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얀 눈에 뒤덮힌 공주목 관아 혜의당공주 도심인 중학동 웅진로 동쪽에 옛 공주 고을의 관아 건물인 혜의당이 있다. 혜의당은 공주목을 다스리던 공주목사(현 공주시장)가 공무를 보던 곳으로 아주 옛날부터 있던 것이 아닌 1896년에 지어졌다.고약했던 왜정 시절, 왜정에 의해 공주 관아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겨우 혜의당만 남았으며, 공주군청 건물로 개조되어 1928년까지 살아갔다. 이후 충남도립병원(현 공주의료원)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병원 의사들의 숙소가 되었고, 그로 인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그러다가 1971년 병원 증축 과정에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1984년 황새바위 밑에 복원 재현했으나 1986년 화재로 무너졌으며, 살아남은 초석을 수습해 1993년 웅진동에 복원했다.이후 2010년 공주..

1.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역사관)논산시에 속해있는 강경읍은 왕년에는 천하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강경포구까지 바닷배가 흔쾌히 들어와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을 했으며, 그로 인해 조선 후기부터 상업도시로 크게 발전했다. 왜정 시절에는 은행과 노동조합, 학교 건물, 성당, 채운산 배수지 등 온갖 근대 건물과 시설이 들어섰는데, 그 시절 건축물들이 읍내에 꽤 남아있다. 강경 읍내 근대문화유산의 일원이자 강경역사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1913년에 지어진 붉은벽돌조 건물이다. 한일은행은 왜국 자본 은행으로 1911년 9월8일에 개점해 1913년 11월 17일 현 위치에 신축 이전했는데, 1931년 1월 21일 호서은행과 합병하여 동일은행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

1. 돈암서원 정회당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정회'는 유생들의 수행 방법의 하나로 고요함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인데,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양성하던 집으로 원래는 이곳이 아닌 대둔산 자락 고운사터에 있었다.1954년 이곳으로 가져와 돈암서원의 몸집을 한층 살찌워주었으며, 건물 가운데 2칸에는 마루방을 두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2. 양성당양성당은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중앙 3칸은 전후에 툇마루를 둔 대청이며, 좌우로 온돌방 1칸을 두었다. 1881년 숲말에서 이곳으로 서원을 옮겼을 때 이곳의 중심 강당인 응도당을 가져오지 못하고 양성당을 가져와 중심 강당으로 사용했다. 3. 돈암서원원정비돈암서원 원..

1. 응도당에 걸린 돈암서원 현판의 위엄응도당은 돈암서원의 상징 같은 존재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강당 역할을 했는데,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사계 김장생이 쓴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해 강경에 있는 죽림서원의 법도를 따라 지었다. 건물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는 풍판을 달았는데, 풍판 밑에는 눈썹지붕을 두었다. 처마의 암막새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란 글이 있어 163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 서원 건축물에서 가장 큰 건물로 두고두고 추앙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서원 건물 중 별도로 국가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다. (돈암서원은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2. 확대해서 바라본 돈암서..

1. 숭례사 내삼문숭례사는 돈암서원 존재의 가장 큰 이유를 주는 곳으로 이곳의 사당이다. 서원이나 향교의 중심 건물 앞에는 내삼문을 두기 마련인데, 보통 내삼문은 가운데 문은 높게, 좌우 문은 키를 낮게 한다. 그리고 이들 문은 기둥 하나를 두고 붙어있다. 그런데 이곳은 문 사이에 벽을 둬서 완전 남남 같은 특이함을 주었다. 돈암서원이 아무리 속세에 열린 공간이라고 해도 숭례사는 제향일 등 극히 일부날에만 문이 열린다. 하여 그 외에는 이렇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된다. 2. 꽃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숭례사(유경사)숭례사는 돈암서원의 중심 건물이자 사당으로 사계 김장생과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봉안되어 있다. 숭례사란 이름은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군자가 열심히 덕을 닦고 학문을 이..

1. 논산 돈암서원을 찾아서 (돈암서원 입구)논산시 연산면 임리 1번 국도 남쪽에 자리한 돈암서원은 충남에 대표급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 있는 명사의 사당 및 유생과 후학들의 교육 공간으로 일종의 지역 고급 사립학교로 보면 될 것이다. (교육은 거의 유학과 성리학만 취급했음) 돈암서원은 1634년에 연산 출신인 사계 김장생을 봉안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지역 유생들이 세운 것으로 1658년에 신독재 김집, 1688년에 동춘당 송준길, 그리고 1695년에 우암 송시열을 차례로 봉안했다.1660년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나라의 공인 서원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슬 시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다. 그때 살아남은 서원은 전국에 47곳인데, 이들이 진정한 조선 서원의 끝판왕 같은 존재들이다. ..

