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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계산동성당
▲  대구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사과나무 선교사 스윗즈주택

▲  청라언덕 사과나무

▲  선교사 스윗즈주택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간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팔공산
남쪽 자락에 깃든 북지장사(北地藏寺, ☞ 관련글 보기)와 방짜유기박물관을 먼저 둘러
보고 대구 도심으로 나와 후식거리로 여러 근대문화유산을 더듬었다.

대구시는 중구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손질하고 코스를 여러 개 엮어서 '대구 근대(近
代)로의 여행'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근대문
화유산의 1급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 풍문이 내 두 귀까지 들려오
면서 그곳의 위엄을 내 침침한 두 망막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계산동성당으로 이동하다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유명한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고택이 마중을 나와 그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옆에
도 기와집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구한말 민족 기업가인 서상돈의 고택이다. 본글은 서
상돈 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화 고택은 북지장사글 참조)



 

♠  구한말 대구 지역 민족기업가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  서쪽에서 바라본 서상돈고택

이상화 고택 동쪽에는 이상화만큼이나 대구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서상돈의 재현된 고택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서상돈(1850~1913)은 구한말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1850년 10월 17일 경북 김천
마잠(지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달성서씨 집안으로 집안이 유난히도 천주교와 인연이 깊어
천주교 박해로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당한 인물이 많았다. 그 역시 집안의 피는 못속여 일찍
부터 천주교를 신봉했다.
1859년 아버지 서광수(徐光修)가 병사하자 어머니는 서상돈 형제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외할아버지인 김후상(金厚詳)의 교육과 보살핌을 받았
으며, 시내 상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터지자 큰아버지 서인순과 삼촌인 서익순, 서태순이 처단을 당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서상돈은 나중에 큰 부자가 되면 꼭 천주교 전교와 자선사업을 하기
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868년 대구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을 받아 보부상(褓負商)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뛰어나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고 1880
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리며 매년 3만 석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대구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상(大商)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사업에 열중한 나머지 혼기를 놓쳐 1880년, 30세
의 늦깎이 나이로 수안김씨와 혼인을 올렸다.

1885년 경상도 지역 천주교 영업을 담당하던 로베르<Robert, 김보록(金保祿)> 신부가 신나무
골 교우촌(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을 찾았다. 이에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그를 도
왔고 1891년 12월 대어벌에 임시성당을 세웠다. 그 성당은 1897년 계산동 초가로 자리를 옮겼
으며 1899년 로베르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세우자 흔쾌히 많은 비용을 제공했다.

189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대우로 탁지부(度支部)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봉세관(封稅官)
>에 임명되어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의 세정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
자 거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교육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
건물에 한문 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지어 주었고, 그 학교는 1908년 봄, 성립학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5년 이일우를 도와 달서여학교 설립을 도와주었고, 1910년에는 성립여학
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를 설립해 학교 교과서와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을 발간하는 등 대구 지역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서상돈 고택 모형도
여기서는 생가로 나와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이므로 '생가'란 명칭은
맞지가 않다. 엄연히 '서상돈고택'을 칭하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생가라고
쓰고 있으니 고택 관리자들의 초보적인 실수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1906년 비리비리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왜열도에 1,300만원의 거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
지 못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상돈은 돈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
한다고 인식하고 1907년 1월 29일,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하여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했고 군민대회를 개최해 나라의 빚을 갚자고 호
소했다.
그래서 4월 말까지 외국 동포를 포함해 4만여 명이 흔쾌히 참여해 230만원의 돈을 모았다. 허
나 모처럼의 대동단결도 친일매국노인 일진회와 왜 통감부(統監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
했다.

1911년 로마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를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을 하자 대구로 낙점될 수 있도
록 힘을 썼으며 임시 주교관(主敎館)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조금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999년 광복절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대구
매일신문사를 중심으로 '서상돈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2002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어 늦게나마 그의 자주자강 민족정신을
기린다.

▲  서상돈 고택 사랑채

▲  서상돈 고택 관리사무소

서상돈 고택은 개량한옥 스타일로 여러 동의 집을 지닌 고래등 기와집이었다. 서양식 수목을
심고 연못과 석탑을 두었으며, 서양식과 우리식이 절충된 정원을 지니고 있는 등 대구 제일의
부잣집으로 위엄을 날렸다. 허나 아쉽게도 왜정을 거치면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
라졌고, 서상돈 일가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고택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을 따
름이다.

