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룡사 입문 (황장금표, 부도군, 거북바위)
![](https://t1.daumcdn.net/cfile/blog/1160064E4F6F77E736) ▲ 소나무가 무성한 구룡사 매표소 주변 |
구룡사 종점 주변에는 나들이꾼과 산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다. 날씨가 구려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산꾼이 별로 없어 식당들은 대체로 썰렁하다. 치악산의 자랑인 황장목(黃腸木) 소나무가 훤칠한 키로 하늘을 훔치며, 그의 밑도리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반가운 그늘이었겠지만, 겨울 끝 무렵이라 그 그늘이 은근히 춥다. 천하를 뒤덮은 눈구름이 잠시 개이고,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햇살이 속살을 비추 어 이제 날씨가 개이는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잠시 뿐이다.
식당 거리 끝에 이르니 썩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나타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대놓고 노려본 다.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2,500원, 오기 전에는 막연히 2,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가 나처럼 힘든건지 무려 500원이나 높은 가격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문화유산도 별 로 없는 절이 문화재관람료란 명목으로 고액의 돈을 대놓고 뜯으려 하여 절에서 많이 통용되 었던 여러 할인안을 제시했으나 무조건 정가를 내라고 인상을 쓴다. 그냥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대체 장소를 둔 것도 아니어서 울며 겨자먹고 토하 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루었다. (국립공원 고찰 중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입장료를 뜯는 절이 여럿 있음)
이유도 불분명한 소위 구룡사의 입장료삥에 불쾌한 마음을 가득 품으며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 서니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그 안쪽 높은 곳에 황장금표가 나그네 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며 보호 난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95F2F4E4F6F77F52A) ▲ 바위에 새겨진 학곡리 황장금표(黃腸禁標) - 강원도 지방기념물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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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금표는 조선 조정에서 황장목이란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백성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지하는 경고 안내문이다. 황장목은 나무 수심부분의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우수한 소나무로 조 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궁궐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 이 금표는 황장목이 자라는 곳 경계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산 바위로 그 피부에 '황장금표' 4자가 조금은 뚜렷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근래에 금(禁)과 표(標) 사이에 동(東)이란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어 황장금동표(黃腸禁東標) 5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여기서 동쪽이 황장금표 구역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외에도 구룡사 입구 주차장 부근 도로에도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 (땅속에 좀 묻혀 있음)
조선 초에는 전국 60개소의 황장목 봉산(封山)이 있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구룡사가 황장소봉지(黃腸所封地)라 나와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5F984E4F6F77F92B) ▲ 구룡교(龜龍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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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금표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구룡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위에 유연하게 걸린 구룡교를 건너면 소나무 등 온갖 나무로 가득한 구룡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교 난 간 양쪽 끝부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있어 다리의 이름값을 돕는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39EB4F4F6F77FF2A) ▲ 겨울에 잠긴 구룡교 주변 구룡사계곡
![](https://t1.daumcdn.net/cfile/blog/123AE44F4F6F780229) ▲ 북쪽을 바라보는 원통문(圓通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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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교를 건너 얼마 안가면 원통문이란 이름의 일주문(一柱門)이 마중을 한다. 겨울이 채색한 하얀 지붕을 머리에 인 원통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절에 왔으면 절의 정문인 일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속세에서 가져온 거추장스러운 번뇌를 멀리 날려줄 것을 산바람에 부탁하며 문을 들어선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93AB94F4F6F78082B) ▲ 구룡사 승탑(僧塔, 부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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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2분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승탑과 비석이 어우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구 룡사 승려의 넋이 깃든 승탑의 보금자리로 모두 7기가 있는데, 이중 6기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된 것이다. 조그만 몸통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이들은 석종형(石鐘形) 승탑으로 조금씩 모습 을 달리하고 있다. 승탑 사이로 3기의 탑비(塔碑)가 있는데, 세량당 초운대사탑(洗梁堂 楚雲大師塔)과 충허당(沖 虛堂), 뇌파당(雷波堂)의 비석으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
