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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호압사, 시흥동 늦가을 나들이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과 가을 하늘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순흥안씨양도공파 묘역 호압사 삼성각과 9층석탑

▲  순흥안씨양도공파 묘역

▲  호압사 삼성각과 9층석탑

 


가을이 늦가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끝 무렵, 금천구(衿川區)의 대표 지붕인 호암산
(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발걸음을 하고 있는데, 덩치는 작
지만 아주 잘생긴 바위 산으로 그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풍수지리 관점에서 호암산의 그 잘생긴 것이 문제가 되
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함께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오해
를 받게 된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산자락에 절을 세우고, 숭
례문(崇禮門, 남대문) 현판을 가로로 달았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두는 등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만큼 옛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들었다 놓았던 것이다.


♠  호암산 정상 밑에 깃든 조선 초기 고찰
시흥동 호압사(虎壓寺)

▲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시흥2동 뒷쪽에 자리한 호압사입구 정류장(152, 5517, 6515번 시내버스
경유)에서 시작했다.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바로 팔작지붕을 지닌 호압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하는데, 이곳은 호압사와 호암산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이들의 정문을 일
컫는 '호암산문(虎巖山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절 입구에 일주문이 있으니 당연히 호압사에서 세운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현실은 금천구청에
서 2000년에 지어주었다. 그 시절 금천구가 서울시의 25개 자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
구로 선정되어 시상금을 받았는데, 바로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  호압사 일주문에서 호압사로 인도하는 언덕길 (일주문 방향)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차량이 마음 놓고 호압사
까지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절과 가까워질수록 경사의 패기가 높아져 사람
과 차량 모두 적지 않게 숨을 헐떡이게 한다. 그 거리는 500m 정도로 아무리 경사가 급하다고
한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오를 수 있으며, 자존심을 곱게 접고 10여 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보일 것 같지 않던 호압사가 떠오르는 햇님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호암산 치유의숲 숲길 ①

일주문 동북쪽에는 '치유의 숲'이 펼쳐져 있다. 금천구에서 이곳 숲을 조금 손질하여 속세에
내놓은 것으로 여기서 대자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며 속세살이로 지친 몸과 마음을 풀라는 뜻
에서 '치유의 숲'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햇살이 거의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삼삼하고 숲내음도 꽤 그윽해 산림욕에 아주 좋으며,
숲 그늘에는 쉼터와 의자, 야생화공간, 약수터, 금천구 지역 임산부들을 위한 태교센터 등이
닦여져 있다.


▲  호암산 치유의숲 숲길 ②
치유의 숲에서 호압사로 가려면 각박한 경사의 호압사 숲길로 다시
나와야 된다. (북쪽 산길로 크게 우회해서 가는 길도 있음)

▲  콘크리트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호압사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호압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호암산을 찾으면 거의 꼭
들리다 보니 이곳도 1년에 여러 번씩 인연을 짓고 있는데, 호압사란 이름은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로 자비를 내세우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곳이 호랑이와 무
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호압사는 139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봉
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태종(
太宗)이 호압(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는
'금천(衿川) 고을(현재 시흥동)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
하며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
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
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그의 별칭으로 많
이 등장하는데,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세워졌음을 알려준
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
(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
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다. 그리고 2009년에 9층석탑을 세웠고, 잠시 지웠던 약수터와 우
물을 다시 만들었다.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약사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심검당 등 5~
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초기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늙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준다.

▲  경내 밑에 자리한 똥배 포대화상

▲  삼성각 뒤쪽에 있는 고운 자태의
석조관세음보살상 (2012년 작)


이곳에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이곳이 호암
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지키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지어낸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백성들을 동원해 서울에 궁궐을 짓던 1394년, 궁궐 건
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기현상이 계속 일어나자 태조는 제
대로 뚜껑이 열려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이에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모두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게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정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듯 합니
다'

하여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
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야되나?'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대는 누구요?'
'허허~ 그건 아실 필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만'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묻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소환하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
를 누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랬더니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
다.

