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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이상화 고택



' 대구 겨울 나들이 '
(팔공산 북지장사, 시인 이상화 고택)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북지장사 지장전 대구 이상화고택

▲  북지장사 지장전

▲  이상화 고택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올해도 변
함없이 미답처 지우기에 열을 올리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던 중, 대구에서 적당한 미답
처가 감지되었다. 바로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근래 무섭게 뜨고 있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들이다. 그래서 북지장사를 먼저 들렸다가 대구 도심으로 나와서 햇님이 떨어
질 때까지 중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최대한 챙겨보기로 했다.

햇님이 등청하기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대구의 대표 관문인 동대구역에 두 발을 내렸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인 동대구역을 서둘러 벗어나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에서 대구 급
행좌석 1번(동화사↔다사,매곡리)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가 동화사로 넘어
가기 직전인 방짜유기박물관에서 하차했다.



 

♠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둘러보기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①

북지장사는 방짜유기박물관 정류장에서 도장길을 따라 40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전국적인 도
보길 유행에 따라 대구시는 북지장사 길을 '대구올레 팔공산1코스(북지장사 가는 길)'로 포장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리는 2.5km(방짜유기박물관 입구↔북지장사)로 느긋한 길의 연속이
라 걷는 마음도 가볍다.
북지장사 길을 그대로 둘레길로 삼은 탓에 전 구간이 포장길로 박물관입구에서 약 0.9km 정도
는 보행길을 갖춘 2차선 길이나 그 이후부터는 굽이굽이 이어진 1차선 시골길이다.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 없어 무리하게 길을 넓히지 말고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길 중간에
두툼함 소나무 숲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②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③

북지장사 길 중간에는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있다. 소나무들이 얼마나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던지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아 어두울 정도인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의 번뇌를 거
의 털어주어 나의 돌머리와 어지러운 마음에 한 줄기 평화를 준다. 시작부터 이런 명품급 숲
길을 내밀며 중생을 맞이하니 북지장사에 대한 첫 인상과 기대감을 적지 않게 높여준다.


▲  북지장사 숲길과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는 계곡(숲길 왼쪽)

▲  드디어 도착한 북지장사 용호문(龍虎門)

도장길(북지장사 가는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북지장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주
차장을 지나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용호문과 그 좌우에 딸린 기와집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데 절에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기 때문에 용호문이 일주문(정문)의 역할을 도
맡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지장전이 나타나고 그 뒤쪽에 대웅전이, 동쪽에는 오래된 3
층석탑이 있다. 그럼 여기서 북지장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팔공산 동남쪽 끝자락이자 노족봉(老足峰, 600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무수히 널린 늙은 절의 하나이다. 같은 팔공산(八公山) 식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
寺, ☞ 관련글 보기), 갓바위(선본사, ☞ 관련글 보기)의 명성에 크게 가려져 있고 규모도 작
지만 그들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으며 산 속에 고적하게 자
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꽤 깊다.
북지장사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지장사'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지장사'이나 대구의 동남쪽
끝인 가창면 우록리에도 오래된 지장사가 있어 그들을 구분하고자 팔공산 것은 북지장사, 우
록리 것은 남지장사(南地藏寺)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 절이 특별한 사이도 아님)

북지장사는 48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흔쾌히 밝혀줄 사료
(史料)와 유물은 없으며 그 시절 대구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서 전해준 불교를 때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
니 팔공산(八公山)에 절이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다.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는 북지장사의 밭이 200결
이나 된다고 쓰여있어 고려 초에도 제법 잘 잘나갔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공산(公山) 지장사'로 나와있고 신라 후기에 지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
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조용히 있지만 왕년에는 오히려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192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중창했다고 하며 지장전(옛 대웅전) 기와 중 1623년
과 1665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어 17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부속 암자
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19세기 초에 동화사의 그늘
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으로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요사, 산령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을 비롯해 3층석탑과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아미타삼존불좌상(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1호),
금고(金鼓,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5호) 등이 있다. 허나 정보 부족으로 아미타3존불과 금고는
만나지 못했으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보살도)과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 옛 석재(石材)
와 주춧돌 등이 전하고 있다.


▲  북지장사 지장전(地藏殿) - 보물 805호

단출하고 날씬하게 생긴 지장전은 북지장사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
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뒷면에 사잇기둥을 세워 3칸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3칸을 다
합쳐봐야 겨우 일반 기와집 1칸 정도 크기이다. 홀쭉해 보이는 건물에 비해 지붕이 육중하게
보여 이를 받치고자 추녀가 있는 네 모서리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을 활주
(活柱)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꽃살창호를 달고 옆면과 뒷면에 띠살창호를 달았는데 기단(基壇)은 2단으로 다
지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닦은 다음 건물을 올렸다. 기둥 윗쪽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안팎 4출목(出目)으로 촘촘히 짜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공포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스타일이나 용봉(龍鳳) 머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아 불단을 마련했고 가구(架構)는 도리칸이 1칸으로 대들보는 사
용하지 않고 사각귀틀맞춤으로 짠 다음, 둘레는 빗천장으로,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했다. 이
런 기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사찰 건물로써는 흔치가 않아 처음에는 목탑으
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물 지붕에서 1623년과 1665년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깃든 기와가 발견되어 1623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해체보수 때 1761년에 지장전으로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원래부터 지장전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웅전이 화마(火魔)의 장난으
로 쓰러지자 그 앞에 있던 지장전이 그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간판을 바
꾸기도 했으며, 대웅전이 새로 지어지자 그에게 법당(法堂)의 역할을 넘기고 지장전으로 돌아
왔다.

