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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원효로 성심여중고 교정에는 구한말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인 예수성심성당과 용산신학교 건물이 있다. 용산신학교 부속
로 지어진 예수성심성당은 고딕풍으로 지어진 264㎡ 규모의 건물로 언덕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자연히 3층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하여 정면
(남쪽)에서
보면 3층, 언덕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인다.
1899년에 착공하여 1902년 완성을 보았는데,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가 설계했다고 하나 그는 1896년에 사망했으므로 사
망 전
에 설계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설계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회색 벽돌과 붉은 벽돌을 섞어서 쌓은 외벽에

축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2개의 부축기둥을 위로 높게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했다. 창문은 뾰족아치창의 고딕양식이

며, 성당의 규모는 작지만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고딕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절충식으로 내부 구조는 현관부와 신도석부, 십자 돌출부, 앱스부로 이루어진 간결한 평면

식이다. 앱스부 뒷부분의 아치창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악센트처럼 간결한 공간을 꾸미는 장

효과와 함께 커다란 상징으로 돋보이기도 한다. 건물 안쪽에는 이 땅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영문 이니셜인 ‘A. K.’(An

dre Kim)와 생몰연대(1821~1846)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유해는 1942년까지 이 성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성당 출입구는 중앙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비대칭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뾰족 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 위의 작
은 뾰족탑은 전체적으로 약식화된 고딕풍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학교 교내에 자리해 있어 평일은 관람이 어려우며, 예배가 열리는 주말이나 휴일에 살짝 들어가면 된다. (단 최근 중공 잡
놈들
이 퍼트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접근/관림이 통제될 수 있음)

 

2. 정면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



3. 언덕(서쪽)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

 

 

4. 예수성심성당의 북쪽 끝 모습

 

 

5. 동쪽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

 

 

6. 용산신학교

예수성심성당 동쪽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용산신학교가 있다. 이 건물은 건축면적. 312.82㎡, 연면적 907.86㎡에 지상

2층, 반지하 1층 건물로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Eugene Jean George Coste)가 설계 감독하여 1892년에 세워졌다.
1885년 원주 부엉골에서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가톨릭대학교 신학부의 전신)가 1887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

이곳에는 함벽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하여 그 정자를 밀어버리고 신학교를 세웠으며, 현재 예수성심성당 자리에 있던 삼호

정 주변에는 성직자 묘역을 만들 계획으로 그곳까지 매입했다.
신학생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1892년에 세운 이 건물로는 한계가 있자 교사 건물을 추가로 만들었으며, 신학교 건물은 주교
관으로 잠시 쓰이기도 했으나 1942년 왜정에 고약한 태클을 받아 폐쇄되었다. 1944년 성모병원 분원을 이곳에 개설했는데
그 덕분에 왜정이 저지른 건물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유라 되었고,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예수성심교회와 용산신학교 일대를 인수해
수녀원과 학교법인 사무소로 사용햇다. 본래 건물 일부에 증축이 이루어졌으나 근래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지금은 법

인 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용산신학교는 경사 대지를 이용해 반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진 조오지안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다. 장방형 평면에 편
복도를 전면에 두고 안쪽에 교실을 배치하였으며 1층 평면 중앙에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외부 계단을 두고, 좌우 끝단에는 2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정면은 중앙 현관부를 중심으로 좌우 3칸씩 벽기둥(pilaster)을 쌓아 모두 7칸으로 구획하고,

각 칸에는 결원아치(segmental arch)의 창을 두었다. 바닥은 목재마루이며, 동판가락잇기의 경사지붕에는 환기용 도머창

을 두었다.
건물 벽체는 적벽돌을 쌓았으나 기둥과 처마 및 수평돌림띠, 창둘레 등 선적 요소에는 회색벽돌을 사용하여 의장적 효과를
구사했다.

이 건물은 이 땅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자 서양식 벽돌조 건물로 그 가치가 높아 예수성심성당과 한 덩어리로 사적 2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에 이들을 구별하여 사적으로 재지정했다. (용산신학교는 사적 520호, 예수성심성당
은 사적 521호)

 

7. 정면에서 바라본 용산신학교

용산신학교(청심기념관) 내부는 관람이 거의 어렵다. 게다가 사무 공간이라 주말, 휴일에는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8. 용산신학교의 뒷모습

 

9. 산천동에서 만난 독서당터 표석

독서당은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했던 곳으로 옥수동 등 한강변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산천동 독서당은 남호

당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그 흔적도 없으며, 그가 가고 없는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을 세워 그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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