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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모궁터의 중심부 (경모궁 중심 건물의 뒷쪽 건물터)

창경궁은 성종 시절 창덕궁에서 분리되어 생겨난 공간이다. 현재 창경궁은 창경궁로 서쪽에 있는데,

원래는 창경궁로를 넘어 대학로까지 넓게 덩치를 걸치고 있었다. 서울대병원이 자리한 창경궁로와

대학로 사이 언덕에는 창경궁 후원(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을 함춘원이라 불렀다.

 

1484년 성종이 창덕궁 동쪽 공간을 떼어 창경궁을 조성했는데, 그때 풍수지리에 따라 서울대병원이

자리한 동쪽 언덕에 나무와 수풀을 심었다. 그때는 담장까지는 두르지 않은듯 싶으며, 왕족과 창경

궁과 관련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다가 1493년 그 공간에 함춘원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창경궁에 딸린 후원으로 삼았다.

연산군 시절에는 함춘원을 크게 확장하면서 함춘원 밖에 살던 백성들의 집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

으며, 군사를 배치해 일반 백성들의 통행을 금하고 대문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중종 때 연산군 시절

확장된 곳에 살았던 백성들에게 그 땅을 돌려주었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선조의 후궁인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었으며, 인조 시절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에 넘겼다. 태복사는 그 공간에 140년 동안 궁궐과 나라에 필요한 말을 길렀다.

 

1764년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 한복판에 세워 수은묘라 했으며, 정조(사도세자의 아들)는

그 사당을 경모궁으로 격상시켜 크게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1785년 사당을 크게 정비했다.

1899년 경모궁에 있던 사도세자(장조)의 위패가 종묘로 이전되면서 경모궁은 경모전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1900년에 을지로에 있던 영희전을 이곳으로 이전했는데, 영희전은 태조와 세조, 성종, 숙종, 영

조, 순조 등 6성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사당이다.

 

왜정 시절에 이르러 경모궁 자리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경모궁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현재

서울대병원 북쪽 부분에 건물 일부가 살아남았으나 그마저도 6.25시절에 함춘문을 제외하고 모두 파

괴되었다. 하여 지금은 함춘문과 경모궁터 일부만 남아있다.

 

2. 경모궁 중심 건물의 뒷쪽 건물터와 언덕

앞쪽에 경모궁의 중심 건물이 있었고, 그 뒷쪽에 그 건물을 보조하는 건물이 있었다. 현재 경모궁터는

이곳과 뒷쪽 언덕, 함춘문, 연못터 정도만 남아있다.

 

3. 경모궁의 중심 건물터와 함춘문

 

4. 경모궁 중심 건물의 뒷쪽 건물터와 돌담

 

5. 경모궁의 중심 건물터

이곳이 경모궁의 중심 건물로 사도세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경모궁은 창경궁에 딸린 함춘원의

일원으로 예전에는 함춘원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근래 경모궁터로 이름을

갈았다.

 

6. 경모궁터의 뒷쪽 언덕

경모궁터 중심지 뒷쪽에는 나무와 수풀이 있는 언덕이 있다. 이곳은 함춘원과 경모궁에 조성된 언덕

정원의 일부로 예전에는 규모가 컸으나 서울대병원과 서울대연건캠퍼스에 대부분의 자리를 내주면

서 겨우 저 정도만 남아있다.

 

7. 경모궁 뒷쪽 언덕에서 바라본 경모궁터 중심부와 함춘문

 

8. 경모궁터의 현실, 경모궁 뒷쪽 언덕에서 바라본 경모궁터 중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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