![](http://4.bp.blogspot.com/-Rus4NGhWjFc/T2-6LfhYJrI/AAAAAAAAA2A/1PGHfUoP154/s1600/DSCN7871.jpg) ▲ 무총대선사탑(武總大禪師塔)과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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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 무리를 장식하는 승탑 중 가장 앞에 있는 있는 것이 무총대선사의 탑이다. 이곳에서 가 장 큰 승탑으로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고참 부도 6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 탑과 탑비는 2005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주인인 무총대선사는 구한말(舊韓末)에 활약했 던 승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하늘과 땅, 사람, 귀신이 모두 분노하자 썩어빠진 권력층 타 도와 토왜(討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무총은 승병(僧兵 )을 일으켜 의승장(義僧將)으로 경상도로 내려가 승병 봉기를 시도했고, 경북 예천에서 대구 승려 성기(聖基)가 경상도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짜고 의병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응 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활약은 원주항일기념사업회에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을 고증 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뒤늦게나마 그의 승탑과 비를 만들어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B4B4F4F6F781129) ▲ 승탑 무리와 국사단 사이에 닦여진 쉼터 숲길 한복판에 너른 공간을 닦아 쉼터 겸 식당을 두었다. 앞 공터에는 둥글게 터를 다지고 조그만 돌탑을 테두리 부분에 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5FFE4E4F6F78142A) ▲ 구룡사 국사단(局司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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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를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은 차량, 오른쪽은 뚜벅이 길인데, 어느 길 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느 길로 가든 구룡사는 나오 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높이 터를 다지고 들어선 국사단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은 절터를 지키는 신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서 국사(局司)는 절터를 뜻한다. 옛날부터 있던 것 으로 예전에는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덩치를 불렸다. 경내나 경내 인근에 이렇게 국사단을 둔 절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가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창살 사이로 속인들이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수 밖에는 없는데,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 딱히 다른 것은 보이질 않는 다. |
![](http://4.bp.blogspot.com/-5MihS6FR3n8/T2-6BIKFomI/AAAAAAAAA1w/za9BI17A2h0/s1600/DSCN7866.jpg) ▲ 구룡사를 지키던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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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단을 지나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목과 몸이 끊어진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뚜벅이길보다는 차량길로 가면 찾기가 더 쉬운데 이 바위가 구룡사의 오랜 지킴이인 거북바위이다. 구룡사에는 2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창건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거 북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오랫동안 절의 운을 지키고 선 바위였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으 로 목이 끊어져 두 동강이 난 비운의 존재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상당수를 왕실에 공납(貢納)했다. 그래서 구룡사 주 지승을 산나물 공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는데, 산에서 나온 모든 산나물은 모두 주지승 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통과된 것만 서울로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어 떻게든 심사에서 통과하고자 또는 나물값을 제대로 받고자 주지승에게 별도의 뇌물을 건넸다. 계속되는 뇌물 공세에 입이 귀까지 걸린 주지승은 욕심이 더욱 커져 돈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그로 인해 절의 이미지가 하락하여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이 몰락한 것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 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두 귀가 솔깃해진 주지승은 바로 거북바위를 두 동강냈지만 오히려 신도의 수가 줄었 고,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구룡사에 반감이 있거나 인근 경쟁 사찰의 승려가 거북바위가 절을 지키는 존재임을 눈치채고 절을 망하게 하고자 그런 말을 던 진 듯 싶다. 그걸 주지승이 생각도 없이 받아들여 절 지킴이 바위를 스스로 아작낸 것이다.
이후 어느 날,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넋두리를 하니 도승이 '절이 몰락한 것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그 말에 주지승이 귀를 크게 하고 '그건 무슨 말씀이오?' 그러자 도승이 '이 절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주었소. 허나 그 바위를 동강을 내어 혈맥을 끊었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주지승이 애타게 방안을 묻자. 도승은 '거북바위는 이미 죽었으니 그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九)에서 구(龜)로 바꾸 시오. <그 당시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음>' 그 연유로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갈렸던 것이다. 이후 절은 그런데로 흥성을 누려 치악산 제일의 사찰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거북바위는 마치 거북이가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 다면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보기 바란다. 그럼 정말 거북바위의 이름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목과 몸통 부분이 붙어있었으나, 생각 없는 주지승이 목을 끊어버려 지금의 비통한 모습이 되었다. |
![](http://3.bp.blogspot.com/-MIROsW2FoTQ/T2-59drBUMI/AAAAAAAAA1o/s-4UJLcRa_s/s1600/DSCN7863.jpg) ▲ 하얀 소복을 걸친 구룡사 은행나무 (강원-원주-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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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를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추정 나 이가 약 200년 정도로 높이 19m, 가슴둘레 1.25m에 큰 나무이다. 봄이 곧 도래할 시기라 봄맞 을 준비에 부산해야 되지만 늦겨울이 내린 하얀 눈송이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들러 붙 어있으니 진정한 봄은 아직도 멀었다. (보통 겨울은 3월까지 감)
은행나무를 지나면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담장과 보광루 등의 여러 굵직한 건물로 속살을 가 린 구룡사 경내 밑에 이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