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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허 유상규 묘

유상규(1897~1936)는 평북 강계 출신이다. 경신중학을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경성의전의 중심 인물로 참가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 넘어가 도산 안창호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서울로 돌아와 1925년 복학해 1927년 졸업했으며, 경성의전 강사와 부속병원 외과

의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사 주최 강연회에 연사로 꾸준히 참여하여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으며 어리석은 조선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환자를 치료하던 중에 단독에 감염되어 1936년

39세에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그는 안창호와 거의 부자지간처럼 사이가 각별해 그의 필명인 '산옹'의 '옹'자를 넣어 아들의 이름

(유옹섭)을 지었으며, 도산이 그의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고 2년 후, 그의 무덤 오른쪽 위에 묻히

면서 죽어서도 서로의 끈끈한 정을 보였다.

 

유상규의 아들인 유옹섭이 부친 묘와 도산의 묘를 돌보았으며, 2007년에 보훈처로부터 부친의 현

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부친의 도산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을 취소했다. 이후 도산공원으

로 넘어간 도산의 묘터 관리과 부친 묘 관리에 힘쓰다가 2014년 별세했다.

 

2. 태허 유상규 묘의 뒷모습

동그란 봉분과 지붕돌 묘비(묘표)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3. 애국지사 김봉성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월 1

일 평북 선천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넘어가 1922년 주

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2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

년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과 혼인해 부부가 안창

호가 세운 점진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38년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에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자영과 허무하게 사망하고 만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

서 받음)

 

그의 묘는 도산 묘 오른쪽인 이곳에 있었으나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지금은

낙엽이 뒤덮힌 묘터와 비석만 남아있다.

 

4. 화가 이인성묘

이인성(1912~1950)은 대구 출신이다. 미술에 소질이 뛰어나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에 뽑혔는데, 이것을 계기로 화가로 데뷔를 하게 된

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했으며, 23살에는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년 제16회 선

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

했으나 1950년 3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태허 유상규묘와 김봉성묘터, 도산 안창호묘터, 이인성묘는 망우산 북쪽 능선에 있으며, 이정표가 있

어서 찾기는 그런데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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