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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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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3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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