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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산사 나들이,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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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산 석굴암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여인네들과 우이령 석굴
암을 찾았다.

우이령(牛耳嶺)은 서울 우이동(牛耳洞)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橋峴里)를 잇는 고개로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뒷통수에 자리한다. 이들 산의 경계선이기도 한데 6.
25 시절에는 경기도 북부 피난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피난길에 올랐으며 전방으로 군병
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고자 미군 공병대에서 길을 닦으면서 지금의 우이령길을 이루게
되었다.
6.25 이후에도 지역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북한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이른바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패거리 사건)로 1969년에 금지된 길로 꽁꽁 묶이고 만다. 그렇
게 서울 근교의 숨겨진 고갯길로 없는 듯 지냈던 우이령은 2009년 7월, 40년 만에 다시
빗장을 열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비추었다.

가슴을 다시 연 우이령은 인간의 발길이 오랫동안 끊긴 탓에 자연환경이 매우 우수했고
온갖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뿌리를 내려 대자연의 휼륭한 보고(寶庫)로 성장했다. 또
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을 자아내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현장이었다.
허나 지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들이 몰려들면 우이령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므로 철저하게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탐방에 적지않은 제약을 주어 우이령 보호에 힘
쓰고 있다.

우이령이 개방된 이후, 애타게 갈 기회를 노렸으나 딱히 인연이 없어 하염없이 잊고 살
다가 친한 여인네의 제안에 힘입어 가게 되었다. 예약은 그가 다했으므로 늦지 않게 가
기만 하면 된다.
연신내역(3,6호선)에서 아침 9시, 일행들을 만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우이령
으로 다가섰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북한산(삼각산)과 노고산을 찾는 등산객과 단풍
행락객들이 폭주하여 송추(북한산, 도봉산, 오봉산)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계속 가
축수송의 위엄을 보였다. 거기에 행락객 차량들이 구파발역부터 북한산성입구까지 가득
들어차 불과 12km 거리(연신내~교현리 우이령입구)가 거의 120km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집에서 가까운 우이령을 가는데 이렇게 속세살이처럼 힘이 드니 서울의 인구가 참
쓸데없이 많기는 많다.

어쨌든 등산/행락객의 거센 물결을 뚫고 간신히 우이령입구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1시.
정류장 편의점에 주저앉아 김밥과 과자, 컵라면으로 벌써부터 지치고 놀랜 몸과 마음,
뱃속을 달래고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섰다.


 

♠  석굴암 입문

▲  우이령의 북쪽 관문, 교현탐방지원센터

북한산로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8분 정도 들어서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구분짓
는 교현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한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하여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나그네에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석굴암 탐방객은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신분증만 지참하면 된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백악산) 한양
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라 제약이 좀 있다.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
자 1969년 이후 40년이나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
도 우이령에 흠뻑 마음을 빼앗겼는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
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느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출입금지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
라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
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게 모두 진압이 될 것이다.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유격 표석)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리는
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북쪽 길을 오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로 직
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우이령에 왔다면 우이령길만 살피지 말고 석굴암도 둘러보기 바란다. 석굴암이 우이령에서 나
름 꿀단지 같은 곳이라 가는 길이 좀 각박해도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충분히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이령을 잠시 버리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3글자로 오봉산(五峯
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바위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
세를 굽어본다. 이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 법,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 먹던 시절, 양주 땅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다. 양주목(楊州
牧)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는데 아마도 원님
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 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
을 가지고 사람이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드니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
봉산(道峯山)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오르는 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  석굴암 일주문(一柱門)과 오봉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이다. 길 주변에는 온갖 유격훈련 시설이 가득
한데 바로 절 밑까지 펼쳐져 있어 군부대 내부를 지나는 기분이다. 이들 훈련장은 1969년 이
후 우이령이 통제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지금도 절찬리에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몇몇 유격
시설은 개방되어 산꾼들이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데, 수
련장 시설이 아닌 엄연한 군사시설인만큼 그런 것은 삼가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훈련 시설을 옆구리에 끼고 10분 정도 오르면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
다. 보통 일주문은 절 이름이 쓰인 현판을 걸지만 이 문은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기둥 2개의
평방(平枋), 공포, 팔작지붕이 전부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주지 도일이 조성한 '오봉산 석굴암 토지불사 공덕비(功德碑)'가 나오
고 다시 2분을 고생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은 석축 위에 둥지를 튼 경내 바로 밑인데 여
기서 윤장대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오르면 비로소 석굴암 경내에 이르게 된다.

