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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국동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경허집과 만해 한용운 선생 약연보)

북촌의 한복판인 안국동 윤보선길에 재단법인 선학원의 중심지인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1층은 선학원의 역사과 관련 유물을 머금은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으로, 2층은 선학원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북촌이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임에도 선학원은 이번에 비로소 첫 인연을
지었다. 그동안 선학원은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어서 큰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그곳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늙은 신중탱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 그를 보고자 찾은 것이다. (신중탱은 2층 법당에 있음)

선학원은 고약했던 왜정 시절 친일성향의 사판계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민족불교 수호 및 독립운동
을 위해 부산 범어사의 경성포교당 포교사 남전, 안변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 도봉, 범어사 승려 석
두 등이 투옥된 이판계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했다. (만해 한용운 감옥 출옥 전에 결성
함)

최창훈 등 여러 신도의 지원으로 25,500원을 마련해 현재 선학원 자리인 안국동40번지 190평을 구입

하여 1921년 8월 10일 조선불교선학원 본부를 기공했다. 이에 범어사에서 서울 인사동 포교원을 철거

하여 거기서 나온 자재와 기와 1,000장을 기증했으며, 그해 10월 4일 상량식을 가졌고, 그 다음달인 11

월 30일 완성을 보았다. 선학원 상량문 발기자에는 도봉과 남전, 석두 외에 용성, 성월 등도 들어있다.

 

1922년 3월 30일~4월 1일 선우공제회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용성, 남전, 석호, 성월, 만공, 용금, 학명

79인의 발기로 시들어가는 선종의 부활과 선승들의 상호부조 및 자립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조직했

다. 그 본부는 안국동 선학원에 두고 서무부, 재무부, 수도부의 3부를 중앙에 두었으며, 장성 백양사, 금
강산 마
하연, 예산 정혜사 등 각 절에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중앙의 수도부이사로 만공, 서무부이사로

적음, 재무부이사로 석두를 세웠으며, 성월과 학명, 도봉 등 20여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여 수도와 제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1922년 11월 선학원을 부산 범어사 명의로 신탁 등기했으며, 1923년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설립허가원

을 조선총독부에 냈으나 거절당했다. 1924년 선학원 선우부인회를 조직해 부인회관을 요사채 바깥에

건립해 여성불자들의 정진도량으로 삼았으며, 1926년 5월 재정 빈곤으로 인해 선학원을 범어사 포교당

으로 임시 전환했다.

1926년 5월 용성진종 등 127명의 승려가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대처와 식육 금지를 요구하는 제1차 건

백서를 제출했으며, 그해 6월 만해 한용운과 송세호 등이 6.10만세운동 사전 검속으로 선학원에서 체포

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9월 용성진종 등이 다시 대처와 식육 금지를 요구하는 제2차 건

백서를 총독부에 냈다.

 

1931년 초부적음이 선학원을 인수하여 재건했으며, 선풍 진작과 납자들의 결속을 위하여 전선수좌대회

를 개최했다. 그리고 '선원'을 창간했으며, 1932년 선학원 부인신도들이 안국동 41번지 대지와 건물을

매입했다.

1933년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 발포기념식을 가졌으며,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재단법인 설립인가
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해 1934년 12월 5일 설립허가를 받았다. 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만공월면, 부이사
은 한암, 상무이사는 적음, 이사는 남전, 성월, 감사는 서호, 탄옹, 선학원 원장은 성월, 고문은 경운이
았다.

이 단체는 조선불교 선리의 수행과 연구에 의해 승려와 일반 신도에게 정신적 수양을 베풀고자 각종 시

설을 하려는 것이 법인 구성의 목적이며, 재단법인이 설립됨으로써 선학원은 명실공히 중앙선원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선학원은 창건 이후 선학원 자체에 의한 자력구제 방안을 꾸준히 강구하게 되는데, 이

것이 곧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1935년 1월 조선불교선종 종헌이 반포되었으며, 대표 종정은 만공이 맡았다. 이때 조선불교선종 종헌의

선서문에서 한국불교의 선 전통을 왜열도 불교의 침탈로부터 수호할 것을 밝혔다.

1939년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가 열렸으며, 1941년 정승풍 진작을 위한 고승 34명을 초청해 유교법회를

열었다. 이때 만공, 석상, 서응, 묵담, 한영, 동산, 운허, 청담, 석주, 한암 등 청정비구 34인이 참가했으며,

법망경, 유교경, 조계종지에 관한 설법을 하였다. 유교법회 후 비구승으로 결성된 범행단을 조직하고 선

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2년 선학원에서 만해 한용운과 성월일전, 만공월면 등 8명의 납자가 발기하여 경허집을 발간했으며,

1944년 7월 덕성학원(현 덕성여대)에서 선학원의 부인회관을 점유하면서 선학원 경내가 크게 좁아졌다.

해방 이후 1946년 용담, 대의, 경봉, 석주, 이재열, 곽서순, 장상봉, 박봉석 등이 선학원에서 혁명불교도동

맹을 조직했다.

