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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달마산 미황사, 도솔암


' 해남 달마산 미황사, 도솔암 '

미황사와 달마산

▲  미황사와 달마산

달마산 도솔암 달마산 도솔봉 능선

▲  달마산 도솔암

▲  달마산 도솔봉 능선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후배들과 1박 2일 일정으로 전남(全南) 서
남해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함평(咸平), 무안(務安), 목포(木浦)의 여러 명소를 둘
러보고 지역 별미(別味)도 배터지게 섭취한 다음 목포의 번화가인 하당에서 하룻밤을 머
물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해남(海南)으로 넘어가 오랜만에 대흥사(大興寺)를 둘러보았는데,
서울 복귀까지는 아직 시간이 일러 후속 메뉴를 두고 고심을 하다가 미황사에 격하게 신
호가 와서 그곳으로 흔쾌히 길을 잡았다.

미황사는 해남의 명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달마산(達磨山, 489m) 서쪽 자락 200m 고
지에 자리한 고찰로 그곳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은 편하다. 달마산은 불상
(금동불)과 바위, 햇님의 석양빛이 조화를 이루는 산이라 하여 삼황(三黃)이라 불리기도
한다. (즉 3가지의 황금색을 지닌 산)


♠  인도 남방불교의 전래설화가 전해오는 고즈넉한 산사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  미황사 사천왕문(四天王門)

황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이 우리가 반가운지 주차장까지 흔쾌히 마중을 나왔다. 활짝
열린 그를 지나 숲길을 거닐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문이 나타나 속세의 번뇌와 영 좋지 않
은 여러 기운들을 최종 점검한다.

사천왕문의 주인인 사천왕(四天王)의 검문을 통과하면 전통차와 불교용품을 파는 선다원(禪茶
院)이 나오고 그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육중하게 생긴 2층짜리 자하루(紫霞樓)가 경내를 가리
며 시야를 막는다. 이곳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길래 이렇게까지 경내를 가리고 있을까? 기
대감과 호기심을 품으며 그의 밑도리를 지나면 달마산을 뒷배경으로 삼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미황사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  미황사에서 달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전통차와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선다원


미황사는 전남 서남해에서 대흥사 다음으로 명성이 자자한 절이다. <이곳은 대흥사의 말사(末
寺)임>
달마산 남쪽 능선에 있는 도솔암을 제외하고 본토(부속도서와 잃어버린 땅 제외)의 최남단 고
찰(古刹)로 749년에 의조(義照)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749년 8월, 돌배 1척이 인근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를 들은 의조는 뭔가 상서로운 느낌이 들어 제자 100여 명과 목욕재계하고 그곳으로 나갔더니
때를 맞추어 배가 육지에 상륙했다. 그래서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法華經)','비로자나불','문수보살과 보현보살','40
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 탱화' 등이 푸짐하게 들어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들을 육지로 싹 꺼내 부근에 임시 보관했는데 그날 꿈에 금인이 나타
나 왈
'나는 인도의 국왕이오. 금강산(金剛山)이 1만 불을 모시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배에 싣고 갔
더니만 벌써 많은 절들이 들어차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소. 그래서 되돌아가다가 이곳 풍경이
무지하게 좋아 길을 멈추었소. 내가 가져온 것을 모두 그대에게 주니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
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꼭 절을 지어 모시시오. 그러면 국운과 불교가 흥창하리다~~!'

이에 의조는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이동했는데,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통
교사(通敎寺)를 세우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무지하게 아름다워서 '미(美)', 금인의 빛깔이 황금색(누런색)이라 하
여 '황(黃)'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 창건설화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53불 설화와 조금 비슷하며 인도에서 보낸 불상으
로 절을 세웠음을 강조하고 있어 인도의 남방불교(南方佛敎)가 들어와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남방불교는 이미 가야(伽倻) 초기에 들어와 가야 지역에 정착을 한 이력이 있다. 흔히
가야를 경남 지역으로 아주 좁게 보고 있으나 가야의 본거지는 중원대륙 양자강(揚子江) 주변
에 너른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야와 오랜 라이벌이었던 신라 또
한 산동반도(山東半島)부터 강남까지 중원대륙에 많은 땅을 거느리며, 인도, 동남아와 활발히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도의 남방불교를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  옆에서 바라본 자하루

