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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칠보사, 선학원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북촌 칠보사, 선학원 '

삼청동과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과 삼청동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선학원 신중도

▲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

▲  선학원 신중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듯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시내를 중심으로 절집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그렇게 하기를 어언 20여 년이 넘었다.
절은 평소에도 나들이와 답사로 많이 찾는 편으로 서울에 있는 늙은 절(100년 이상 된 절
)은 모두 가보았고, 문화유산을 간직한 서울의 현대 사찰도 어지간한 곳들은 거의 인연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날만큼은 서울 밖으로 나가기가 오지게 귀찮아 어지간하면 서울 안에
서 모든 것을 처리한다. 그러다 보니 갔던 곳을 또 우려먹고 복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의 미답(未踏) 절이 고갈되는 것에 대비하여 남겨둔 비장의 절이 있으니 바로
북촌(北村)에 있는 칠보사와 선학원이다. 이들은 20세기 현대 사찰로 늙은 문화유산을 품
고 있는데, 이번에 그들을 흔쾌히 꺼내보기로 했다.

오전 11시에 방학동(放鶴洞)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를 찾아 전혀 질
리지 않는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와 그곳의 후한 인심(공양밥, 떡 등)을 충분히 누리고 삼
청동(三淸洞) 칠보사로 이동했다.


♠  17세기 불상을 간직한 도심 속에 조그만 현대 사찰
삼청동 칠보사(七寶寺)

▲  칠보사의 외경

삼청동 주택가 북쪽 구석에 칠보사란 작은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남
쪽 자락으로 절이 자리한 동네(삼청동)는 동/서/북 3면이 북악산에 완전히 감싸여 있고, 집들
도 거의 3~5층 내외가 전부라

'여기가 정녕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더냐??'
물음표를 마구 내던질 정도로 산주름에 묻힌 시
골 마을이나 읍내 분위기를 여실히 자아낸다. 게다가 서울 도심의 인기 명소인 삼청동의 한
조각임에도 거의 적막하여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

선학원(禪學院) 소속인 칠보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제자인 춘성(春城)이 1932년에 세웠
다는 삼각사(三覺寺)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1939년 성남시 영장산에 봉국사(奉國寺)
를 세우면서 삼각사를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또는 1932년에 통합시켰다고 함) 봉국사는
조선 중기부터 엄연히 있던 절이라 삼각사 건물을 그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면 되겠다.
삼각사가 떠난 이후에는 무속인과 기도하는 사람들로 무속과 치성 수요가 많았다고 하며, 그
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절이 들어앉았다. 하지만 칠보사 이전의 역사는 두리뭉실한 것들이
많아서 확실한 것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현재 칠보사는 불심이 깊던 칠보화(七寶花) 보살이 1958년에 세운 것이다. 그 당시 800여만
원의 거액을 들여 이곳 일대를 매입해 대웅전과 염불당, 삼성각을 지었는데, 자신의 법명(法
名)을 따서 절 이름을 칠보암(七寶庵)이라 하고 이곳에 머물다가 1960년대에 만해 한용운의
수제자인 석주(강석주)에게 무상으로 절을 넘겼다.

석주는 절 이름을 칠보사로 바꾸었으며, 1968년에 경내 건물을 부시고 4년에 공사 끝에 15칸
대웅전을 지었다. 이때 경복궁 경농재(慶農齋)의 부속 건물인 대유헌(大有軒)을 가져와서 지
었다고 한다. 또한 범종과 종각을 마련했으며, 광주 법륜사(法輪寺)에 있던 불상을 업어와 이
곳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으니 그가 큰법당에 있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다.

두 망막이 거의 부담이 없을 정도로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요사(寮舍), 범종각 등 3~4동
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6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경내에 그늘을 드리운다.

* 칠보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4 (삼청로9길 51, ☎ 02-732-1424)


▲  활짝 열린 칠보사 대문

칠보사는 좁은 경내와 위치상의 문제로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문짝
이 달린 대문이 이곳의 일주문 역할을 담당한다.
무늬가 새겨진 견고한 모습의 문 돌기둥에는 '기원도량','칠보사' 등이 쓰여 있어 이곳의 성
격과 이름을 속세에 알리고 있으며, 저 문을 들어서면 경내로 인도하는 완만한 경사의 짧은
오르막길이 나온다.


