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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 폭)의 장대한 규모로 1988년 가을, 천
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기리고 지구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웠다.
그래서 문 이름도 거창하게 세계평화의문이다.
문의 생김새를 보면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날개 밑부분에 그려진 수려한 색채
의 그림은 서양화가 백금남이 그린 것으로 고구려(高句麗) 사신도(四神圖)를 바탕으로 우측에
는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좌측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그렸다. 그리고 문 앞쪽
좌/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이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해 비상(飛上)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고 하며,
올림픽공원의 얼굴이자 마스코트로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버린 1988년 그 시
절,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 잠실에서 봤던 성화봉송까지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  세계평화의문 성화(聖火)

세계평화의문 안쪽에는 서울올림픽 당시 전국을 누볐던 성화의 보금자리가 있다. 나 같은 서
민들은 미친 난방비에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성화는 당시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하여
매일 비싼 기름을 먹는다. (성화 밑에 기름관이 있음) 늘 넉넉히 제공되는 기름을 먹고 살이
오른 불꽃을 휘날리며 거의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데, 1시간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름 낭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 공원의 빗장을 걸어잠구는 새벽에 한해 불을 꺼
두어 기름도 아끼고 성화도 좀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저것도 다 눈먼 세금임..)


▲  국기광장과 올림픽운동조형물 '서울의 만남'

세계평화의문을 들어서면 평화의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광장 좌우에는 공원안내센터와 편의점
, 식당, 커피집 등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직진하면 몽촌해자로 막다른 곳에 국기광장과 서울
의만남 조형물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국기광장은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161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광장 중심부에 '서
울의 만남' 조형물이 자리해 있다. 이 석물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 1주년을 맞이하여 올림픽운동의 확산을 염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조
형물 바닥에는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돌을 깔았는데, 돌 수집을 위해 돌 축제를 기획
했으며, 이 축제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올림픽공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의 만남' 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세계 각지의 돌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예
전에는 몽촌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곳이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 확정되자 막연히 백제시대 토성으로 전
해 오던 몽촌토성을 품은 일종의 사적공원으로 꾸미기로 하고 1983년부터 6년에 걸쳐 토성을
발굴조사를 하였다. 1984년 본격적으로 이 일대를 갈아엎으면서 몽촌 사람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1985년 5월 30일까지 이주를 마쳤으며, 1986년 4월 공원이 완성되었
다.
이후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대충 완료되자 토성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두루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공원 면적은 무려 1,674,380.17㎡(506,500평)로 서울에서 제법 큰 공원이다. 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은 몽촌토성과 몽촌해자로 이루어진 자연/역사 공간으로 22만
평에 이르며, 동쪽은 온갖 경기장으로 이루어진 체육 공간으로 23만 평에 달한다. 그 외 5만
평은 체육대 등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공원에는 온갖 운동 경기와 공연이 열리는 경기장과 공연장을 비롯해 한성백제박물관과 소마
미술관, 몽촌역사관 등의 실내 전시 공간과 지구촌공원 등의 소공원, 공원 곳곳에 놓여진 온
갖 조각품들, 몽촌토성과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의 문화유적, 몽촌해자와 성내천, 88호수 등의
호수와 생태계 공간, 평화의광장과 세계평화의문 등의 광장과 올림픽 상징물, 서울올림픽파크
텔 등의 숙박시설 등이 닦여져 역사와 문화, 미술, 체육, 음악, 자연, 여가생활을 두루 누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으나 무료로 해방되었으며, 관람시간도 크게 완화되어 밤
시간(22시~5시)에만 빗장을 걸어둔다.

올림픽공원은 크게 줄여서 '올팍'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의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은 세계
평화의문과 올림픽공원역으로 이어지는 동1/2문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북1/2문, 남1/2/3/4문
, 서1/2문이 있다.

* 올림픽공원 9경 명소 (한국사진작가 협회에서 추천한 사진 촬영 명소임)
- 세계평화의문, 엄지손가락 조각품, 몽촌해자 음악분수, 대화 조각품, 몽촌토성 산책로, 나
  홀로나무, 88호수와 팔각정, 들꽃마루, 장미광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등 (올림픽로 424 ☎ 02-410-1114)
* 올림픽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몽촌해자(夢村垓子, 몽촌호)와 수변무대

▲  남쪽 수변무대 부근에서 바라본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국기광장 뒷쪽에는 몽촌해자라 불리는 호수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여기서 해자란 방어력을 높
이고자 성 바깥에 닦은 물길로 1983년 이후, 몽촌토성 외곽을 싹 뒤집고 발굴조사를 했을 때
성벽 밑에서 도랑 흔적이 나왔다. 하여 발견된 흔적을 바탕으로 넓게 호수를 조성하여 몽촌해
자라 했다. 물은 성내천(城內川)에서 가져왔으며, 호수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무려 76,000톤이다.