▲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지장전

지장전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조선 후기 지장탱이 들어있다. 그
들을 모두 친견했으나 지장전 내부를 찍지 말라는 절 관계자의 당부로 굳이 사진에 담지 않고
나의 침침한 자연산 망각에 살짝 담고 나왔다.

나의 촬영을 거부했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웅전 뒤쪽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긴 하나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寶珠) 등으로 보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여겨
진다. 단정한 모습과 온화한 인상으로 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북지장사의 불투명한 창건 시기를 최대 신라 후기까지 끌어올려준다.


▲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地藏寺有功人 永世不忘碑)

지장전 바로 앞에는 약간 빛이 바랜 조그만 비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다. 그는 운암당 옥준대
사(雲巖堂 玉峻大師)의 공적을 기리고자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
다.
17~18세기 지장사 승려들은 세금으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바쳤는데 그 수고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운암당이 조금 해소해주자 이를 감사하게 여겨 비석까지 세웠고 나중에는
지장전 앞에까지 두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린다.
비석이 심어진 비좌(碑座)는 높이 30cm, 92x60cm 규모이며, 빗돌은 높이 101.5cm, 상부 폭 50
cm, 하부 폭 47cm로 빗돌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다.

▲  지장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設禪堂)

▲  아직도 연꽃무늬가 생생한 옛 석재
(석등의 일부로 여겨짐)


▲  지장전 뒷통수에 자리한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마련했다. 예전 대웅전이 화재로 맥
없이 쓰러지자 지장전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가 다시 지어짐으로써 법당의 자격을 다
시 찾아왔다. 허나 북지장사에서 지장전의 존재감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 대웅전이 절의
중심 건물임에도 지장전의 보조 건물 정도로 작게만 보인다. 게다가 지장전의 뒤쪽에 있으니
그런 기분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뒷통수에 있는 산령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산신의 공간이다.

▲  북지장사 3층석탑(동탑)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6호

지장전 뜨락 동쪽에는 고색이 깊게 묻어난 3층석탑 형제가 있다. 이들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높이는 모두 3.8m이며 옥개석과 탑
신이 같은 돌로 지어졌다.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1981년 5월 해체복원을 했는데 이때 땅 속에 묻혀있
거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살을 갖다붙였다. 아무리 복원을 했다고 해도 고된 세월의 흔
적까진 어쩌질 못하여 군데군데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이 역력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 동탑

▲  3층석탑 서탑


▲  북지장사를 뒤로하며

생각보다 꽤 작고 아담했던 북지장사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에 금고와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와야될 구실
을 빚고 말았으나 아직도 이 땅에는 나의 발이 닿지 않은 미답지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즐비
하여 이곳과의 재 인연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북지장사를 나오다가 이 땅의 유일한 방짜유기 전문 박물관인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잠시 발
을 들였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녹여서 만든 유기의 일종으로 징과 꽹과
리 등은 오로지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에 담지 않아서 이 정도 언급
으로 쿨하게 선을 긋겠음, 방짜유기박물관 ☎ 053-606-6171~4, ☞ 홈페이지 보기>
그곳을 둘러보고 백안3거리로 나와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섭취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되었고 후식으로 커피 외에 식혜도 준비되어 있어 후식 인
심도 넉넉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중구(中區)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보고자 대구시내버스 401번(갓바위↔
범물동)을 잡아타고 대구 도심 한복판인 반월당(半月堂)으로 나왔다.
허나 햇님이 적지 않게 기운 상태라 근대문화유산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햇님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싶지만 인간 주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길을 서둘렀다.

* 북지장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25 (도장길 243, ☎ 053-985-5217)



 

♠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대구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고택

▲  시인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반월당역(반월당교차로)에서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계산5거리이다. 여
기서 오른쪽(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화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
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이들은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원래 그들을 볼 계획은 없었다. (존재
조차 몰랐음) 그저 청라언덕과 계산동성당만 생각을 했었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한 그들의
깜짝 등장에 두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그들을 덤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이상화 고택 안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아주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5일,
여기서 가까운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2남으로 태
어났다.

