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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 한천자묘

가리산의 첩첩한 북쪽 산주름 속인 북산면 물로리 깊은 골짜기에 한천자묘라 불리는 오래된 무덤
이 있다. 이곳은 춘천 땅이긴 하나 소양호로 춘천 본토와 완전히 끊어진 그야말로 아웃 춘천 땅으
로 춘천에서 이곳을 찾으려면 소양댐에서 배를 이용해 물로리로 넘어가서 차량으로 한참 들어가
거나 홍천 두촌면 땅을 거쳐서 들어가야 된다. 이곳이 춘천시 북산면이긴 하나 소양호로 인해 북
산면 중심지와 연결되는 도로는 없으며, 소양호 뱃편 아니면 인제 신남, 양구군 땅을 거쳐서 빙빙
돌아가야 된다.

또한 춘천에서 물로리를 이어주는 대중교통은 없으며, 소양댐에서 물로리를 이어주는 뱃편도 몇
편 없다. 설사 배를 타고 물로리로 넘어가도 물로리 안쪽과 한천자묘, 은주사까지 들어가는 대중
교통은 없다. 다만 홍천 두촌면에서 춘천시 공영버스가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물로리로 들어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이곳을 찾으려면 모조건 차를 가져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홍천 두촌면에서 물로리로 넘어가는 도로(원동조교로)을 타고 구불구불 고개를 넘어 춘천 북산
면 땅으로 진입, 여기서도 한참을 구불구불 꼬불꼬불 들어가 가리산 그늘인 물로리 남쪽 구석
500m 고지에 외롭게 자리한 은주사까지 들어가야 된다. 여기서 절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들어
가면 한천자묘가 모습을 드러내니 그만큼 이곳은 큰 맘을 먹고 찾아야 되는 완전 육지 속의 외로
운 섬 같은 곳이다.

 

가리산 중턱에 자리한 한천자묘는 천하 명당의 하나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곳으로 한씨 성을
가진 천자(제왕) 관련 전설이 흥미롭게 전하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2가지가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고려 때로 보기도 함), 가리산 북쪽 자락 한터마을에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친과 살고 있었는데, 부친이 별세하자 장례를 치를 돈도
없고 무덤 자리를 마련할 여력도 없어서 일단 남새밭 옆에 가매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승려가 상좌와 함께 찾아와 1박을 청했다. 하여 머슴은 흔쾌히 방을 제공해
주었는데, 승려가 계란을 청하자 '승려가 웬 계란인가?' 갸우뚱거리며 군소리없이 계란을 가마에
삶아서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승려가 상좌와 함께 밖으로 살짝 나가자 머슴은 호기심을 품으며 몰래 그들 뒤
를 따라갔다. 승려는 가리산 중턱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보고는 계란을 땅에 묻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계란을 묻은 자리에서 닭이 나와 우는 것이다. 승려는 이곳이 명당자리라고 상좌
에게 말하면서 여기에 무덤을 쓸 때는 꼭 금관을 써야 되고, 황소 100마리를 잡아야 되며, 하관할
때는 투구철갑한 사람이 곡을 해야된다는 등의 3가지를 꼭 지켜야 된다고 하였다.

그 말을 엿들은 머슴은 바로 이튿날 가매장했던 부친의 시신을 파서 노란 귀리짚 공석으로 꽁꽁
둘러싸고 그 명당자리를 찾았다. 가난한 머슴이라 금관을 마련할 돈이 없으니 그 대용으로 노란
귀리짚을 쓴 것이다.

또한 그는 솥뚜껑을 투구로 삼아 머리에 쓰고 곡을 했으며, 옷을 벗어 몸에 징그럽게 붙은 이 100
마리를 잡았다. 그 이들이 얼마나 크던지 과장해서 표현하면 거의 황소만큼 컸다. 그렇게 3가지
절차를 그럴싸하게 마치고 부친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머슴은 고향을 떠나 중원대륙으로 넘어갔는데, 어느 큰 도시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천자(제왕)를 뽑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가 나는 사람에게 천자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높은 자리에 눈이 뒤집혀 앞다투어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날리
가 없었다. 머슴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한번 쳐보라고 권해 별 기대없이 쳤더
니 글쎄 북소리가 온 천하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이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엎드렸고, 바
로 그때 가리산에 묻었던 부친의 시신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머슴은 그렇게 해서 졸지에 중원대륙 어느 나라의 천자(제왕)가 되니 세상에서는 그를 한천자라고
불렀다. 아마도 머슴이나 그 머슴의 주인 성이 한씨였던 모양이다.

한참의 세월이 흐르자 제왕이 된 머슴은 부친 묘를 관리하고자 조선 조정에 협조를 구했다. 허나
조선 조정에서는 자칫 머슴의 나라가 우리에게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어 '우리 땅에 지리
산은 있으나 가리산은 없다'며 가리산의 존재를 부정했다. 또는 가리산을 가려면 십년강(의암댐이
있는 신연강)을 건너 삼천리(춘천시 삼천동 또는 신북면 산천리) 머덩을 지나 구만리고개를 넘어
한참 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머슴이 보낸 사신은 제대로 쫄아 그냥 철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가리산 자락에 한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도승이 찾아와 하룻밤 숙
박을 청하자 한씨 부부는 쾌히 승낙하며 저녁 식사를 베풀고 아들 방에서 같이 자도록 배려했다.