* 호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경내로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나란히 마중을 한다. 이들은 약
사전 석불좌상과 함께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존재로 서쪽 느티나무는 높이 7m, 허리
둘레 4.2m이고, 동쪽 나무는 키 11m, 허리둘레 3.6m의 넉넉한 덩치를 지녔다.


▲  붉게 잘 익은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  호압사9층석탑과 우물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마련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있는 8각9층
석탑을 완전히 닮은 잘생긴 탑으로 호압사의 유일한 석탑인데, 탑이 없는 허전함을 달래고자
통 크게 9층석탑을 세우고 기증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사리를 직접 친
견할 수 있도록 1층 탑신에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앞에 세워야 하겠으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좌측 구석에 세웠는
데,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녀 가을 햇살에 한층 빛나 보인
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연못과 주둥이가 닫힌 우물이 있으니 이들은 근래 닦여진 것들이다.

              ◀  호압사 연못
9층석탑 옆 구석에 작게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었다.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수
심은 아주 얕으며, 연못 주위로 노란색 국화들
이 자리해 연꽃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

약사전 옆구리에는 삼성각이 높이 자리잡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5년에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
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이곳에는 1978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삼성각의 이름값을 하고 있으
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진영(眞影)이 걸려있어 절의 창건자를 두고두
고 기린다.


▲  호압사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었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유형문화유산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
러다 보니 법당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하고 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대표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이 협시보살을 넉넉히 대동하
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여래상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
薩)을 좌우에 붙이면서 세 식구를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으로 천진불(天眞佛)이
라 불리는 작고 귀여운 아기부처 2기를 갖다 붙여 지금은 다섯 식구(약사오존상)가 되었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여래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준다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
에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15세기(늦어도 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혔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두 손에는
그의 대표 연장인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
를 지킨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이 있으며, 불단 위쪽에 있는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
려해 중생의 눈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나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예전에는 있었음) 그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도서관 주변에 새롭게 샘
터를 닦았다.
긴 파이프에서 나온 물은 호암산이 베푼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에 신음
하는 목구멍을 적시니 몸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없다.

▲  호압사 샘터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의 위엄

푸른 하늘 밑으로 근육질 바위를 지닌 호암산 정상(393m)이 뉘어져 있다. 오늘도 호압사의 눈
치를 살살 보며 서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호암산, 호랑이 기운을 머금은 잘생긴 뫼인데, 너
무 잘생기다 보니 엉뚱하게도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해까지 받았다. 못생겨도 문제지만 너
무 잘생겨도 문제이니 세상사는 참 요지경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과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  호압사분기점에서 바라본 호암산 정상

호압사를 둘러보고 절 뒷쪽(동쪽)에 있는 호압사분기점 쉼터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기다가 호
암산 북쪽 능선으로 내려갔다.
호암산 정상 봉우리 바로 밑인 호압사분기점은 호암산 북부의 교통 요충지로 남쪽 산길은 호
암산 정상과 삼성산, 서쪽은 호압사와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동쪽은 삼성산성지와 서울대,
동남쪽은 호암산 정상, 그리고 북쪽은 호암산 북쪽 능선으로 독산동과 목골산으로 이어진다.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2코스(관악산역~석수역)
가 삼성산성지에서 이곳을 거쳐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으로 흘러간다.

보통 이곳에 오면 호압사나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로 많이 빠졌으나 이상하게도 북쪽 능선
으로 손과 발, 마음이 잘 가지 않았다. 나를 흥분시킬 늙은 명소나 적당한 볼거리가 딱히 없
었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호암산을 20년 넘게 200번 이상 오갔음에도 겨우 4~5번이 고작이
다. (목골산까지 간 것은 딱 2번)
하여 이번에는 호암산 정상을 먼 산 보듯 취급하고 북쪽 능선길로 빠졌는데, 햇님의 퇴근 시
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미답처(未踏處)인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을 둘러볼 겸, 조금만 거닐다
가 시흥4동으로 내려갔다.