그의 아호는 무량(無量)이며, 호는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를 잃자
14살까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한문을 익혔다. 1915년 서울로 올
라가 경성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 지역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급히
피신, 박태원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으며, 그해 10월 서순애(徐順愛)와 혼인을 했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등
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단조','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를 익히고자 바로 그해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3월 아테네프랑세를 수료하여 프랑스 유학을 추진하던 중, 그해 9월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그때 관동 지역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잔인하게
탄압을 당하는 꼴을 보고 크게 분노해 프랑스를 포기, 1924년 3월 서울로 건너와 가회동(嘉會
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그 유명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했다.

1925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란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했으며, 그해 8
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 시에 발작한 왜정(倭政)이 태클을 걸어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었는데,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淡交
莊)이라 칭하며 많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0년 '대구행진곡'을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냈으며 1933년 교남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내 사임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하다가 실패했다. 1935년 시 '역천'을 '시
원' 2호에, '나는 해를 먹다'를 '조광' 2호에 발표했다.

1936년 큰 형인 이상정(李相定)을 만나고자 중원대륙(서토)으로 건너가 남경과 북경, 상해 등
을 3개월 동안 여행했으며 1937년 3월 귀국하자 왜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이후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했으며, 1939년 6월 계산
동(桂山洞)2가 84번지(현 자리)로 집을 옮겼다. 허나 교가(校歌) 가사 문제로 왜정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시 원고와 고월 유고까지 압수를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1941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했고 '춘향전'을 영역했으며, 국문학사와 불란
서시정석 등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아침 8시 45분 경, 위암으
로 계산동 집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가만히 보면 정의롭게 살아온 문학인들은 거의 명줄이 짧고<이상화, 김영랑,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불의(不義)와 어울리며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느라 여념들이 없던 작자들<서정주,
이광수 등>은 너무 쓸데없이 오래 산다. 언능 가야될 잡것들은 늦게 가고 정작 오래 살아야
될 사람들은 일찍 죽으니 그래서 이 나라의 정의가 제대로 안서는 모양이다.

1948년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최초로 건립되었고, 1985년 죽순문학회가 '상화시인상'을 제
정하여 '2009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라 시인상을 승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  이상화 고택 안채 마루 (뒤주와 이상화의 흉상)

이상화 고택은 왜정 때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등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감나무 마당이라 불렸다.

이상화가 저 세상의 별로 홀연히 사라진 이후, 비록 주인도 바뀌고 모습도 조금 변화를 겪었
지만 집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허나 이곳이 대구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다보니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이 군침을 흘리며 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2001년 대구 중구청이 고택이
있는 계산동2가 84번지 일대 도로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념없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고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제보를 하여 2002년 1월, 대구MBC, 매일신문, 영남
일보, 한겨례신문 등에서 이를 보도했고, 윤순영(분도예술대표), 이상규(경북대 교수), 공재
성(대구MBC) 등 3명이 앞장서 고택보존운동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
시키면서 그 마수를 부려뜨렸다.
허나 2003년 5월, 이번에는 (주)L&G에서 32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자 다시 고택을 괴롭히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에서 대구시를 설득, 상화고택 보존을 조건부로 신축을
허가했다. 이에 (주)L&G는 상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매입해 착공 전에 대구에 기부채납
하겠다며 대구시에 공증을 제출했다.

2004년 6월 (주)L&G와 상화고택 소유자간의 고택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7월에 군인공제조합
이 그 신축건물 공사를 맡게 되자 상화고택 기부채납 기본 협약을 다시 체결, 2005년 6월 상
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대구에 기부채납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택이 완전히 살아남게 되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해산되었고
그동안 모은 이상화 시집 1,729권과 모금액 8,600만원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또한 이상화의
후손들과 그를 흠모하는 문인들이 그의 유품과 자료를 흔쾌히 기증하여 이상화 고택을 아낌없
이 꾸며주었다.

2007년 5월 상화고택 보수공사에 들어가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2008년에도 3달간 내부 공사
를 벌여 2008년 8월 12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이후 대구 중구의 대표적인 근대 명소이자 문
학의 성지로 뜨겁게 추앙을 받으며 대구 도심 투어의 필수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  책상과 의자가 놓인 안채 방 ①
사랑채에는 이상화의 시집과 유품, 사진, 그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안내문을
배치하여 그의 조그만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②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③

▲  무늬만 남은 부엌
이상화의 문학 작품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음식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2007년 이후 고택을 손질하면서 부엌이 조금 변형되었으며, 부뚜막은 더 이상
연기를 피울 일이 없어 그저 먼지만 가득하다.

▲  감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는 장독대
왕년에는 다양한 음식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이다.

▲  이상화 고택 서쪽에 자리한 계산예가(桂山禮家)
계산예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구 계산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근대문학 등을 사진과 자료, 영상물 등으로 엮어낸 근대문화체험관이다.
(기념스탬프 코너도 있음)

▲  계산예가 옆 골목길 (계산동성당 방향)

시민과 문학인들이 개발의 칼질과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시키며 지켜낸 이상화 고택을 둘
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휘장을 걷는다.


* 이상화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 (서성로 6-1, ☎ 053-256-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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