1. 사계고택 남쪽 정원사계고택 동쪽과 남쪽에는 수목과 꽃이 입혀진 정원이 곱게 닦여져 있다. 이들 구역에는 행랑채와 연못, 근래 지어진 정자가 있어 풍경을 한껏 돋구고 있는데, 수목과 꽃이 한참 기지개를 켜는 봄풍경, 그리고 겨울 앞에서 처절하게 아름다움을 불사르는 늦가을 풍경을 진국으로 꼽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늦가을과 겨울의 마지막 경계선에 찾은 터라 조금은 황량한 풍경만 보고 간다. 2. 늦가을이 아직 머물고 있는 사계고택 남쪽 정원 3. 사계고택 남쪽 정원에 있는 육각형 정자근래 지어진 2층 정자로 이곳에 올라서면 사계고택 동쪽과 남쪽 정원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4. 정원에 있는 네모난 연못이곳 연못은 예전부터 있는 것을 손질한 것이다. 주변 수목은 물론 하늘까지 연못 수면..

1. 안채 뒤쪽 부분사계고택은 사계 김장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안채 뒤쪽과 영당 주변에 곱게 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에는 온갖 키 작은 수풀과 꽃들이 무성하게 뿌리를 내렸는데, 이곳의 봄 풍경은 백미로 꼽힌다. 늦가을과 겨울의 마지막 경계선(11월 끝 무렵)에도 이 정도 풍경이니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4~5월과 늦가을 한복판에는 정말예술일 것이다. 2. 안채 뒷쪽 정원과 굴뚝 3. 고택 뒤쪽 구석에 있는 장독대들저 장독대에는 어떤 군침 나는 것들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살짝 저들의 뚜껑을 열어보고 싶다. 4. 고택 정원에 있는 주름진 괴석 5. 사계고택에 나란히 머물고 있는 늦가을과 겨울 6. 사계고택 안채(잠소실)안채는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인 은농재 뒤쪽에 있다. 지금은 김장..

1. 계룡 사계고택 문간채(대문채)호남선 계룡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사계고택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이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의 최고봉을 이룬 유학자로 1602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산에 내려와 바로 이곳에 은농재를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시절 계룡시 지역은 연산 고을 관할이었다.그는 여기서 서적 저술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으며, 그의 8번째 아들인 김규(1606~1677)가 이곳을 물려받아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계룡시와 충남에 대표적인 조선 중기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곳간채, 광채, 문간채, 행랑채 등을 지니고 있는데, 후손들이 이곳을 각별히 애지중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

1. 김대건 신부 생가 (생가 안채)김대건은 이 땅 최초의 천주교 신부로 1821년 8월 21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는 것을 1906년 김대건 순교 60주년을 맞아 당시 합덕성당의 주임신부인 크램프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생가터를 고증했다.1946년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동상과 순교기념비를 세웠으며, 소나무 군락지를 중심으로 조금씩 천주교 성지가 조성되었으니 그것이 현재 솔뫼성지이다. 솔뫼는 이곳 지명으로 소나무가 뫼를 이룰 정도로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8년 문화재위원들의 고증과 기와조각 발굴을 통해 그의 생가터임을 확신하여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 생가 안채를 복원 재현했다. 그리고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

1.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신부 생가)합덕읍내에 있는 합덕터미널에서 동북쪽으로 1.5km 떨어진 송산리에 김대건 신부 생가를 품은 솔뫼성지가 있다. (합덕터미널에서 도보 20분 거리)김대건은 이 땅 최초의 천주교 신부로 1821년 8월 21일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지역 이름인 솔뫼는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김대건(세례명 안드레아)의 증조부인 김진후(세례명 비오),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세례명 안드레아), 부친인 김재준(세례명 이냐시오), 그리고 김대건 등 4대가 여기서 살았으며, 그들 4대는 모두 열성 천주교 신자로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처단되었다.(증조부인 김진후는 1814년 서산 해미에서,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은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아버지 김재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1. 예산읍 예산성당예산군청 서남쪽 언덕에는 예산성당이란 늙은 성당이 둥지를 틀고 있다. 고색의 기운이 가득한 예산성당은 이 땅에 흔한 20세기 전반기 근대 건축물로 1933년에 예산성당 2대 주임신부인 황정수(요셉)가 성당을 짓기 시작해 1934년 완성을 보았다. 하여 충남 지역에서 오래된 측에 속하는 성당에 꼽힌다.예산성당은 1927년 합덕성당에서 분리된 것으로 처음에는 초대 본당 신부인 구천우 신부가 현재 교육관 자리에 윤창규 회장이 기증한 6칸짜리 한옥에 머물면서 미사를 담당했다. 이 성당은 현관 위와 높은 종탑의 몸체에는 아치 단장을 하고, 검은 벽돌로 창틀 윤곽을 표현했다. 건물 전체의 조화와 시각미를 충분히 고려한 건축물로 고약한 왜정 시절에 지어진 것임에도 왜열도 건축 양식을 반영하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