▲  꽃밭에 차려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귀여운 아기부처상이 거의 1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꽃
들로 곱게 치장된 관불대에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데,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시원한 물
을 껴얹는 관불의식(관정의식)을 행하며 자신의 고충사항을 그에게 슬쩍 들이민다.


▲  칠보사 큰법당

큰법당은 칠보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이곳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큰 건물이다. 석
주가 1972년에 지은 15칸 규모의 집으로 경복궁 경농재에 딸린 대유헌을 가져와서 지었다고
한다.

대유헌은 1893년에 경복궁에 지어진 것으로 고종(高宗)이 직접 상량문을 작성해 농사를 격려
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허나 왜정(倭政) 때 경농재와 대유헌은 조선총독부 관사
로 전락되었으며, 1939년 삼청동 약수터로 쫓겨나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석주가 사들여
완전히 해체하고 큰법당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큰법당에 걸린 칠보암 현판의 위엄
정연한 모습의 '칠보암' 현판과 한글로 쓰인 '큰법당' 현판, 그리고 큰법당에
걸린 주련들은 칠보사를 크게 일구었던 석주의 글씨들이다.

           ◀  칠보사 느티나무
칠보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00~6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800년 이상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칠보사가 있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을 지킨 나
무로 큰법당 옆에 자리해 일품 그늘을 아낌없
이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도 많고 건강상태도
양호해 서울시 보호수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해 야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보통 이 정도의 늙은 나무들은 보호수로 지정
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사각지대에 버려진 오
래된 나무와 문화유산들이 은근히 많다.


▲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 - 국가 보물

큰법당 불단에는 석가여래상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금동 피부의 석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푸짐하고 넉넉한 인상의 석가여래상이 이곳의 든든
한 후광이자 국가 보물의 큼직한 지위를 가진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니 칠보사에 왔다면 그를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곳 금동석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로 1622년에 능양군(綾陽
君. 인조)의 부인인 조씨<장렬왕후(莊烈王后)>가 시부모와 친정 부모의 천도를 목적으로 조성
하여 왕실의 원찰(願刹)인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에 봉안했던 11개 불상의 일원으
로 의심되는 존재이다.
17세기에 조각승으로 크게 활동했던 현진(玄眞)과 수연(守衍), 응원(應元), 인균(印均) 등이
합작하여 만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의 조각 특징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머리와 상반
신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고, 오른손은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다리 위에 둔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보이고 있는데, 상반신은 허리가 짧고 어깨가 넓으며, 하반신은 다리가 높으니
이는 현진의 조각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턱을 수평으로 깎은 네모진 얼굴에 양쪽 볼이 볼록하게 양감이 있으며, 작고 긴 눈에
오똑한 코, 미소가 겯드려진 작은 입 등 인자함이 파도를 치는 인상은 수연의 조각 스타일로
전해진다.

불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여럿 나왔는데, 용복사(龍腹寺) 간행 '대방
광불화엄경소', 1622년 의왕 청계사(淸溪寺)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간행 미
상의 '묘법연화경', 5종의 다라니(주문), 후령통(복장을 넣는 통), 발원문(發願文), 축원문
등이 확인되었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는 용복사 혜순이 1630~1631년에 간행한 판본(板本)이며,
발원문은 녹색 비단에 경면주사(鏡面朱沙. 붉은색 지하광물)로 내려쓴 왕실발원문이다. 이 발
원문에는 '대비(大妃) 정묘생 김씨<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로 추정>'를 비롯해 주
상 전하와 왕후, 세자 등 왕족들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리고 후령통에서 나온 1924년 제작 축원문을 통해 이 불상이 광주시 청량산에 있던 법륜사
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1661년에 현종(顯宗)이 폐불 정책으로 도성(都城)에 있던 자수
사와 인수사를 없애면서 그곳에 있던 불상을 법륜사 등 경기도의 여러 절로 옮겼다.
그 법륜사가 20세기에 사라지면서 서울로 흘러들어왔고, 칠보사 주지 석주가 그를 입수해 가
져온 것이다. 덕분에 칠보사는 이 불상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었고, 이렇게 보물급 문화유산
을 보유한 현대 사찰이 되어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칠보사는 비
록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영영 인연을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성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복장유물의 경전과 불상의 형태, 이목구비, 주름 표현 등 양식
적 특징을 통해 17세기 초로 여겨지며, 2018년 10월 국가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한 석가삼존상

각자 특유의 인상과 미소, 연장을 지니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석가여래좌상은 통통한 얼
굴을 지닌 뚱보 아저씨(또는 아줌마) 같은 인상이 눈길을 자꾸 붙잡으며, 좌우로 맵시가 좋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상은 홀로 있는 석가여래좌상의 외로움을 달래주고자 근래 달아놓은 것
들이다.