남한산(南漢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성내천은 송파구의 소소한 젖줄로 송파구의
동부를 흘러간다. 올림픽공원역(5/9호선)을 지나서 올림픽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옆까지 다
가선 성내천은 까치다리 너머로 88호수를 빚고, 올림픽공원 북쪽 경계를 더듬으며 공원과 속
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다가 성내교 직전에서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한강이고, 왼
쪽(서남쪽) 지류가 바로 몽촌해자로 이 해자는 소마미술관 북쪽 물레방아에서 뚝 끊긴다.

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솟
아 올라 하늘을 긴장시키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
를 연출한다. 이 음악분수는 올림픽공원9경의 3경으로 꼽히며, 해자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
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아놓아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또한 자연형 호안(湖岸)과 6개
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음악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매시 10분에 가동)
* 몽촌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연속 가동)


▲  몽촌해자 남쪽 끝에서 바라본 해자와 토성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호수 너머로 수목이 울창한 언덕이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이다. 이 해자는 토성을 지키고자 그 앞에
조성된 것으로 토성이 절찬리에 쓰이던 백제 때와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  누가 이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방화를 저지른 것일까?
늦가을에 잠긴 놀이터 나무들 (평화의광장 동쪽)

▲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보이는 인간의 작품들
아무리 거장이 만든 작품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지른 늦가을의
향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두 얼굴의 조각품 (올림픽공원9경의 4경인 '대화')

서울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 조각공원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88호수 주변과 평화의광장,
소마미술관, 지구촌공원, 조각공원, 만남의광장에 우리나라 조각품 34점과 세계 조각품 177점
이 공원을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린 현장이자 지역 명소
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역사, 문화, 체육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명소로 계속해서 가꾸어
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88올림픽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이곳이 국제적인 명소가 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관리
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빛은 그때보다 더욱 밝아졌다.

소마미술관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구촌공원 건너편에 '대화'란 이름을 지닌 두 얼굴
의 조각품이 마중을 한다. 윗부분이 아작난 얼굴 2개가 서로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인데, 북아
프리카 알제리의 조각가 아마라 모한이 만든 것으로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 동안 이 땅
에 머물며 화강암을 깎고 다듬었다.
아마라 모한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서로 반목하며 대화를 끊자 발작한 신이 그들의 눈을 없
애 버려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설화를 소재로 하
여 만들었다. 즉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란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통해 의사소통
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 작품을 떠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허나 인간은 신과 말 못하는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
는 존재라 그 단순한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당장 나도 그렇고, 이 땅의 백성들, 위정자
들이 그렇지 않은가?

▲  온갖 조각품이 누워있는 조각공원과 지구촌공원


 

♠  보호수 느티나무, 88마당, 몽촌토성 동벽 주변

▲  보호수 느티나무와 돌기둥 (오른쪽)

'대화' 작품을 지나면 불끈 솟은 하얀 피부의 돌기둥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란히 마중을 나
온다. 인간의 일개 작품이 감히 대자연이 빚은 작품과 나란히 서 있는 셈인데, 변화를 거부하
며 늘 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는 밋밋한 돌기둥보다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자연산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돌기둥은 나무를 수식하는 들러리 정도 밖에
는 안보인다.

올림픽공원에는 늙은 보호수가 3그루 있는데, 이중 2그루가 이곳에 있다. 겉으로 보면 가지가
크게 2개로 된 나무처럼 보이지만 잘살펴보면 서로 별개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런 착시가 생긴 것이다.
이들 가운데 곧게 솟은 좌측 나무는 높이 7.5m, 둘레 300cm이며, 그 옆에 45도로 기운 우측
나무는 높이 12.5m, 둘레 380cm이다. 그들의 나이는 470여 년(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약 430년)으로 이제는 먼지처럼 사라진 몽촌마을 사람들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이나 지금은 공원 탐방객들에게 매일 그늘을 드리운다.