◀ 오봉산 석굴암 토지 불사 공덕비
주지 도일이 땅 2만평을 매입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 밑부분에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암 뒤쪽으로 관음봉(서쪽 바위 봉우리)과 오봉이 병풍처럼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중암자, 우이령 개방으로 단단히 덕을 보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五峯山 石窟庵)

▲  윤장대 부근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북쪽 산줄기와 상장봉(543m)

흔히 석굴암하면 대부분 경주(慶州) 석굴암을 떠올릴 것이다. 석굴암의 단짝인 불국사(佛國寺
)처럼 말이다. 글을 올릴 때도 지역을 안쓰고 그냥 석굴암이나 불국사라고 쓰면 죄다 경주로
생각하고 살펴본다. 인터넷 용어로 파닥파닥 낚인 것이다. 허나 불국사와 석굴암 그 좋은 이
름을 꼭 경주의 그곳만 써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들이 이름 특허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석굴을 품었거나 석굴로 이루어진 절로 경주 외에도 석굴암이란 절이 여럿
존재한다. 일단 제2석굴암으로 유명한 군위(軍威) 석굴암이 있고, 도봉산(道峯山)에는 석굴암
이란 절이 무려 3곳이나 존재한다. 의정부 회룡골에 있는 석굴암과 도봉산 만장봉(萬丈峯) 밑
의 석굴암, 그리고 이곳 석굴암이 그것이다. 경주 석굴암이 천하에 널린 석굴암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강해 석굴암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다른 석굴암이 제대로 빛을 못본 것이다. 물론 홍
보력 부족과 문화유산이 빈약한 점도 한몫 한다.

이번에 찾은 석굴암은 도봉산 서쪽을 이루는 오봉의 서쪽이자 관음봉(觀音峯) 서남쪽 350m 고
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변이 온통 수해(樹海)와 산뿐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외로운 절집
으로 우이령이 통제된 이후 40년 동안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더욱 외로웠다. 그렇게 사람과
돈을 몹시나 그리워하다가 우이령의 사슬이 풀린 이후, 방문객이 늘면서 점차 흥하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북한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
이 북극성(北極星)을 떠받들고 있는 크고 작은 산세인데 물도 맑고 골이 깊어 속세를 잊고 수
행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또한 도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
봉은 도봉산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석굴암의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절에서는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
고 우기고 있다. 허나 의상은 화엄종(華嚴宗)과 귀족불교의 발전을 위해 주로 왕경(王京, 경
주)에서 활동하던 짬밥 높은 승려라 당시 고구려(高句麗)와 팽팽하게 접경을 이루던 이곳에
절을 세울 이유도 없었고, 이런 험준한 곳에 개고생을 하며 절을 세울 까닭도 없었다. 의상이
본격적으로 지방에 절을 세운 것은 문무왕 후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주 부석사)
또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신뢰도가 없으며 고
려 후기에 나옹화상(奈翁和尙)이 3년 동안 머물며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또한 믿기가 어
렵다. 경내에 신라/고려 때 유물이나 주춧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과 석조나한상이 그나마 제일 오래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도봉산의 만
월암(滿月庵)처럼 조용한 석굴 수행처로 전해오던 것을 조선 초나 중기에 건물을 세워 비로소
절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여러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1443년에 무학대사의 제자인 설암 관익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며, 이때 석굴에 지장보살과 나한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1455년에는 단종(端宗)
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여기서 1,000일 기도를 올리고 거금 1만냥을 내려 왕후
의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미루어보면 이 역시 고개를 좌우
로 흔들 수 밖에 없다.
1652년에는 고암(高庵)이 기와를 보수하고 지장보살상과 나한상에 개금(改金) 불사를 했으며,
1872년에 광운(光雲)이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고 한다.

1920년 신계월(申桂月)이 주지로 들어와 1943년까지 머물며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온 박동암 선사(朴東庵 禪師)와 수행을 했다. 박동암은 상해임시정
부(上海臨時政府)의 김구 선생을 도운 승려로 계월이 입적하자 석굴암의 주지가 되어 선풍(仙
風)의 기강을 위해 계속 수행했다.