▲  큰법당 신중탱
색감이 살아있는 신중탱은 법당 지킴이용 탱화로 위태천(韋太天) 등 온갖
호법신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칠보사 절밥은 맛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여 이곳의 달콤한 절밥을 기대했으나 조금 늦
게 도착한 불운으로 준비된 밥이 다 떨어져 숟가락 조차 들 기회도 얻지 못했다. 다만 후식용
으로 준비된 떡을 제공해주어 그 아쉬움을 약간이나마 달래주었는데, 비닐봉투에 떡을 담아서
주는 것이 아닌 네모난 작은 상자에 여러 떡을 담아 정성스럽게 포장한 것을 주어 이곳의 넉
넉한 인심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칠보사와 첫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메뉴인 선학원으로 움직였다. 선학원까지는 북
촌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20여 분을 이동해야 되는데, 계절의 여왕인 5월에 걸맞는 아주 쾌청
한 날씨라 삼청동과 북촌 일대는 나들이/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 인파를 계속해
서 뚫고 가면서 중간에 석정보름우물 등 북촌의 여러 소소한 명소들을 복습하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  삼청동 북촌로5나길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왼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북악산(백악산)의 정상부이자 서울 도심의 대표 지붕인 백악마루
(342m)이다. 그 오른쪽(동쪽)으로 한양도성을 등에 지닌 북악산 주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  계동 석정보름우물

중앙고등학교 남쪽인 계동길에 있는 석정보름우물은 조선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늙
은 우물이다. 서울 도심에서 경복궁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 등의 궁궐과 종묘(宗廟)를 제
외하고 가장 오래된 편에 속하는 우물로 가회동(嘉會洞)과 계동(桂洞)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
안 식수로 사용했다.
보통 15일은 물이 맑고, 나머지 15일은 흐리다고 해서 석정보름우물이란 긴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서울 장안에서 물맛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이 우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
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들을 원하는 여인과 궁궐 궁녀들의 수요가 상당했으며, 궁녀들은 제왕
의 황홀한(?) 성은과 왕자 생산을 꿈꾸며 몰래 앞다투어 마셨다고 전한다.

이곳은 천주교하고도 인연이 깊은데, 1794년 천주교 영업을 위해 청나라에서 넘어온 주문모(
周文謨)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진행했다. 이때 이
우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1845년 김대건(金大建)이 북촌 일대에 천주교 포교를 하
면서 이 물을 일종의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19세기에 거의 연례행사처럼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로 천주교 신자와 신부들이 많이 처
단되자 우물도 크게 흥분을 했는지 갑자기 물맛이 써져 동네 사람들이 한동안 식수로 사용하
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물론 사실은 아닐 것이며, 주문모와 김대건 등 천주교와
인연이 깊은 우물임을 강조하고자 천주교 사람들이 살짝 지어냈을 것이다.

왕년에는 지역 사람들의 식수로 아주 바쁘게 살았지만 상수도 보급과 지하수 오염 등으로 죽
은 우물이 되면서 지역의 작은 명소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현재 우물은 근래 손질된 것
이라 옛 모습은 크게 사라졌으며, 예전처럼 물을 기를 일도 없어서 입도 굳게 봉해져 있다.

* 석정보름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  선학원의 오랜 중심지, 안국동 선학원(禪學院)

▲  선학원과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윤보선가(尹潽善家)에서 안국역(3호선)으로 이어지는 윤보선길 중간이자 덕성여고 바로 남쪽
에 재단법인 선학원의 중심지인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한옥으로 지하 1층에는 선학원 사무실이 있
고, 1층에는 선학원의 100년 역사와 유물, 만해 한용운의 유물을 머금은 한국근대불교문화기
념관이, 그리고 2층에는 선학원의 법당이 있다.
북촌이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임에도 칠보사와 선학원은 이번에 첫 인연을 지었는데, 그동
안 선학원은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어서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곳에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탱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는 비상용으로 놔두고 있다가 이번에 발걸음을
한 것이다.