현재 고택은 2008년에 원래 자리 부근에 크게 축소하여 재현한 것으로 건물 3동과 문, 벽돌문
이 전부이다. 키다리 빌딩 뒤쪽에 조그맣게 자리해 있다 보니 초라한 기분도 적지 않게 드는
데 아무래도 마련된 자리가 좁고 고택에 대한 자료도 부족해 되는대로 이렇게나마 재현을 한
것이다. (복원보다는 재현이 맞을 듯)

   ◀  정면이 꽉 막힌 고택 대문과 벽돌문
문은 바로 앞에 신성미소시티아파트가 높이
들어앉아 있어 굳게 닫혀 있다. 하여 뻥 뚫린
고택 서쪽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야 된다.

* 서상돈 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00 (달구벌대로 2051)



 

♠  대구 최초의 근대 건축 스타일의 천주교 성당
대구 계산동성당(桂山洞聖堂) - 사적 290호

이상화고택 북쪽에는 계산동성당(주교좌 계산대성당)이 이국적인 멋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널린 키다리 건물들에게 절대로 꿇리지 않는 위엄을 보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계산동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자 최초의 근대식 성당이며, 이 땅에서 3번째로
지어진 근대식 성당으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서상돈 고택에서 언급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1891년 대어벌 임시성당(인교동)을 지었
는데 1897년 현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를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1899년 그 초가를 부시고
서상돈의 후원으로 번듯하게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지었으나 1901년 2월 지진으로 화재가 나
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로베르는 제대로 된 서양 스타일의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서상돈의 도움을 다시 받
아 1902년 지금의 성당을 세우게 된다. 설계는 로베르가 했고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 공사
에 참여했던 청나라 애들을 잡아와 공사를 시켰다.
1911년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크게 높였고 계속해서 건물을 불려나가 1918년 12
월 24일, 현재의 우람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라틴십자형으로 2개의 종각(종탑)이 우뚝 솟아 있어 지역 사람들은 '뾰족집'이라
불렀다.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尖塔)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는데 첨탑을 포함하여 성당
높이가 거의 10층 건물에 버금간다. 앞면과 양측에 장미창으로 장식을 했으며, 화강석 기단(
基壇) 위에 붉은 벽돌로 건물을 닦고 그 위를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다졌다.


▲  장엄함이 묻어난 계산동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자유 관람 및 출사가 가능하다. (단 예배와 미사시간은 안되며, 성당의 여러 사
정으로 개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하여 성당 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치 유
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듯, 분위기가 정말 서양틱하다.
비록 천주교에 일말에 관심도 없지만 잠시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모아 기도
를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 오른다. 허나 기도를 해봐야 천주교 주인이 리플이나 댓글도 달아
주지 않을 것이고, 난 어디까지나 답사를 가장한 나그네이니 이 정도로 내부를 살피고 밖으로
나왔다.


▲  1984년 5월 5일, 로마교황청의 주인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리고자 성당에서 달아놓은 동판과 석조 조형물

▲  계산동성당의 다양한 옆문들 ▲
(성당 내부는 정문으로 들어가기 바람)

▲  계산동성당의 뒷모습
성당이 동서로 길쭉한 모습이라 마치 커다란 4발 동물이 고개를 쳐들고
꼬랑지를 흔들며 앉아있는 모습 같다.

▲  계산동성당의 꼬리 부분

▲  성립여학교 2회 졸업식 사진(1913년)

성립여학교는 서상돈이 계산동성당에 지어준 여학교이다. 이 사진은 수녀들이 찍은 것으로 수
녀(2명)와 앳된 모습의 여학생(10명), 교회와 학교 관계자들(3명)이 나란히 촬영에 임하고 있
다. 남는 것은 정말 그림과 사진밖에 없다고 하더만 이미 저 세상으로 훌쩍 가버린 저들은 이
렇게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남겼다.