저녁을 먹은 도승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들에게 계란 3개만 달라고 했다. 아들은 날계란은 없고
간식으로 먹으려고 따로 챙긴 쇠죽에 삶은 계란이 있다며 내주었다. 도승은 계란을 먹지 않고 잠
자리에 누워 자는 척했는데, 아들이 자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들 또한 이를 눈치채고 코를 골
아가며 자는 척을 하자, 도승은 계란 3개를 들고 방을 나와서 가리산을 올랐다. 아들도 도승이 눈
치 채지 못하게 몰래 뒤를 쫓았다.

도승은 가리산 정상에 계란 하나를 묻고, 산 중턱에 또 하나를, 그리고 나머지는 산 밑에 묻고는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속히 내려와 방에서 자는 척했다.

도승은 방에 돌아와서도 잠을 청하지 않고 꼬박 밤을 새었는데, 다음날 동틀 무렵이 되자 산 중턱
에 계란을 묻은 곳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정상에 묻어둔 계란에서도, 그리고 산 밑
에 묻은 계란에서도 닭 우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도승은 '축시(1~3시)에 울어야 제대로 된 묘자리인데, 축시에 울었으니 그 묘자리
가 맞긴 하나 시가 좀 맞지 않구나. 그래서 천자는 못되고 임금 정도는 하겠다' 중얼거렸다.

이튿날 도승이 떠나고 여러 해가 지나자 부친이 별세를 했다. 하여 도승의 말을 상기하며 산 중턱
에 부친을 묻고 큰 뜻을 품으며 중원대륙으로 넘어갔다.

 

마침 중원대륙에서는 천자(제왕)가 부재중이라 천자를 뽑느라 부산했다. 천자를 뽑는 과정은 짚으
로 만든 북을 짚으로 만든 채로 쳐서 쇳소리가 나면 통과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높은 자
리를 탐내며 도전해 보았으나 짚으로 만든 북에 채로 쇳소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허나 그는 자신이 치면 쇳소리가 날 것 같은 기대가 생겨 북을 쳐보았는데, 과연 쇳소리가 나는 것
이 아닌가. 이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엎드리며 그를 천자에 세웠다.

 

중원대륙 제왕으로 크게 출세한 그는 부친 묘가 그리워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부친 묘를 찾아줄
것을 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그들의 갑질을 우려하며 '우리 땅에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무덤은 천하 명당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 시신을 묻으면 후
손이 출세한다고 하여 암매장이 성행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암매장 과정에서 미리 암장된 시신
과 유골이 꽤 나왔다.

지금도 산삼을 캐러 가는 심마니들은 이 무덤에 제를 올리고 벌초를 하며, 큰 시험이나 사업을 준비
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제를 올리고 벌초를 한다. 그래야 산삼도 캐고 고시나 사업도 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무덤은 외딴 산골에 박혀있음에도 늘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은 작은 봉분이 전부로 현재 봉분은 한씨가 이곳에 부친 묘를 닦을 때 조성된 것은 아니다. 이곳
의 명당 기운을 가져가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고 관리한 것이다. 또한 비가 오면 주변 계곡물이
붉게 흐른다고 하는데, 이는 머슴이 이를 100마리 이상 잡아 죽인 피가 아직도 배여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천자 전설에 대해서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주원장 또는 그의 아비나 조
부가 고려에서 넘어온 고려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은 부실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며, 무지몽매한 한족 잡종 중에서 그런 괜찮은 인물이 나오기도 어렵다.

또한 창원 진해의 천자봉 전설에도 이성계와 주원장의 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성계의 조상이
상전, 주원장의 조상이 하인으로 나온다. 여기서 이씨는 천자봉에서 기가 막힌 명당자리를 찾았는
데, 윗쪽에 묻으면 후손이 천자(황제, 제왕)가 되고, 아랫쪽에 묻으면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여
이씨는 하인 주씨를 시켜 부친의 유골을 윗쪽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허나 주씨는 그 명당자리에 침
을 흘리며 자신의 부친 유골도 챙겨서 천자봉을 찾아 윗쪽에 자신의 부친을, 상전인 이씨의 부친
유골은 아랫쪽에 묻었다.

그리고 여러 해 뒤에 이씨와 주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니 상전 이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이성계,
하인 주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주원장이고, 그들은 명당의 기운으로 각각 조선 왕, 명나라 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주원장이 강남 남경에서 원(몽골)에 반하는 명나라를 세우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의
나라를 인정해주고 협조해줄 것을 청했다.

 

3. 가리산 은주사에 있는 소박한 석탑

한천자묘 북쪽 밑에는 은주사란 조그만 현대사찰이 둥지를 틀고 있다. 한천자묘의 명당 기운을
후광으로 삼은 절로 누가 언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절 뜨락에는 큰 돌과 작은 돌로 적당히 쌓
은 5층석탑이 있으며, 대웅전과 요사 등을 지니고 있다.

 

 

4. 은주사 대웅전

은주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소양호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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