▲  옛 선학원의 빛바랜 사진
1931년에 발간된 '선원(禪院)' 창간호에 실렸던 선학원의 초창기 모습이다.
그 옆으로 선학원 창건 상량문과 선학원 중앙선원 전경, 중앙선원
현판 사진이 있다. (현판 사진은 이곳 기념관에 있음)


선학원은 고약했던 왜정 시절, 왜정에 빌붙던 타락한 불교계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민족불교
수호 및 독립운동을 위해 부산 범어사(梵魚寺)의 경성포교당 포교사(布敎師) 남전(南泉), 안
변 석왕사(釋王寺) 경성포교당 포교사인 도봉(道峰), 범어사 승려 석두(石頭) 등이 감옥에 투
옥되어 있던 이판계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내세워 결성했다.

최창훈 등 여러 신도의 지원으로 25,500원을 마련해 안국동 40번지(현재 선학원 자리) 190평
을 구입해 1921년 8월 10일 조선불교선학원 본부를 기공했다. 이에 범어사에서 서울 인사동(
仁寺洞) 포교원을 철거해 거기서 나온 자재와 기와 1,000장을 흔쾌히 기증했으며, 그해 10월
4일 상량식을 갖고, 그 다음달인 11월 30일 완성을 보았다. 선학원 상량문(上樑文) 발기자에
는 도봉과 남전, 석두 외에 용성(龍城), 성월(惺月) 등도 들어있다.

1922년 3월 30일~4월 1일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용성과 남전, 석호,
성월, 만공(滿空), 용금, 학명 외 79인의 발기로 시들어가는 선종(禪宗)의 부활과 선승(禪僧)
의 상호부조 및 자립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조직했다.
그 본부는 안국동 선학원에 두고 서무부와 재무부, 수도부의 3부를 중앙에 두었으며, 장성 백
양사(白羊寺),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예산 정혜사(定慧寺) 등 각 절에 지부를 두었다. 그리
고 중앙의 수도부이사로 만공, 서무부이사로 적음, 재무부이사로 석두를 세웠으며, 성월과 학
명, 도봉 등 20여 명의 평의원을 선출해 수도와 제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1922년 11월 선학원을 부산 범어사 명의로 신탁 등기했으며, 1923년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설
립허가원을 조선총독부에 냈으나 거절당했다.
1924년 선학원 선우부인회를 조직해 부인회관을 요사채 바깥에 마련하여 여성불자들의 정진도
량으로 삼았으며, 1926년 5월에는 재정 빈곤으로 인해 선학원을 범어사 포교당으로 임시 전환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용성진종 등 127명의 승려들이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대처(帶妻)와 식육 금지를 요
구하는 제1차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했으며, 그해 6월 만해 한용운과 송세호 등이 6.10만세운
동 사전 검속으로 선학원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강제 수감되었다. 그리고 9월 용성진종
등이 다시 대처와 식육 금지를 요구하는 제2차 건백서를 총독부에 보냈다.


▲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과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1913,5,25일)
, 불교대전(佛敎大典, 1914,4,30일)

▲  1931년 3월 14일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열린 조선불교선종
제1회 전국수좌대회 기념사진


1931년에 적음(寂音)이 선학원을 인수해 재건했으며,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서 조선불교
전국수좌대회를 선학원에서 개최하여 종무원 원규와 규약을 제정하고 종정, 원장, 이사, 선의
원 등의 의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선풍 진작과 납자(衲子)들의 결속을 위해 전선수좌
대회도 개최했다.
그해 10월 '선원'을 창간했으며, 1932년 선학원 부인 신도들이 안국동 41번지 대지와 건물을
매입했다.