▲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너무 붙어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서울시 보호수 24-5호, 오른쪽이 서울시 보호수 24-6호)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자란 몽촌유허비
몽촌유허비는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난 몽촌마을 사람들(몽촌 향우회)이 그리움과
푼돈을 모아 2001년 12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귀부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까지 싹 갖추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88마당, 올림픽체조경기장 방면)

▲  너른 잔디밭인 88마당

88마당은 토성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올림픽공원 서부와 경기장,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경계 지점이다.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쪽에는 몽촌토성이 흐르고 있으며, 동
에는 한얼광장과 여러 경기장이 있다. 광장 구석에는 여러 조각품이 공원의 향수를 돋구며,
이곳은 주로 대형 음악회와 사생대회, 소풍 장소로 널리 쓰인다.

▲  88마당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각품들
 

▲  한얼광장과 올림픽공원역을
이어주는 한얼교


▲  한얼광장에 놓인 붉은 피부의 조각품
하늘에 뜬 초승달을 잡아와 붉게 박제를 한 것은 아닐까? 한얼광장은 88마당
동쪽으로 체조경기장과 핸드볼경기장 사이의 너른 광장을 일컫는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동벽 (동문터)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사적 297호)이
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다.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
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한
성백제(漢城百濟)시대의 유적이다. 여기서 한성백제란 한강 유역인 현재 서울 강동구와 송파
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 시절을 일
컫는 말이다.
둘레 2.3km(2,285m)에 이르는 몽촌토성은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거의 방
치되고 있었다.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 원래부터의 명칭은 아니
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흔쾌히 선정되면서 1980
년대 초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그래서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
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복원되
었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다진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
쪽 구릉에서는 외성(外城)의 흔적이 나왔다.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남/북문터가
확인되었고,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토성(土城)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 목책을 세운
흔적과 서벽과 북벽 앞에 둘러진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쪽 성벽은 성내천을
자연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한성백제 때 흔적이다. 그리고 한성백제
시절 유물이 앞을 다투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서진(西晋, 3세기 후반)의 동전무늬
도기조각(陶器片)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발견되어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
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큰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
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출토되었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이 나와 당시 백제인들의 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와 안그래도 많이 빈약한 한성백제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백제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아직 의견이 분분하나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중심으로 본다면 몽촌은 위례성을 보조하던 곳이거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으로 삼았다
는 한산(漢山)으로 여겨진다.<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보기도 함> 풍납과 몽촌은 거
의 이웃처럼 자리해 있으니 이름은 조금 다르나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합쳐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에는 제왕의 별궁과 관청, 군사시설, 왕족, 귀족들의 집이 있
던 것으로 여겨지며, 위례성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풍납은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집, 백성들
의 집, 시장이 있었다.

백제는 서울 송파/강동 지역(또는 하남시)에 위례성(한성)을 세워 5세기 말까지 아시아 해양
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때 확립된 식민사관 쓰레기들과 있는 역사도 왜곡
하고 축소시키는 영 좋지 못한 쓰레기들의 영향으로 백제하면 그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를 차지한 조그만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허나 백제는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
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는 일찍이 바다를 활용한 나라이다. 수군을 강화시키고 대외무역을 늘려 중원대륙의 요서
, 산동반도, 강남 지역 등 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점령했고, <저장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탐라 남쪽의 큰 섬(대만?)을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
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발언 등등> 4세기 이후
가야(伽倻)가 점유하고 있던 왜열도로 진출해 그곳을 백제의 별채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대륙
을 넘어 동남아까지 힘을 뻗치며 담로(擔魯)를 설치했다는 학설도 크게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였다. 산동을 둘러싼 백제와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에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잘나갔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 천도함> 그때 고구려는 위례성 일대를 싹 불지르고 파괴하면서 모두 잿더미
가 되었고, 위례성 3글자는 천하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고구려의 만행 때문에 위례성
위치가 오랫동안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산으로 여겨지는 몽촌토성도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사
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예전 송파/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벽에서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왕성(王城) 방어용의 역
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聖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 겸 꿀단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곳을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몽촌토성은 그 주인공이 아닌 조
연이 되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주연처럼 보이긴 함)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
었기 때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운동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 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베일에 가려진 몽촌토성의 속살을 들추고자 2014년부터 다시 발굴 조사
를 벌이고 있다. 현재는 예전 내성농장 일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마무리 되면 보다 많
은 흔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주택가로 뒤덮힌 풍납토성(風納土城) 일대도 싹 뒤집
어 땅속에 묻혀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성백제의 나머지 이야기도 싹 맞추었으면 좋겠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山城)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
금가며 경사 또한 각박하기 때문이다. 높이가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
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당하고 경사도 아찔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쳐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겨울 제국이 눈폭탄을
크게 투하해 은빛세계를 빚으면 포대자루 하나 들고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곳이다. (물론 그
러면 절대로 안됨)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88마당