▲  윤장대

▲  석굴암 요사(寮舍)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우이령 주변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그 여파로 절은 완전 잿
더미가 되고 만다. 다행히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 나한상, 수구다라니 목판 등은 현재 나한
전에 있던 좁은 석굴 안에 들어가 화를 면했다.
그렇게 파괴된 석굴암을 멋지게 일으킨 이가 박동암의 열성 제자인 초안당(超安堂) 유성대선
사(1926~1998, 본명 송만석)이다. 그는 현역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었는데 1954년
5월 의병제대(依病除隊)를 하여 스승인 박동암을 찾았다.
스승은 그에게 석굴암 복원을 간곡히 부탁했고, 그 뜻을 받들고자 바로 그달 26일 어머니 조
병길(조삼매심) 보살과 석굴암을 찾았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석굴암은 완전 처참한 상태라 석
굴 안에 방치된 불상과 목판을 수습하고 임시 움막을 지어 주변에 널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
해 화장을 하거나 군에 도움을 청하여 안장(安葬)이 되도록 힘썼다.

1954년 후반에는 지병으로 친정인 교현리에 와있던 윤봉순이 석굴암 부처의 현몽을 받고 석굴
암을 찾아와 불사를 도왔고, 절에서 기도를 올린 신도들의 입소문을 통해 절의 존재가 알려지
면서 불사에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초안당 역시 낮에는 서울로 나가 탁발을 하고 밤에는
밤을 낮으로 삼아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짓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1964년 기존 석굴
을 넓혀서 나한전으로 삼아 나한도량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허나 1969년 이후 우이령길이 통제되면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석굴암의 족
쇄로 작용했다. 게다가 위치도 궁색해 차량 접근도 힘드니 초안당과 신도들은 쌀과 기와, 생
필품을 짊어지며 송추와 고양 효자동에서 10리가 넘는 산길을 일일이 날랐다.

그렇게 힘겨운 고난을 거쳐 1972년 범종각이 완성되었고, 그 와중에 1977년 어머니를 잃는 아
픔도 겪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9년 요사채를 증축했다. 그리고 1981년 고대하던 전기가
들어오면서 환경은 크게 나아지게 된다. 그 여세로 삼성각과 봉향각을 증축했고 경내 대지도
152평으로 넓혔으며 절로 들어서는 길을 확장하고 나한전을 넓혔다.
1990년대에는 30사단 92연대에 쌍용사를 세워 군대 포교에 나섰고, 오갈데 없는 고아 11명을
수습해 길렀으며 봉선사(奉先寺) 승려를 위해 써달라며 장학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어려운
사찰 살림을 쪼개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초안당이 72세에 나이로 입적하자 대중들의 오열 속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사리가
무려 59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간 이후 그가 친자식처럼 키워온 상좌 도일(度一)이 그 뒤
를 이어 주지가 되었으며, 대지 2만평을 매입하여 제2중창불사를 벌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추게 되었다. 이때 지하수를 개발하여 목마름을 해소했고 후불탱화와 불상, 다양한 탱화를 조
성했으며, 건물 기와를 무려 청동기와로 교체하고 설법전을 지었다.
그러다가 2009년 석굴암의 오랜 족쇄였던 우이령 통제가 풀리자 탐방객 수는 더욱 늘어 절의
명성은 조금씩 높아져 갔고, 조선 후기 나한상과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을 내세워 나한도량
(羅漢道場)을 칭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 단풍음악회를 여는 등, 속세에 절 이름 3자를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

▲  삼성각과 3층석탑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나한전, 요사, 설법전 등 7~8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불좌상(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아쉽게도 친견하지 못함)과 석조
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 등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그들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오봉산 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조망이 일품이라 우이령길은 물론
상장봉 등 북한산 북쪽 산줄기가 훤히 바라보여 마음이 시원해지며, 번뇌가 멋모르고 쫓아오
다 졸도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라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 바람의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
한 절이다.

석굴암은 주말 점심 시간에 중생들에게 공양을 제공하며,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대보름 나
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주는데 꽤 맛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부터 매년 10월마다 단
풍음악제를 여는데 승려 음악가와 절 합창단, 가수, 국악인, 30사단 군악대, 지역 음악가 등
이 출연해 외딴 산사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이때만큼은 고요하던 산사도 우이령길도 꽤
떠들썩해진다.

