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8월 2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