▲  시원스럽게 뻗은 호암산 북쪽 능선길

호암산 북쪽 능선은 목골산과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이다. 능선 자체가 관악구
(冠岳區)와 금천구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경사는 거의 완만한
편이며, 숲이 매우 짙어 금천구와 관악구의 달달한 뒷동산 역할을 한다. 이곳에 안긴 늙은 명
소로는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이 있고, 목골산 북쪽으로 관악산생태공원과 독산자연공원 등이
있으나 이들은 도시에 흔한 뒷동산 근린공원이다.


▲  무성한 숲을 지나는 호암산 북쪽 능선길 ①

▲  무성한 숲을 지나는 호암산 북쪽 능선길 ②

▲  무성한 숲을 지나는 호암산 북쪽 능선길 ③

호압사에서 목골산까지 이런 산길이 쭉 이어져 있다. 서북쪽을 향해 거의 내리막을 보이다가
목골산 구역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는데, 목골산 정상까지는 40~50분 정도(호압사 기준)
걸린다. 겉보기와 다르게 꽤 산줄기가 길고 깊다.


▲  늦가을 단풍 속을 지나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호암산 북쪽 능선(금천초교 북쪽)에서 바라본 호암산과 슬슬
저물어가는 늦가을 하늘, 그리고 존재감을 보이는 달님

▲  호암산 북쪽 능선에서 시흥4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  순흥안씨 양도공 삼대영원(順興安氏 良度公 三代靈苑) 비석

시흥4동 호암산 북쪽 자락에는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조
선 개국공신인 양도공 안경공(良度公 安景恭)과 그의 아들(안순)과 손자(안숭선, 안숭신, 안
숭효) 등 3대의 묘가 깃들여져 있는데, 무덤 외에 안경공의 부조묘(不祧廟)와 사패기지비 등
의 늙은 존재와 사당인 추모재, 강당 등을 지니고 있다.
안경공의 후손들(순흥안씨 양도공파)은 안경공 묘역과 부조묘를 영원(靈苑)으로 삼아 그들의
성역으로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영원 남쪽과 동쪽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와 20세기 초에 조성
된 후손들의 무덤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안경공 3대의 묘 5기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그에 딸린 신도비와
무덤 석물 32기, 봉분 스타일은 그 시절 무덤 양식과 변천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
준다. 하여 이들 묘와 석물, 부조묘는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서울 유형문화유
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묘역 범위는 2,247.1㎡)

이곳은 금천구에 대표적인 늙은 무덤으로 후손들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는데, 안경공의 부조
묘를 중심으로 남쪽에 안경공묘와 안숭선묘가 자리잡고 있고, 북쪽에 안순묘와 안숭효묘, 그
리고 그 뒷쪽(동쪽)에 안숭신묘가 있다. 묘역 내부 관람은 어려우나 담장과 철책 밖에서 어지
간한 것은 다 보여 안숭신묘를 제외한 무덤 4기와 사패기지비, 부조묘는 두 눈으로 확인이 가
능하다. 하여 까치발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 126-1 (독산로36나길 63)


▲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의 중심, 안경공과 안숭선(安崇善)묘

▲  최대한 당겨서 바라본 안경공과 안숭선(安崇善)묘

앞쪽에 자리한 무덤이 안경공의 손자인 문숙공 안숭선의 묘이고, 뒷쪽 무덤이 이곳의 중심인
양도공 안경공의 묘이다.

안경공(1347~1421)은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손자이자 쌍청당(雙淸堂) 안종원(安鍾元)
의 아들이다. 1376년 문과(文科)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고, 조선으로 세상이 엎어진 이후에는
도승지(都承旨),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냈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커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
夫)와 흥령부원군(興寧府院君),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했다. 태종은 그의 공을
기려 이곳 땅을 내렸는데, 그 시절 이곳 지명은 금천현 백사동(栢寺洞) 능안(陵安)골이었다.

