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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 북문터의 바로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석구상이 있다. 북쪽을 바라보며

귀엽게 앉아있는 그는 돌로 만든 개의 석상인 석구상으로 불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고, 시흥읍지 형승조에는 '호암산 남쪽

에 석견 4두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에 사견우(개의 형상 4개)가 있다'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으로 무게가 완전히 쏠린 상태이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

로 표현되어 있어 꽤 귀여운 모습이다. 그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호암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조각 수법을 통해 조선 후기로 보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는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

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2.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

조선 후기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석상으로 서울 지방민속문화재나 지방유

형문화재의 자격이 충분하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호암산성'의 일원으로 묻혀 있음)

 

3. 석구상의 뒷모습

꼬리가 둘둘 말려져 있어 개의 꼬랑지보다는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 같다.

 

4. 석구상 남쪽에 남아있는 호암산성터 (호암산성 동벽)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 주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

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으로 축성되었

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공법이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가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

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려 6,500

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제 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6세기 말~7세기 초(늦으면 7~8세기 정도)에 군사기지 및 행

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선비

족의 당나라를 신나게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 땅의 일원인 요동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힌다. 하여 서

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 되었으며, 양천고성(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 오두산성

(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런데로 밥

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

을 쳤는데,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군사 4,000명을 딸려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

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을 공격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워

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홀과 대

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

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이란 작

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서 남문
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이 있었음을 알려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냈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이자 살점이
었던 것이다.

 

 

5. 호암산성 동벽터

석구상 남쪽으로 인공티가 느껴지는 부풀어오른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이 호암산성의 동벽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수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

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5. 하늘로 조금씩 솟고 있는 호암산성 동벽터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이 그나

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졌으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6. 호암산성 동벽터 북쪽 방향 (석구상 방향)

 

7. 호암산성 동벽터 남쪽 방향 (건물터, 남문터 방향)

 

8.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장군봉, 삼성산, 관악산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예술

이다. 허나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그렇지

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9. 호암산성 동북쪽 바위에서 바라본 삼성산과 관악산의 첩첩한 산주름

 

10. 호암산성 동북쪽 바위에서 바라본 삼성산과 안양시, 수리산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가 삼성산과 수리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수리산 너머로 군포

시와 수원시가 희미하게 망막에 들어오며 그들의 허공에는 구름이 점점이 뜬 쾌청한 가을 하늘이 펼

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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