▲  자하루 옆에 자리한 달마대사상

고려 후기에는 남송(南宋)의 학자와 귀족들이 미황사를 종종 찾았다고 전한다. 1264년 그들이
배를 타고 달마산 동쪽에 상륙해 달마산에 예를 표하며 미황사를 참배했다. 남송 애들은 1294
년까지 순례를 왔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절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해남 달마산을 달마대사(達磨大師)가 해동(海東)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라 여겼다고
하며, 미황사도 스스로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항상 있는 곳'이라 칭해 자부심을 크게 드러내
보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시절에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598년 중건했으며, 1660년
에 성간(省侃)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751년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했다. 고승 유일(有一)이 이곳에 주석했으며, 1858년에는 의현(義玄)
이 만일회(萬日會)를 열기도 했다.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넓은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세심당, 감로당, 범종각, 달마선원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어 해남에서 대흥사 다음의 규모를 자랑하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응
진당, 괘불탱, 천불전 등의 국가 보물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및 시왕상 일괄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그 외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부도군
2곳과 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事蹟碑)가 전하며, 절과 달마산은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9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달마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미황사 샘터(석조)

▲  미황사 종무소(宗務所)


미황사는 바위 능선이 일품인 달마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바다가 있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변 풍경이 눈과 마음을 살살 녹일 정도로 일품을 자랑하며, 해남 서부와
바다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걸작이다.
또한 10월마다 이곳의 자랑인 괘불탱(보물 1342호)을 내걸며 '괘불재 산사음악회'를 열고 있
는데, 이제는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해남의 으뜸 행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템플스테이로도 많
이 재미를 보고 있다.

* 미황사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미황사길 164 ☎ 061-533-3521)
* 미황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미황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947호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대웅보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무거운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짠 다포(多包) 양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은 1751년에 중수된 것으로 1982년 보수공사 때 1754년에 작성된 '대법당 중수상
량문(重修上樑文)'이 나와 미황사의 부족한 일기를 채워주었다.

원래 단청이 칠해져 있었으나 장대한 세월이 색을 모두 거둬가면서 단청이 말라버렸으며, 그
로 인해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 중후하고 고색이 깊어 보인다.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이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대동하며 앉아있으며, 천장은 우물천
장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태인데 범어(梵語)로 쓰인 글자와 일천불 벽화가 새겨져 있
어 소소하게 장관을 이룬다. 게다가 천불이 그려져 있다 보니 대웅전에서 3배를 올리면 1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불에게 3배를 했기 때문에 3,000배를 올린 것과 같다고 함, 이
런 기적의 논리도 있었나??)

대웅전은 절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와 반야용선
(般若龍船)을 상징한다고 하며, 괘불재의 주인
공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괘불이 담긴 괘불
함이 대웅전에 들어있다. (보관장소는 변경될
수 있음)
건물을 받치는 주춧돌 중 앞면 4개와 옆면 2개
는 연꽃무늬와 자라, 게 등이 조각된 돌을 사
용했으며, 나머지는 자연석 그대로를 가져와
붙였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전남 유형문화유산 323호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넓적한 얼굴이 다들 후덕해 보인다. 그들 뒤로 색채가
강한 후불탱이 걸려있으며, 그 위에 색이 조금 바랜 닫집이 달려있다.

▲  천장까지 알뜰하게 꾸며진 대웅전 우물천장

▲  대웅전 대들보에 그려진 천불
대들보에 불상이 그려진 것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대웅전 신중탱
법당 수호용 그림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가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색이 조금 바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건 그림 밑 화기(畵記)에 있음>

▲  미황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인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내부에 봉안된 시왕상(十王像)은 윤선도(尹善道
)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윤두서는 아들이 없어 애를 태우던 중, 절 근처의 은행나무를 베어 시왕상을 조성해 절에 봉
안했다. 그랬더니만 그 정성이 명부전 식구들을 울렸는지 무려 10명의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4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 그의 4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고 한다. 우연인지 그럴싸하게 이어 붙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윤두서의 정성이
담긴 건물임은 분명하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 전남 유형문화유산 324호

불이 이글거리는 듯한 광배(光背)를 지닌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
존자(道明尊者). 시왕상, 판관, 녹사, 금강역사 등이 명부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이들 36
구는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이들은 '미황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남 유형문화유
산 324호
로 지정됨)

▲  명부전 시왕상과 판관, 녹사, 금강역사상 ▲

▲  미황사 응진당(應眞堂) - 보물 1183호

대웅전 뒤쪽에는 석가여래와 16나한(羅漢)의 거처인 응진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집으로 지붕 처마의 선이 마치 하늘로 훨훨 날라갈 듯 아주 시원스럽다.
대웅전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1751년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으며, 2001년 보수공사를 하였
다.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선필의 경지를 보일 정도로 우수하며, 기둥 윗
부분에 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경내에서 가
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좋다.