 

1954년 이승만대통령이 제1차 불교정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선학원 소속의 대의, 석주, 정영 등이 불교

정화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은 왜색불교와 식민주의불교를 청산하고자 함으로 선학원에서 앞장섰는데,

선학원 비구 80여 명이 태고사(현재 조계사)로 들어가 절을 점거했다. 이때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무원

과 조계사 현판을 내걸고 종정 동산, 부종정 금오, 도총섭 청담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이승만의 불교정화 담화와 정부의 권고, 그리고 불교 자체적으로 정화불사(왜색불교 청산, 대처승 

폐지 등)를 벌였으나 갈등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1970년 대처승들이 태고종을 만들어 조계종에

서 나가버렸다.

또한 조계종과 선학원간에도 소속 여부 문제 등이 생기면서 1995년 조계종과 별도의 독자 노선을 결의

다. 이에 조계종은 관련된 선학원 승려들을 징계하였고, 이후로도 타협점을 계속 모색했으나 아직 결론은

나오지 못한 상태로 사실상 조계종과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2014년 11월 20일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을 기공하여 2018년 6월 2일 개관했으며, 이곳에 선학

원의 발자취와 유물을 담아 속세에 공개했다.

 

아랫 사진 왼쪽에 있는 경허집은 1943년 3월 31일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발간한 경허의 생애와 사상을

은 책으로 제자는 적음, 서문은 만해 한용운이 썼으며, 오른쪽 원고는 만해 한용운의 약연보로 성북동

우장 매매사건 보도와 관련해 주필에게 보낸 탄원서이다.

 

2. 만해선생 송수첩

1938년 7월 12일 청량리 북쪽에 자리한 천장산 청량사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 회갑연에 참여한 오세창,

홍명희, 친일 화가 김은호 등 18명이 지은 회갑을 축하하는 그림과 시를 모아 만든 서화첩이다. 표제는

김은호가 썼으며, 화첩 첫머리에는 만해 한용운의 회갑을 맞는 소회가 들어있다.

 

3. 1931년 3월 14일 선학원에서 열린 조선불교선종 제1회 전국수좌대회 사진

 

4. 선우공제회 취지서(왼쪽)와 전국수좌대회선서문(오른쪽)

선우공제회 취지서는 1922년 3월 30일~4월 1일에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송만공(만공), 오성월(성
월) 등
청정비구 35명이 모여 선우공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취지서이다. 표면상으로는 선
풍진작과 회
원 상호간의 자립, 자애를 내세웠지만 실제는 왜정 불교정책에 대한 저항과 민족불교 수
호를 천명했다.

 

전국수좌대회 선서문은 전국수좌대회 조선정통수도승일동의 명의로 발표한 조선불교선종 종헌의 선
서문
이다. 1934년 12월 30일 제정되고 1935년 1월 5일 발표된 것으로 왜식 불교의 침탈로부터 우리
불교의 선
전통을 지키고자 함임을 천명하고 있다.

 

5. 옛 선학원의 빛바랜 사진

1931년에 발간된 '선원' 창간호에 실린 선학원의 옛 모습이다. 그 옆으로 선학원 창건 상량문과 선학원
중앙
선원 전경, 중앙선원 현판 사진이 있다.

 

6. 음빙실문집(왼쪽)과 조선불교유신론(1913,5,25일), 불교대전(1914년 4,30일)

 

7. 정선강의 채근담(왼쪽)과 귀원정종(가운데), 만해선생시집

정선겅의 채근담은 명나라 홍응명이 지은 것으로 만해 한용운이 우리 실정에 맞게 저술하여 1917년
부산 범
어사에서 발행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귀원정종은 1913년 6월 중앙포교당에서 백용성이 쓴 것으로 주자학(성리학)과 기독교의 불교 비난에
대한
반론서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만해선생시집은 만해의 한시를 필사한 시집이다.

 

8. 한국 근대불교 연표

1921년부터 선학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9. 3.1운동 민족대표 재판판결문

1920년 왜정의 3.1운동 민족대표 재판 판결문으로 만해 한용운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더불
어 제일 무거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0. 그 유명한 그림,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 독립선언서 선언 장면

 

11. 만해 한용운 공훈록

 

1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고자 추서한 훈장이다.

 

13. 옛 중앙선원 현판

 

14. 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1919년 11월 15일 중원대륙 상해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한글(국한문), 한문, 영문으로 발표된 선
언서이다.
선언서에는 왜정 사찰령의 가혹성과 식민지 통치정책의 잔혹성에 대한 불교계의 저항 사실
과 7,000명 승려
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담고 있다. 대표자 12명은 모두 가명을 사용했는데, 오만광은
범어사 주지인 오성월,
김취산은 통도사 주지인 김구하, 지경산은 김경산으로 추정된다.

 

15. 만해 한용운의 수형자 기록표(왼쪽)와 혁신공보(가운데), 영문독립선언서

만해 한용은 수령자 기록표는 그가 3.1운동 민족대표로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작성된
기록표로 죄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되어 있다.

혁신공보는 3.1운동 직후 김법린, 김상호, 박민호, 김상헌 등 불교계 청년들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제작 배
포했던 지하 비밀신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의 동향, 만주 지역 독립운동 등을 소상히
담고 있으며,
영문 독립선언서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한입국민회에서 배포한 것으로 한용운의 이
름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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