1933년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 발포기념식을 가졌으며,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해 1934년 12월 5일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래서 초대
이사장으로 만공, 부이사장은 한암, 상무이사는 적음, 이사는 남전과 성월, 감사는 서호, 탄
옹, 선학원 원장은 성월, 고문은 경운이 맡았다.
이 단체는 조선불교 선리(禪理)의 수행과 연구에 의해 승려와 일반 신도들에게 정신적 수양을
베풀고자 각종 시설을 하려는 것이 법인 구성의 목적이며, 재단법인이 설립됨으로써 선학원은
명실공히 중앙선원(中央禪院)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선학원은 창건 이후부터 선학원 자체
에 의한 자력구제 방안을 꾸준히 강구했는데, 이것이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1935년 1월 조선불교선종 종헌이 반포되었으며, 대표 종정은 만공이 맡았다. 이때 조선불교선
종 종헌의 선서문에서 한국불교의 선 전통을 왜열도 불교의 침탈로부터 수호할 것을 밝혔다.
1939년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가 열렸으며, 1941년 정승풍 진작을 위한 고승 34명을 초청해 유
교법회를 열었다. 이때 만공, 석상, 서응, 묵담, 한영, 동산, 운허, 청담, 석주, 한암 등 34
인이 참가했으며, 법망경, 유교경(遺敎經), 조계종지에 관한 설법을 하였다. 유교법회 후 비
구승으로 결성된 범행단을 조직하고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2년 선학원에서 만해 한용운과 성월, 만공 등 8명의 납자가 발기해 경허집을 냈으며, 1944
년 7월 덕성학원(현 덕성여대)에서 선학원의 부인회관을 점유하면서 선학원 경내가 크게 좁아
졌다.


▲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은 옛 중앙선원 현판

▲  불교 관계 서류
1954~1957년에 진행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법정 다툼에 증거 자료로 제출된 서류와
사건 진행에 따른 법원 자료들이다.

▲  불교 소송 서류 (1950년대 불교 정화운동)
대처승과의 법정 싸움에서 필요한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1~8차)와 불교 정화 관련
각종 자료들을 모은 서류이다.


1946년 용담, 대의, 경봉, 석주, 이재열, 곽서순, 장상봉, 박봉석 등이 선학원에서 혁명불교
도동맹을 조직했으며,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제1차 불교정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선학원
소속의 대의, 석주, 정영 등이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은 왜색불교와 식민주의불교를 청산하고자 함으로 선학원에서 앞장섰는데, 선학원 비
구 80여 명이 태고사(太古寺, 현재 조계사)에 들어가 절을 점거했다. 이때 대한불교 조계종(
曹溪宗) 중앙종무원과 조계사 현판을 내걸고 종정(宗正) 동산, 부종정 금오, 도총섭(都摠攝)
청담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이승만의 불교정화 담화와 정부의 권고, 그리고 불교 자체적으로 정화불사(왜색불교 청
산, 대처승 폐지 등)를 벌였으나 갈등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1970년 대처승들이 태고
종(太古宗)을 따로 만들어 조계종에서 완전히 나가버렸다.
또한 조계종과 선학원간에도 소속 여부 문제 등이 생기면서 1995년 조계종과 별도의 독자 노
선을 결의했다. 이에 조계종은 관련된 선학원 승려들을 징계했고, 이후로도 타협점을 계속 모
색했으나 아직까지 결론은 나오지 못한 상태로 사실상 조계종과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2014년 11월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을 기공하여 2018년 6월 2일 개관했으며, 이곳에
선학원 본부와 선학원의 100년 발자취, 그리고 만해 한용운 관련 유물을 듬뿍 담았다. 기념관
은 무료 관람이며, 기념관을 통해 2층 법당으로 올라가면 된다. 그 법당에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신중도가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보자.

* 선학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40 (윤보선길 35-4, ☎ 02-734-9654)
* 선학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경허집(鏡虛集)과 만해 한용운의 약연보

왼쪽에 있는 경허집은 1943년 3월 31일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발간한 경허의 생애와 사상을 담
은 책으로 제자(題字)는 적음, 서문(序文)은 만해가 썼다. 그리고 오른쪽 원고는 만해 한용운
의 약연보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매매사건 보도와 관련해 주필에게 보낸 탄원서이다.


▲  만해선생 송수첩(送受帖)

1938년 7월 12일, 청량리 북쪽에 있는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관련글 보기)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한 오세창(吳世昌)과 홍명희(洪命憙), 친일파 화가 김은호(金殷鎬) 등
18명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며 지은 그림과 시를 모아서 엮은 서화첩(書畵帖)이다.
표제는 김은호가 썼으며, 화첩 첫머리에는 만해 한용운이 회갑을 맞이하여 남긴 소회가 들어
있다.