▲  응진당 목조석가여래3존상과 나한상

응진당에는 석가여래삼존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사자상, 동자상 등 18세기 중기에 조성된 26
구의 조각상이 있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묶어 '미황사 응진당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
일괄
'이란 이름으로 전남 유형문화유산 325호로 지정되었다.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응진당 식구들 (16나한상과 인왕상, 사자상, 동자상 등) ▲

▲  미황사 삼성각(三聖閣)

명부전 뒤쪽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인 삼성각이 있다. 산신탱
과 칠성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탱은 1943년 인근의 송지면 대죽리에 살던 김사숙
일가가 시주하여 만든 것이며, 독성탱과 칠성탱은 같은 해에 완도읍에 살던 이유복, 장순복이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시주한 것이다.


▲  미황사 경내에서 바라본 달마산의 위엄

▲  미황사를 나오며~~~ (계단 너머에 자하루가 있음)

미황사 구경은 생각보다 좀 일찍 끝났다. 부도군(浮屠群)과 사적비 등 놓친 것이 여럿 있으나
그리 당기지는 않았으며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괘불을 빼고 모두 친견했으니 크게 아쉬움은
없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겨버리면 그만이다. 허나 미황사 괘불재가 은근히
구미가 당겨 괘불재 기간에 맞춰서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을 계획이다. (어디까지나 계획임,
실천 확률은 장담 못함)


♠  달마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도솔암(兜率庵)

▲  도솔암 주차장에서 바라본 해남 송지면 지역

미황사를 둘러보고 아직 상경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후속 정처(定處)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달마산 남쪽 능선에 있는 도솔암을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정했다. 기왕 달마산에 왔으니 달마
산이란 존재를 어느 정도 풀고 가는 것이 좋을듯 싶어서다. 송지면의 중심지인 산정에서 도솔
암까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마봉송종길)이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
주차장이 있다. 길이 구불구불하고 커브가 많아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며, 만약 이곳까지 길이
닦이지 않아 저 밑에서부터 등산을 해야 했다면 아마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도솔봉 남쪽이자 연포산(418.6m) 바로 남쪽 380m 고지에 자리한 주차장은 마치 구름 위에 주
차장처럼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능선길을 따라 10~15분 정도 가면 도솔암이
모습을 비추는데 기복은 크지 않으나 내리막과 오르막길이 반복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일품 조
망이 양쪽으로 따라다녀 가는 길이 썩 심심치 않다.

              ◀  도솔암 입구
처음에는 내리막으로 시작하나 내려온 만큼 다
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허나 경사가 급하거
나 바위를 타는 구간이 아니라서 두 다리만 멀
쩡하면 누구든 오갈 수 있다.


▲  달마산 도솔봉 능선

달마산의 남쪽 끝을 이루고 있는 도솔봉 능선은 미황사 뒤쪽 달마산과 마찬가지로 온갖 풍파
를 이겨낸 규암층(硅巖層)의 하얀 수직 암봉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대자연이 오랜 세월
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바위 능선이긴 하나 옆으로 우회 산길을 내어 길은 안전하며, 중간
중간 일품 조망을 선물하는 바위들이 많아 여기서 천하를 굽어보는 맛이 쏠쏠하다.
전라남도의 야심작인 남도 500리 역사숲길이 이 능선을 지나는데 남쪽으로 본토의 남쪽 끝인
땅끝까지, 북쪽은 달마산 능선과 두륜산(頭輪山)을 거쳐 강진군(康津郡)까지 이어진다.


▲  도솔봉 능선에서 바라본 해남 송지면 지역

▲  규암층 암석들이 기묘하게 들어앉은 도솔봉 능선

▲  하늘을 향해 주름진 고개를 내민 도솔봉 바위
도솔봉의 하늘을 향한 숨겨진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  도솔봉 능선길 ①
하늘과 가까운 능선이긴 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숲길도 제법 이어져 있다.

▲  도솔봉 능선길 ②

▲  도솔봉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하
해남 북평면 지역과 완도(莞島, 바다 건너 지역)

▲  도솔암을 둘러싼 달마산의 바위 봉우리들 ①

▲  도솔암을 둘러싼 달마산의 바위 봉우리들 ②

▲  도솔암 직전 (계단 끝에 도솔암 법당이 있음)

▲  벼랑 위에 자리를 닦은 도솔암 법당

도솔봉 능선 370m 고지에 구름과 하늘을 벗삼으며 외롭게 들어앉은 도솔암은 미황사를 제외하
고 본토(부속도서와 잃어버린 땅 제외)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늙은 절이다. 비록 미황사만
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서 평일임에도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이 조금 보
였다.