그는 이곳에 별서(別墅, 금천별서)를 지어 머물렀으며, 1421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양도
(良度)란 시호를 받고 제왕으로부터 부조묘 설립의 큰 예우를 받았다. 부인인 오천정씨는 문
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의 딸로 의정택주(懿靜宅主)로 봉해졌으며, 부부가 하나의 봉분
에 합장되어 있다.

안숭선(1392~1452)은 안순의 2남이자 안경공의 손자로 1420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형
조판서와 정헌대부(正憲大夫),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참판 겸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431년
부터 4년간 도승지를 하면서 왕명을 출납함이 공명 진실하여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1435년에 마련된 양도공 신도비문과 그 전자(篆字)를 직접 썼으며, 1452년에 사망하자 '문숙
(文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안경공 부부묘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 많이 나타나는 네모난 봉분으로 밑도리에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주위로 장명등, 상석(床石), 작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니고 있으며, 남
쪽 밑에 안경공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그 신도비가 너무 늙어서 피부가 거칠어지자 근래
에 새 신도비를 세웠다.
안숭선묘는 호석이 없는 동그란 봉분으로 문인석(文人石) 2쌍과 묘표,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남쪽 밑에 신도비를 두었는데, 그 역시 새 신도비를 따로 지니고 있다. 하여 이들은 늙은 신
도비와 어린 신도비 등 2기의 신도비를 지니게 되었다.


▲  사패기지비(賜牌基地碑)

안숭선묘 밑에는 사패기지비가 세워져 있다. 안경공의 공을 기리고자 태종이 이곳 일대를 하
사했는데, 제왕이 내린 땅을 사패기지(賜牌基地)라고 한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과 같은 그런
사실을 길이길이 기리고자 마련한 비석이다.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을 지닌 3m 정도의 잘생긴 비석으로 글씨가 크고 또렷해 조
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  푸른 철책 너머로 바라본 사패기지비와 안숭선묘, 안경공묘

▲  안순묘(오른쪽)와 안숭효묘(왼쪽)

안순(安純, 1371~1440)은 안경공의 아들로 1389년 문과에 급제했다. 숭록대부(崇祿大夫)와 판
중추부사(判中樞府事),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호조판서(戶曹判書), 의정부찬성(議政府
贊成)을 지냈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특히 1424년부터 1436년까지 12년 동안 호조판서를 지내면서 왕명 출납이 정명했고, 정책 입
안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병으로 사직을 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은 법이다. 나는 죽어서 산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자 부친의 선영(
先塋) 곁에서 생을 마칠 것이다'
이야기하고 부친의 금천별서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440년에
사망하니 세종은 정숙(靖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안숭효(安崇孝, 1400전후~1460)는 안순의 4남으로 가정대부(嘉靖大夫)와 호조참판, 형조참판
(刑曹參判),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고, 경기도와 전라도, 충청도 관
찰사를 역임했다.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1460년에 충청감영에서 병사했으며, 그 시절 충청도
기근이 상당하여 백성들의 기근 구휼(救恤)에 힘썼다.

안순묘는 지붕돌 신도비를 지니고 있는데, 비석이 너무 늙자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우면서 2
기의 신도비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안숭효와 안숭신(安崇信, 1395~1441)묘는 신도비가 없
다.


▲  양도공 안경공의 부조묘

안경공 부조묘는 조선 초기에 조정에서 세워준 것으로 1992년 이곳으로 이전 중건되었다. 보
통 사망하고 4대가 지나면 그 위패는 땅에 묻거나 태워 더 이상 제삿밥 대접을 받지 못한다.
허나 나라에서 부조묘를 받으면 대대손손 제사밥을 받는 특혜를 누린다.


▲  부조묘 앞 연못
누렇게 뜬 연꽃들로 가득해 차디찬 겨울 제국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해서 늦가을 호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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