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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웅전 내부 (목조석가삼존불)
천축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812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ㄷ'자형 팔작지붕집이었으나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대웅전 밑층은 5칸 규모로 종무소와 쉼터로 쓰이고, 그 위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과 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상 뱃속에서 복
장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 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
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삼각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년 발
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
혀져 그런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2. 대웅전의 주인장, 목조석가삼존불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혔다. 그들 뒤로는 석가후불탱이 든든히 걸려있으며, 그 좌우로 지장
보살 등이 별도의 자리를 차지해 앉아있다.
3.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탱화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
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
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
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
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보살 4명을 두었고, 좌우로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
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
슷한 모습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서 환감(幻鑑). 혜조(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시켜 새
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
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탱화의 위치는 절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음)
4. 천축사 북쪽 부분 (무문관 주변)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무지하게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
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
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에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계속 놀
려두기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
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5. 천막 등으로 얼굴을 가린 대웅전
6. 옥천석굴을 품은 커다란 벼랑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굴이 있
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올렸
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
고 약사여래좌상 좌우로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
었다.
7. 속세를 향해 크게 입을 연 옥천석굴 (석굴의 정면 모습)
8. 옥천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약사여래상이 약합을 쥐어들며 자리해 있다.
하얀 피부 일색이라 붉은색 입술이 꽤 도드라지게 보이며, 그 뒤로는 2줄로 이루어진 두광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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