▲  몽촌토성 움집터 유적 (백제집자리전시관)

몽촌토성 동벽에는 백제시대 움집터를 담은 백제집자리전시관이 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을 포함해 12곳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여기서 발견된 움집터는 총
4곳으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푸른 피부의 보호각을 갑옷처럼 둘러 그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곳이 전시관이다보니 인근 소마미술관이나 한성백제박물관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빗장을 걸
고 쉰다. (마침 그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담지 못했음)

전시관에 담긴 움집터는 6각형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긴 벽의 높이가 6m,
짧은 벽은 4m 정도 된다. 그리고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나온 온돌 모양의 화덕이 설
치되어 있었고, 벽체 안쪽 바닥에는 20~30cm 정도의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
가,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다.


▲  자연과 역사 속을 거닐다 ~ 몽촌토성 동벽 산책로

▲  나무의 착각 ~ 몽촌토성 동벽
대자연이 여기저기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몽촌토성 동벽~북벽, 옛 내성농장 주변

▲  늦가을이 마지막 춤을 추는 목책 앞 산책로 (몽촌역사관 방향)

▲  자연산 숲터널을 이룬 목책 앞 산책로 (88마당 방향)
무성한 숲터널 사이로 겨울이 슬그머니 들어와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조만간
이 아름다운 숲길도 겨울에게 몽땅 털려 뼈와 낙엽만 남게 될 것이다.

▲  몽촌토성 목책(木柵)

몽촌토성 동벽 앞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이 있다. 목책이란 방어시설의 하나로 몽촌토
성 일대를 조사했을 때, 목책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
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
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하진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지며, 이곳 목책은 발굴조사된 목책 기둥 자
리를 따라 그 위에 조촐하게 상상을 얹혀 재현한 것이다.

아무래도 토성이다보니 석성보다는 방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책과 해자를 두
룬 것인데, 목책은 동벽과 남벽 일대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가지런히 재현된 몽촌토성 목책

▲  늦가을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빈 자리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  올림픽공원 산책로(몽촌토성 산책로 제외) 가운데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목책에서 옛 내성농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의 손길이
가장 아름답게 거쳐간 곳으로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해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  '무제'라는 이름의 이글루 모양의 조각품 (1988년 박충흠 작)

▲  몽촌토성 북벽 (북문터)

'무제'라는 이름의 작품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토성 북벽과 내
성농장이, 오른쪽은 몽촌역사관과 성내천, 성내천을 앞에 둔 토성의 동쪽 부분이다. 이제 공
원의 40% 정도 돌아본 셈이다.


▲  잠시 과거가 되버린 내성농장 (북문터 안쪽)

토성과 언덕으로 울퉁불퉁한 몽촌토성 속살에는 넓은 편은 아니나 조촐하게 평원이 펼쳐져 있
다. 그 평원은 몽촌토성 북벽 안쪽에 자리해 있는데, 평원 가운데 6,600㎡에 농경지를 닦고
토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 내성농장이라 했다.

내성농장은 밭벼와 목화, 고구마는 물론 유채꽃과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들꽃이 넉넉히 둥
지를 틀던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숨겨진 비밀을 캐고자 3년 넘게 발굴
조사에 들어가 농장은 사라지고 발굴 지역 주변에 펜스가 빙 둘러져 있다. 여기서 많은 백제
유물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이 마무리가 되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관련 유적지
보호구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솟은 나홀로나무 (사진 가운데)

내성농장 북쪽을 살펴보면 평원 한복판에 다른 나무와 멀리 거리를 두며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그를 '나홀로나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외톨이나무',
'왕따나무','연예인나무'라고도 하는데, 올림픽공원9경의 제6경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나무가 홀로 된 이유는 정말 별거 없다. 1985년 몽촌토성 내부를 싹 갈아엎는 과정에서 키
가 크고 모양이 괜찮은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잘생기고 마음
에 드는 나무만 살려두고 모두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나홀로나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홀로 되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괜히 허언이 아닌 듯 이
곳의 사진 모델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  토성 북벽에서 바라본 내성농장 들판 (예전 모습)