※ 오봉산 석굴암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연신내역(3/6호선, 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 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우이령(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 1시간.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
  예약이 필요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단 우이동(우
  이탐방지원센터)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예약을 해야된다.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 (석굴암길 519 ☎ 031-826-3573)
* 석굴암 홈페이지는 아래 윤장대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가의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대(輪藏臺)를 돌려보자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면 조그만 기와집에 담긴 윤장대가 마중한다. 윤장대는 불경(佛經) 등
의 서적을 담아두는 책장이자 불가의 사치품으로 지금이야 많은 절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서 보
기가 쉬워져서 그렇지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윤장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오래된 것도 없다.
그만큼 희소성이 크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문맹률이 높아(거의 90% 이상) 상당수의 백성들은 불경을 읽지 못했다. 그
러니 이해도 힘들었지. 하여 생각한 것이 윤장대를 활용한 것으로 책장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
고 그것을 돌리면 경서를 모두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영업을 했다. 또한 윤장대를 돌리면
서 소망을 들이밀면 소망이 이루진다면서 윤장대에 대한 중생들의 관심을 높였다.


▲  경내 밑부분 (왼쪽의 건물은 설법전)

▲  석굴암 대웅전(大雄殿)

윤장대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가장 먼저 이곳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살짝 들려진 지붕 추녀의 맵시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975년에 초안당이 지은 것으로 높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 제법 위엄
이 있어 보인다. 건물 중앙에는 1970년 우봉(又峰)이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있으
며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육체미가 넘치는 석굴암 석가모니3존불과 석가모니 후불탱
후불탱은 1998년 회주 초안, 주지 도인, 금어 박갑철이 조성했다.

         ◀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온갖 신들의 무리가
빼곡하게 담긴 탱화로 1991년 금어 김용희가
그렸다. 건물 내부의 기운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여 법당에 많이 걸어둔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굴암 대웅전

▲  석굴을 넓혀서 만든 석굴암 나한전(羅漢殿)

대웅전을 지나면 바위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3명 정도 들어갈 수 있
는 좁은 굴로 석굴암이란 이름도 바로 이 굴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가 곶감을 피해 다니던 시절부터 도봉산 동쪽 자락의 만월암이나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의 목정굴(木精窟)처럼 참선 공간으로 쓰였다가 조선시대에 굴 주변에 건물을 짓고 이름도
편하게 석굴암을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석굴암이 초토화되자 이곳에 서린 석조불좌상과 나한상, 지장보살상 등이 이곳
에 피신을 했으며, 1954년 초안당이 그들을 수습하고 1964년 석굴을 넓혀 나한상의 보금자리
로 삼았다. 이후 도일이 내부를 넓히고 주변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나한전 석굴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나한상을 중심으로 조그만 나한상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굴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좀 따스하다. 또한 석굴 왼쪽에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1990년대까지 석굴암의 갈증을 해소해주던 유일한 식수원으로 여기서는 용왕샘이
라 부른다.
지금이야 요사 옆에 지하수를 뚫어 물 걱정은 크게 덜었으나 이 샘은 수량이 적어 자주 바닥
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부정한 짓을 하거나 고기를 먹은 이들이 손을 대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샘이 발끈해 그냥 말라붙었다고 한다.


▲  나한전 내부 - 나한 형님들이 나란히 단체 촬영에 임하고 있다.

▲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1호

나한전 불단을 가득 메운 나한상들은 색을 입히지 않아 대부분 하얀 피부이다. 일부는 꺼무잡
잡한 피부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 크게 차이는 안난다. 이들 가운데 정중앙에 자리한 나한이
꽤나 독보적인데 그가 이곳의 주인장인 석조나한상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연꽃무늬가 새겨
진 대좌와 듬직한 광배(光背)까지 두르고 있으며 검은 색의 옷까지 걸쳐 조그만 나한들의 두
목 역할을 한다.

이 나한상은 앉은 키 60cm, 무릎 폭 40cm의 조그만 모습으로 18세기에 한봉당 창엽(漢峰堂 瑲
曄)과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 등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석조불좌
상과 달리 표정이 밝고 인자하며 기품 있는 모습으로 중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광배와 대좌는
1970년대 이후에 붙인 것이고 옷 색깔은 근래에 입혔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멋이 좀 떨어지긴
했다.
참고로 이곳 나한들은 생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양도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0년
대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3명의 노파가 절 사람들이 게을러 생쌀을 공양한다며 초안당에
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한을 보니 글쎄 생쌀이 나한 몸과 입,
무릎에 붙어있었고 생쌀 불기마다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한의 그런 믿거나 말
거나 영험 사건으로 '석굴암 나한이 생쌀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객이 몰려들었고 그
덕에 공양쌀과 시주금이 늘어나 요사채와 삼성각을 무난히 올릴 수 있었다. (과연 나한의 소
행이었을까?)


