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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학동고분군에서 만난 목련 (이때가 3월 말이었음)

고성 읍내 북부를 이루고 있는 송학리에는 고성 지역의 대표적인 늙은 명소인 송학동고분군이 넓

게 누워있다.

 

고성 지역은 가야연맹의 일원인 소가야의 중심지로 멋대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송학동고

분군은 소가야와 관련된 유적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데, 이곳이 소가야란 증거와 기록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또한 가야가 경남과 경북 남부의 그 좁은 지역에 6가야(또는 13가야)가 비집고 들어앉았

다고 하는데, 그 역시 신빙성이 무지 떨어진다. 그럼에도 가야가 경남과 경북 남부로 비정된 것은

왜정 시절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느라 급급했던 왜열도 원숭이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멋대로 소설을 쓰고 그것을 이 땅에 민중들에게 더럽게 세뇌를 시켰기 때문이다.

가야의 위치에 대해서는 깨어있는 역사 학자들에 의해 중원대륙 양자강 유역과 강남 지역이란 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고성에 어거지로 씌워진 소가야 역시 그곳에 있었다. 가야는 그 넓은 곳에서

서로 연맹을 이루며 강인한 철제무기와 철갑옷으로 무장해 주변에 신라와 왜를 때려잡으며 위엄을

떨쳤으나 연맹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따로국밥처럼 놀다가 결국 신라에게 모두 털리고 만

다.

 

송학동고분군은 대략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은 되고 있다.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그리 해석

하고 있음) 즉 삼국시대 고분들이다. 이곳 고분의 백미로 추앙을 받는 1호분과 2,3호분이 제일 높은

곳에 마치 한 덩어리처럼 몰려 웅장하게 솟아있는데, 고성 지역 사람들은 이들 무덤을 공주묘(또는

7공주묘)라 불렀다. 즉 이곳에 세력을 두었던 이름이 전하지 않는 나라나 지방 세력가의 딸의 무덤

으로 지역 사람들은 알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이들 무덤에서 토기와 마구, 신라의 청동그릇 등이 나왔는데, 이미 왜정 시절에 싹 도굴을 당

한 상태라 나온 유물은 그것이 전부이다. 신라 유물을 통해 이곳이 신라의 영향력을 받던 지방 세력

이거나 신라와 교역을 하던 작은 나라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모두 8기의 무덤이 송학동고분

군을 이루고 있는데, 봉분 밑에 석곽과 석실을 만든 분구묘 방식을 보이고 있다.

 

송학동고분군 식구들은 이곳 8기 외에 고성여중 동쪽 동외로 길가에 송학동 제2의 고분군이 있으며,

송학동고분군 서쪽인 기월리에도 고분들이 있는데, 이들도 송학동고분군 식구로 취급하고 있다.

 

2. 서쪽에서 바라본 송학동고분군

왼쪽에 마치 '山' 모습으로 솟은 무덤이 고성 지역 고분의 백미로 꼽히는 1호분, 2호분, 3호분이다. 이

들 무덤은 이곳 무덤에서 가장 큰 규모라 이곳 세력의 세력가나 군주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보면 서로 합쳐진 모습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3. 송학동고분군 1,2,3호분의 위엄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언덕 위에 무덤을 크게 지어올린 탓에 안그래도 큰 무덤이 더 커보인다.

 

4. 부드럽게 솟은 고분들과 그 사이를 지나는 산책로

 

5. 서남쪽에서 바라본 1.2.3호분

 

6. 고성 읍내를 굽어보고 있는 송학동고분군

고분 너머로 고성 읍내가 펼쳐져 있다. 고성은 본인 집안의 고향이나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부친과 집

안 어른들이 모두 타 지역(서울, 부산, 마산)으로 넘어가면서 고성이 집안의 고향임에도 찾은 횟수는

정말 손에 꼽는다. (고성을 처음 찾은 것이 20대 초반이었음)

 

7. 남쪽에서 바라본 1,2,3호분

서쪽과 동쪽에서 바라본 1,2,3호분은 서로 강인하게 겹쳐 하나의 큰 동산처럼 보였다. 허나 이렇게 보

니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별도의 봉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이나 사물은 한쪽 방향으로

만 보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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