▲  토성 북벽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2호

내성농장에서 토성 북벽을 따라가면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올림픽공원에 깃든 보호수 3그루의 하나로 나이가 무려 580년(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530년)에 이르며, 높이 17.5m, 둘레 6m에 이른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
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이렇게 어엿한 나무로 성장을 했는데, 이곳에 서면 내성농장과 성내
천, 풍납동(風納洞)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북벽 (서쪽 방향)

▲  몽촌토성 북벽 (동쪽 방향)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토성 북벽과 성내동/둔촌동 지역, 내성농장 등)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토성 북쪽 산책로와 성내천
성내천은 양재천(良才川)과 더불어 생태 하천으로 크게 거듭난 현장이다.

▲  늦가을 오색 향연에 잠긴 몽촌토성 북부(올림픽파크텔 동쪽)와
그런 향연을 지켜보는 속세(시내)


 

♠  올림픽공원 마무리

▲  억새가 춤을 추는 몽촌토성 서벽
서벽은 북벽에 비해 높이가 조금 낮고 경사도 포근한 뒷동산처럼 느슨하다.
게다가 다른 구간과 달리 소나무가 무성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그늘도 깊다.

▲  소나무로 그윽한 몽촌토성 서벽

몽촌토성 산책로는 경사도 거의 느슨하여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길이다. 제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길에는 퐁당퐁당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걸
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걷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햇님 주위를 도
는 지구처럼 토성을 몇바퀴씩 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9호

몽촌토성 서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하얀 철책이 둘
러진 공간이 보일 것이다.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으니 속도를 조금 줄
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 안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옛 명소인 충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
히 들어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다보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다.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음;) 올림픽공원에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
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소박한 모습의 충헌공 김구 묘

묘역의 주인공은 김구이다. 여기서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
라 조선 중기에 살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비로소 관
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
무소(時務疏)를 올리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대
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을 세웠
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
게 건의했다. 하여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
廟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
릉(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
書)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
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공원 산책로에서 묘역이 뻔히 보였지만 그 앞에
야생화단지를 꾸미면서 그 뒤에 숨어버렸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족의 묘
역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고 전하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1743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270년이 넘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네
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긴 지
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현란하다.


▲  코스모스가 넝실거리는 야생화단지

김구 묘역 남쪽에는 야생화단지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라 분홍색과 하얀색 코스모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와 꽃을 짓밟으며 오로지 사진 찍기에 부산하
다. 꽃을 보호하려고 금줄까지 쳐놓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그 금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  미로찾기
미로가 속세보다는 덜 복잡하여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미로가 아니던가..?

▲  몽촌토성 남벽 (남문터 주변)

충헌공 김구 묘역과 야생화단지에서 잠시 놓고 있었던 몽촌토성 산책로를 다시 더듬는다. 남
벽은 높이도 낮고 경사도 완만한 편으로 숲도 제법 우거져 있어 일부 구간은 숲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목책 앞)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겨울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
그렇게 다들 늦가을을 붙잡건만 힘이 다한 가을은 결국 짐을 싸고
떠나려고 한다. 나무들은 늦가을의 떠남을 슬퍼하며 낙엽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  성내천 산책로 (피크닉장 주변)

▲  생태계 복원의 정석, 성내천 (둔촌동 방향)

몽촌토성을 반 바퀴 정도 복습을 더 하고 아쉽지만 평지길로 갈아탔다. 목책(木柵)과 피크닉
장,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지나 속세와 공원의 경계를 가르는 성내천을 건넌다. 성내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우리가 건넌 것은 무지개다리이다.
성내천은 한때 개발의 칼질로 망가진 저주 받은 하천이었으나 오랜 노력에 결과로 자연이 숨
쉬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시 살아난 성내천을 보니
회색 도시에서 오염된 눈과 마음이 자연을 통해 확 정화됨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자연의 일
부로 살아야 별탈이 없다. 부디 복원이 무색하지 않게끔 앞으로도 철저히 관리를 해주어 우포
늪 수준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다리를 거쳐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18시. 평온했던 공원에 잠시 익숙해졌다가 다시 속세로 나
오니 정말 딴 세계에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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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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