이곳은 7세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귀족불교와 화엄종(華嚴宗)
발전을 위해 바쁘게 뛰던 그가 이 서남해 구석까지 와서 암자를 지을 이유는 전혀 없다. 게다
가 미황사를 세운 의조가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어 미황사의 부속 암자나
조용한 수행 공간으로 쓰인 듯 싶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서해바다로 진출하고자 울돌목을 공격했으나 충무공 이순신(李舜
臣) 장군이 이끈 수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났다. 이때 해상로가 차단된 왜군은 배를 버리고 달
마산을 통해 동쪽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때 화풀이로 도솔암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미황사
도 그때 피해를 입음)

이후 복구되지 못하고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70년대부터 뜻있는 승려들이 이곳에 관심을
가지고 복원을 시도했으나 워낙 산골이라 여의치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오대산 월정사(
月精寺)에 있던 법조가 연속 3일 동안 선몽을 꾸고 1,000리 이상 떨어진 이곳으로 달려와 도
솔암 재건에 나섰다.
그는 여러 절과 신도들의 도움으로 목자재 및 1,800장의 흙기와를 마련하여 그것들을 이곳까
지 손수 가져와 직접 법당을 지었다. 그리하여 그해 6월 16일 송광사 현봉 큰승려를 증명 법
사로 하여 법당 낙성식을 가졌다. 재건에 나선지 불과 32일만에 법당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
고 2006년 10월에 삼성각을 건립해 지금에 이른다.

현재 작게 지어진 법당과 삼성각 2동 정도의 건물만 있으며 생활공간이 없어 승려는 상주하지
않는다. (대흥사의 말사로 대흥사와 미황사에서 관리함)
소장문화유산은 없으나 절 주위로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도솔봉 능선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동
/서로 훤히 트여있으며 그로 인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게다가 조망 또한 우
수하여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절에서 50m 아래에 용담(용샘)이란 샘이 있는데
, 용이 승천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한다. 용이 탄 샘이라 그럴까 가뭄, 홍수 가리지
않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그 덕분에 도솔암의 소중한 샘터 역할을 한다.

▲  도솔암 법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  기와 1칸의 도솔암 법당

도솔암 법당은 바위 봉우리에 석축을 쌓고 평평하게 자리를 다진 곳에 홀로 자리해 있다. 남
쪽에 법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내었는데 자연석을 이용하여 계단이 들쭉날쭉 헝클어져 있
다. 밑에서 보면 법당 주변이 하늘의 요새처럼 보이는데 자리가 좁아서 산신각이나 독성각처
럼 조촐하게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을 지어 법당으로 삼았다.
천하에서 가장 작은 법당으로 덩치만 작을 뿐, 법당의 자격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도솔암에
걸맞게 단출하고 주변과 잘 어우러지게 지어진 것이 딱 정감이 간다. 대자연 속에 작게 자리
하여 자연에 순응하려는 모습이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무리해서 크게 지었다면 지금의 감흥
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도솔암 법당에 봉안된 조그만 석가삼존상과 후불탱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 궁벽한 곳까지 찾아온 중생들을 맞이한다.

▲  도솔암 삼성각

법당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벼랑 밑 구석진 곳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과 칠성, 독성이 봉안
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2006년 10월에 지어진 것인데, 법당 다음으로 마련될 정도로 도
솔암에서 그들의 위치가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  삼성각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왼쪽부터)
산신탱 호랑이의 얼굴이 무척 크게 그려져 내가 본 산신도(산신탱) 중에서
가장 큰 호랑이 얼굴로 기록되었다.

▲  도솔암 주변에서 바라본 해남 송지면 지역

▲  도솔암 주변에서 바라본 해남 북평면 지역과 완도

속세와 단절된 듯한 도솔암,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며칠 숨고 싶은
곳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도솔암에서 달마산 정상을 찍고 미황사까지(혹은 반대로) 달마
산 종주도 해보고 싶은데 그 인연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그만큼 서울에서 이곳은 먼 곳이다.

도솔암을 둘러보니 어느덧 16시, 여기서 멀지 않은 땅끝(갈두산)을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
러보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땅끝은 별도의 글에서) 이렇게 하여 5월 해남 나들이는 대
단원의 막을 고한다.

* 도솔암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61-1 (마봉송중길 3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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