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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호암산의 푸른 산줄기와 서울 시내

푸르른 초가을 하늘(이때가 9월 말이었음) 아래로 호암산 정상부와 북쪽 자락, 목골산, 관악구, 동작

구, 영등포구, 용산구, 마포구, 서울 도심부, 남산, 서대문구, 은평구,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

과 수락산, 불암산, 노고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이 날은 대기 상태가 아주 좋아서

조망의 질은 완전 최우수급이었다.

 

2. 온갖 돌탑들이 마중하는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3.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칼바위, 벽산5단지 방향)

 

4. 불영암 석불과 소나무

한우물 옆구리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이곳

은 해발 310m 고지로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시흥동 벽산아

파트, 호암로, 호압사 등에서 쉽게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딱히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로부터 서

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오랫동안 승려

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의 역할을 했던 현장으로 여겨진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런 것

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절을 이루고 있으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

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단출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

(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조촐하게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6. 불영암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건물 내에 104위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건물 옆구리에는 종무소와 부엌 등이 달려있다.

 

7. 가건물 스타일의 산신각과 석불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가 담겨진 산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

로 벼랑에 목재로 공간과 계단을 닦고 그 끝에 가건물식 산신각을 닦았는데, 예전에는 공간 바위 앞에

나무로 만든 임시 건물을 두어 그곳에 산신 가족들을 봉안했었다.

 

8. 단촐한 모습의 산신 식구들

주름진 바위 앞에 단을 만들고 호랑이를 거느린 작은 산신상을 두었다. 예전에는 저것보다 더 큰 산신

상이 자리해 호랑이와 사슴까지 거느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사라지고(도난을 당한듯?) 저들로 대체했

다.

 

9.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머리를 드러내고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김포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10.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검은 뒷통수와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시내와 북한산(삼각산)

 

11. 한우물 앞길 (불영암에서 석구상 방향)

 

12.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 옆구리에 자리한 한우물은 석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한우물

이란 큰 우물을 뜻하는데, 그러다보니 천정, 용복, 용초 등 하늘과 용에 관련된 별칭을 지니고 있다.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오며,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

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았다는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

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못

(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

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해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이 신라 때 우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

라는 남쪽 부분이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

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 '仍伐

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 안쪽에서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

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

에 기우제를 지냈다)'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도 설득을 얻

고 있다. 또한 석구지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

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물에 모

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

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다.

 

13.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는 한우물

 

14. 동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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