▲  선우공제회 취지서(왼쪽)와 전국수좌대회선서문(오른쪽)

선우공제회 취지서는 1922년 3월 30일~4월 1일에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만공, 성월 등 청정
비구 35명이 모여 선우공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취지서이다. 표면상으로는 선풍진
작과 회원 상호간의 자립, 자애를 내세웠으나 실제는 왜정의 불교정책에 대한 저항과 민족불
교 수호를 천명했다.

그 옆에 있는 전국수좌대회 선서문은 전국수좌대회 조선정통수도승 일동의 명의로 발표된 조
선불교선종 종헌의 선서문이다. 1934년 12월 30일 제정되고 1935년 1월 5일에 발표된 것으로
왜식 불교의 침탈로부터 우리 불교의 선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3.1운동 민족대표 재판 판결문
1920년 왜정의 3.1운동 민족대표 재판 판결문으로 만해 한용운은 손병희(孫秉熙),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이종일(李鍾一) 등과 더불어
제일 무거운 3년형을 선고 받았다.

▲  만해 한용운의 수형자 기록표와 혁신공보, 영문독립선언서

만해 수형자 기록표(왼쪽)는 그가 3.1운동 민족대표로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
을 때 작성된 것으로 죄명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자리한 혁신공보(革新公報)는 3.1운동 직후 김법린(金法麟), 김상호, 박민호, 김상헌
등 불교계 청년들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제작 배포한 지하 비밀신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와 미국의 동향, 만주 지역 독립운동 등을 담고 있으며, 영문 독립선언서는 3.1운동 당시 대
한인국민회에서 배포한 것으로 한용운의 이름이 담겨져 있다.


▲  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1919년 11월 15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 상해(上海)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한글(국한
문)과 한문, 영문으로 발표한 선언서이다. 선언서에는 왜정 사찰령의 가혹성과 식민지 통치정
책의 잔혹성에 대한 불교계의 저항, 승려 7,000명의 항일 독립의지가 담겨져 있으며, 대표자
12명은 모두 가명을 사용했는데, 오만광은 범어사 주지인 오성월(성월), 김취산은 통도사 주
지인 김구하, 지경산은 김경산으로 추정된다.


▲  신간회(新幹會) 동정보고서(윗쪽)와 만해 한용운의
피체자 기록표(아래)

만해 한용운 피체자 기록표는 1929년 12월 29일에 열린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와 관련된 만해
한용운과 조병옥(趙炳玉), 권동진(權東鎭) 등을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묶어 체포했을 때 종로
경찰서 형사과에서 작성한 기록표이다.


▲  정선강의 채근담(精選講義 菜根譚)과 귀원정종(歸源正宗, 가운데),
만해선생시집

정선강의 채근담은 명나라 홍응명이 쓴 것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알기 쉽게 해설한 서적이다. 만해 한용운이 1917년 부산 범어사에서 우리 실정에 맞게 손질한
것이며, 귀원정종은 1913년 6월 중앙포교당에서 백용성이 쓴 것으로 주자학(성리학)과 기독교
의 불교 비난에 대한 반론서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만해선생시집은 만해의 한시(漢詩)를 필사
한 시집이다.


▲  대한독립선언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작성한 것으로 3.1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임시헌장 10개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서문, 6개 정강이 담겨져 있다.

▲  그 유명한 그림,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泰和館) 독립선언서 선언

▲  만해 한용운의 친필 휘호인
전대법륜(轉大法輪)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박정희 정권이 한용운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고자 추서한 훈장이다.


▲  불청운동(佛靑運動) 7,8호와 회광(回光) 제2호

불청운동은 1932년 10월 25일 조선불교청년총동맹에서 발간한 것으로 만해 한용운의 권두언(
卷頭言)이 실려있다. 1930년대 조선불교청년회가 도솔사 만당 결사를 계기로 조선불교청년총
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이들은 정교 분리와 왜정의 30본산 제도 및 사찰령 폐지, 불교
의 대중화 등을 내세워 반일 투쟁을 주도하며 조선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회광은 조선불교학인동맹에서 낸 기관지로 청담이 담당했다. 1929년과 1932년에 안암동 개운
사(開運寺)에서 2차, 3차 대회가 열렸으며, 1932년 4월 통도사에서 열린 임시총회에서 조선불
교학인총연맹으로 이름을 갈았다.