* 계산동성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1 (서성로10, ☎ 053-254-2300)
* 계산동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구사과의 고향이자 근대 건축물을 3개나 품은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 청라(靑蘿)언덕

▲  3.1운동계단 윗부분

계산동성당에서 서성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손을 내민다. 속세에서는 그
를 3.1운동계단(3.1만세운동 계단)이라 부르는데 1919년 대구 지역 3.1운동의 현장으로 지역
사람들은 왜정의 감시를 피해 이 계단으로 계산동성당과 도심으로 들어가 만세운동에 참여했
다. 9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청라언덕 정상이 있다.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가 담겨진 표석

'동무생각'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인 청라언덕은 20세기 초반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를 꾸렸던 미국 선교
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푸른 담쟁이를 많이 심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뜻하는 청라
언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달성(達城, 달성공원)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동산
(東山)이라 불렸다. 달성과 더불어 대구 도심의 야트막한 지붕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대구사과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언덕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늙은 주택 3동과 3.1운동계단, 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歌曲)인 동무생각 노래비, 동산의료원 구관 현관, 동산의료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무
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대구에서 꼭 가봐야 되는 근대문화유산 명소로 시간이 흐르다가 잠시
졸도하여 정지된 듯, 고풍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촬영지로도 많이 등장한다.

청라언덕하면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대구 출신
작곡가로 청라언덕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결국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추억하고자 직접 작곡을 했고 이은상(李殷相)이 노랫말을 붙여주
었다. 가사에 나오는 백합과 동무는 그 여학생을 뜻하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이런 명곡이 태어났다.


▲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챔니스 주택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그는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安山巖)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주택을 지었다.

남북으로 약간 긴 사각형 형태로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
단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서재, 부엌, 식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
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
뚝이 있는데, 1층 동남쪽에는 넓은 베란다를 설치했다. 이런 양식의 건물은 그 시절 미대륙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의 이름인 챔니스는 이곳에 살았던 미대륙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식 이름은 차미수(車米秀
)이다. 1925년 부인과 이 땅에 들어와 대구에서 16년을 살았으며, 1927년 딸 바바라를 얻었으
나 생후 3달 만에 잃고 만다. 1941년 왜정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93년까지 동
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트(H.F Moffett)가 거주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
관으로 활용하여 개방하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17시가 넘은 때라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계명대에서 세운 의료선교박물관은 조선 후기에서 20세기까지의 우리나라 의학 역사와 의학자
료, 대구 지역 기독교와 선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챔니스 주택에, 후자는 스윗즈
주택에 두었다.
* 의료선교박물관 관람문의 : ☎ 053-250-8700

▲  챔니스 주택의 뒷모습
앞에 하얀 피부의 공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다.

▲  챔니스 주택의 앞모습


▲  챔니스 주택 산책로와 장식물로 놓인 돌확 등의 석물들

▲  선교사 블레어(Blai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챔니스 주택 남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2층짜리 블레어주택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미국 선교
사 주택으로 블레어란 선교사가 거주했다고 해서 블레어주택이라 불린다.
대구읍성 성돌로 기초를 닦은 챔니스와 스윗즈주택과 달리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닦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 집을 다진 것으로 남북으로 약간 길쭉한 네모 형태를 이
루고 있으며,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가 있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그 오른쪽이 집 중앙으로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있으며 그 좌
우로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두었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홀 위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
(Sun room)을 설치했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뚝을 지니고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
에서 그 시절 미국 양이(洋夷)들의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챔니스와 스윗즈주택은 사진을 여럿 담았으나 블레어주택은 저거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우선
담고 나중에 담는다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  1899년을 강조하는 동산병원(동산의료원) 구관 현관(포치, Porch)

머리에 'Since 1899'라 쓰인 이 포치는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
중원(濟衆院)은 189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31년 구관(舊館)이 세워졌으며, 2010년 대구지하철
3호선 공사로 인해 부득이 포치를 떼어와 이곳에 두면서 이렇게 허전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구관은 그대로 있음)

▲  구관 현관(포치)의 옆 모습

▲  1970년대 고압산소 치료기

구관 현관 안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고압산소 치료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연탄가스에서 많
이 배출되는 일산화탄소 급성 중독환자 치료에 쓰였던 것으로 1970년대 초 미대륙 북장로교의
밴 클레브(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공업사)의
고(故) 최운한 대표가 이 땅 최초로 제작했다.
1972년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되어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그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
료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1990년대에 연탄보일러의 대중적인 공급으로 겨울 제국의 핍박
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대신 바람직하지 않은 대기물질인 일산화탄소 배출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여럿 있었음) 바로 이 치료기
가 그들을 저승의 문턱에서 많이 꺼내주었다.