 

♠  오봉산 석굴암 마무리 (삼성각)

▲  석굴암 석조(石槽)
오봉산이 제공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나와 중생의 목을 축여준다.
내 목구멍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갈증도 싹 축여주면 좋으련만~~

▲  하얀 천막이 설치된 설법전 옥상
설법전은 경내를 받쳐든 석축 앞에 엮은 2층 건물로 그 옥상은 단풍음악제를
비롯한 절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梵鍾閣)
초안당이 1980년대에 지은 것으로 1984년에 조성된 범종이 봉안되어있다. 저녁 6시가
되면 자고 있던 범종이 깨어나 우이령 일대에 잔잔하게 종소리를 들려준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3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천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름 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머금고 있어야 되지만 독성은 나한전에 따로 봉안하고 여기서는 약사불과 칠성
탱, 산신탱을 봉안하여 3성을 채웠다.
이들 가운데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상 뒤에 있
음에도 지장탱을 안달고 약사탱(1985년에 제작됨)을 단 점이 특이하다. 그들 양쪽 구석에는
1985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칠성탱이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삼성각이란 이름보다는 지장
전을 칭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지장보살이 중심에 있기 때문임)

삼성각 앞 벼랑에는 이곳의 유일한 탑인 3층석
탑이 하얀 맵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왜 대웅
전 뜨락에 안두고 이런 험한 벼랑에 두었는지
모르겠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조망만큼은 아
주 일품이다.
석굴암에서 제일 조망이 좋은 곳이니 꼭 올라
가 그 멋을 체험하기 바란다.


 

◀  천하를 뜨락으로 삼은 석굴암 3층석탑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겨진 산신탱

▲  색감이 무지 고운 칠성탱


▲  삼성각 내부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의 공간이 꽤 넓어 그들이 삼성각에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좌우에는 현란한 모습의 옥탑 2기가 자리한다.

▲  석굴암 석조지장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호

약사탱 앞에 자리한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근래에 도금을 입혀 금빛을
찬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불상이 주먹 크기 정도로 매우 작고 마치 얼굴이 겉늙은 동자상에 지
장보살 복장을 입혀놓은 듯하여 귀엽기도 하다. 그는 석조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뭔가 시름에 잠겨있는 표정 같으며, 눈과 코,
입, 귀, 수염이 뚜렷하다.
그는 6.25시절에 석굴에 들어가 화를 피했으며 초안당이 절을 재건했을 때 삼성각을 세우면서
그 건물에 봉안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우이령과 상장봉 능선의 장쾌한 위엄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숲과 칼처럼 솟은 산, 그리고 짙은 파랑색의
하늘 뿐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곳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주변
대웅전 앞에는 잠시 발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가 닦여져 있다.


석굴암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곳에 문화유산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냥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고색의 향기가 메마른 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
불들을 만나보니 의외에 장소에서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석굴암
에 대해 미리 살피지 않고 간 나의 실수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요사와 설법전 내부. 석조불좌상 등을 제외하면 경내에 왠만한 것은 다 살펴봤으며 이곳 공양
밥이 맛있다고 하는데 제공 시간을 지나쳐서 먹지 못했다. 우이령이 나와 아주 먼 곳에 있었
다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직선거리로
7km도 안됨) 겨울 제국이 저물고 소쩍새가 우는 봄이 오면 그때 다시 인연을 만들어 우이령과
석굴암의 품에 퐁당 안기고 싶다.

이 일대가 개발의 칼질도 숨을 죽이는 영역이라 그 칼질로부터 다소 자유롭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식 개발의 칼질이 워낙 개념없기로 유명하니 자칫 약을 빨고 우이령 일대를 난도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곳은 천지가 개벽해도 대자연의 깊은 공간이자 북한산(삼각산)과 도봉
산에서 가장 한적한 곳으로 우리 곁에 남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렇게 석굴암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유격광장으로 내려와 우이령을 타고 서울 우이동
으로 넘어갔다. 우이령 나머지 부분은 본글에서는 생략하며 아래 별도로 링크된 글을 참조하
기 바란다. (☞ 우이령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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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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