘과 추상적으로 생긴 구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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