▲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청라언덕 대나무군락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뜨거나 가지만 앙상한 가운데 유일하게 푸
른 빛을 내는 고고한 존재가 있다. 바로 스윗즈주택 부근의 작게 우거진 대나무군락이다. 대
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의 기독교 일변도가 되버린 청라언덕에서 대나무숲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慶州)에서 조선시대 유적을 만난 기분인데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여기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대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허나 그들은 싹 사라지고 뿌리만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의료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1999년에 지금의 자리에서 푸르게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의 나무'라 부르고
있는데,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는 구한말과 왜정 시절에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준 은혜와 사랑이 대나무 뿌리처럼 깊고 단단하게 여기에 뿌리 내린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  선교사 스윗즈(Switze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스윗즈 주택은 1906~1910년경에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이다. 지어진 이유는 앞서 두 주택과 같
으며 대구읍성 철거로 나온 성돌을 가져와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었다.
스윗즈(스위처) 여자 선교사(1880~1929, 한국명 성마리다)는 1911년 이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해롤드(한국명 현거선), 계명대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
사가 머물렀는데 전통 한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개조되었고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계단을 여러 단 설치하여 바닥을 높인 현관(포치)을 들어서면 남면 중앙에 거실, 동쪽에 응접
실과 이어지며, 남쪽 벽을 일부 밀어 창을 설치한 거실은 응접실과 서쪽의 침실, 북쪽의 계단
실과 통하게 되어있다. 계단실의 좁은 마루에서 식당과 화장실로 연결되며 뒤쪽 주방은 작은
홀을 지나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계단실 남쪽에 침실 2개를 두고 서쪽에 욕
실을 두었으며, 지붕에는 2개의 굴뚝이 멀뚱히 자리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이 인수해 챔니스 주택과 함께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
로 기독교와 선교 관련 유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관람시간에 닿지 못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옆 모습


▲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 일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동산의료원이 초창기에 세운 교회 종을 가져와
개원 100주년(1999년) 기념 종탑으로 삼았다.

▲  대구사과의 고향, 청라언덕 사과나무 - 대구 보호수 01-01호

청라언덕은 대구사과의 고향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기념으로 초대병원장인 존슨 박사<
Woodbridge O. Johnson, (우리식 이름, 장인차)>는 미대륙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심으니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나온 사과씨앗이 대구
일대로 널리 보급되면서 대구는 사과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됨)
그때 심어진 나무는 벌써 세월이 잡아갔고 그의 아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으
며, 높이 7m, 둘레 0.9m로 나이는 약 90년이다. (2000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70년) 벌써부터 몸이 부실한지 지탱할 수 있는 시설을 여럿 설치했는데, 사과나무는 대체
로 수명이 짧아서 그런듯 싶다.


▲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청라언덕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이곳을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  동산의료원 외국인묘지 (은혜정원)

청라언덕 서쪽에는 난데없이 조그만 서양식 공동묘지가 들어앉아 있다. 엄연한 대구 도심 한
복판이고 청라언덕의 일원인 알짜배기 땅에 왜 무덤들이 있나 살펴보니 동산의료원과 계명대
에서 의료, 교육, 기독교 선교를 벌인 20세기 초/중기 미국/유럽 선교사와 그 가족들 16명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 중에 생후 1년 남짓 만에 죽은 아기가 5명이나 되는데, 그중 4명은 반년도
못 채웠다. 어쨌든 그들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려 은혜정원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쿨하게 생략한다. (내용이 너무 많음)

청라언덕은 서양식 근대주택과 대구사과 시조의 자손나무, 대나무숲, 3.1운동계단, 거기에 서
양식 공동묘지까지 갖춘 참으로 이색적인 명소이다. 계산동성당만 생각하고 왔는데 서상돈 가
옥에 청라언덕 일대까지 싹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외국인묘지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커텐을 치고 세상
은 달님의 검은 세상이 되었다. 다시 밤을 만난 겨울은 다시 기세가 드세져 코와 귀 끝이 다
시 얼얼해진다. 그날 목적한 것을 훨씬 초과하여 이룬 상태라 즐거운 기분으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담아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대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청라언덕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달구벌대로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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