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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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