           ◀  선가구감(禪家龜鑑)
선가구감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은 것으로
'참 나'를 찾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선가구감은 만해의 수제자인 용담
(龍潭)이 쉽게 편역한 것으로 선학원에서 1948
년에 불교 대중화의 일환으로 한글선학간행회
를 조직하여 한글선학 제1권으로 펴낸 유서깊
은 책이다.

   ◀  정신수양 대중불교 입교문답과 불법
정신수양 대중불교 입교문답은 1950년에 윤주
일이 쓰고 안진호가 교열한 불교 입문서이고,
불법(佛法)은 한국불교문화협회 중앙총본부에
서 1954년에 발행한 것으로 석가모니약전과 불
교 사상의 근본 이념 등을 소개한 불교 안내서
이다.

▲  석주가 쓴 선학원 설립목적과
승려 남전의 필적

▲  불교사건 서증 사본(왼쪽)과 1956년에
작성된 총무원 일지, 한국불교승단
정화사(오른쪽)

▲  청담이 손대덕화보살에게 준 게문

▲  만공이 혜일 대영니에게 준 게문(偈文)


▲  선학원 중앙선원 안거방함록(安居芳銜錄)
1934년 동안거(冬安居)부터 1967년 하안거(夏安居)까지 선승들의
안거 기록을 담고 있다.

▲  선학원 현판과 만해 한용운 동상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1922년에 작성한 검은 피부의 선학원 현판이 높이 깃들여
져 있다. 그는 옛 선학원 건물에 있던 것으로 그 앞에 선학원의 중심 인물인 만해의 동상이
의연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고, 선학원 현판 좌우로 중앙선원 현판과 선불장(選佛場) 현판이
자리해 서로 명필을 겨룬다.


▲  선학원 2층 법당 (동쪽 방향)

1층 기념관을 둘러보고 신중도를 보러 2층 법당으로 올라갔다. (기념관에 전시된 유물과 자료
들은 일부만 본글에 소개했음)
연병장처럼 넓은 2층 법당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이 있는 불단과 신중탱, 범종이 있
는데, 오늘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이 맞는지 고개가 심히 갸우뚱거릴 정도로 사람이 없
었다. 1층 기념관도 지키는 보살 아줌마를 빼면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 석가탄신일(부처
님오신날)의 흥겨운 분위기가 이곳만 쏙 비껴간 기분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고 아주 차분하
고 여유롭게 선학원과 신중탱을 거의 독점하며 둘러본다.

▲  선학원 2층 법당 (서쪽 방향)

▲  선학원 2층 법당에 걸린 범종


▲  선학원 신중도(神衆圖) - 서울 유형문화유산

호법신들의 무리를 가득 머금은 신중도(신중탱)는 이곳 선학원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1868
년 3월 서운암(瑞雲庵)에서 조성하여 봉안했는데, 화기(畵記) 밑부분이 아쉽게도 사라져 탱화
를 그린 화승과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서운암의 위치도 아리송하다.
다만 해인사(海印寺) 국일암 신중도(1885년)와 직지사(直指寺) 삼성암 신중도(1888년), 통도
사 성전암 신중도(19세기)와 같은 형식으로 그중에서 국일암 신중도와 성전암 신중도는 초본
이 거의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서운암은 경상도 어딘가에 있던 암자로 여겨지며, 어
찌어찌하여 선학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탱화에 그려진 각 존상의 얼굴 표정 묘사가 돋보이고, 형태나 필선, 구도, 문양 등이 질적으
로 뛰어나며,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에서 유사한 모본으로 그려진 신중도 중 가장 늙은 것
으로 평가되어 2019년에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었다. 바로 이 탱화를 보고자 선학원을 찾은
것이다.


▲  액자에 소중히 담겨진 선학원 신중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액자 유리창에 법당 내부에 잡다한 것들이 비추다 보니 온전하게 담기가
조금 어렵다. 잘못하면 잘 그려진 탱화에 나의 못생긴 낯짝이 살짝
비춰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어 각별히 조심을 기했다.

▲  선학원 법당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탱글탱글한 금동 피부를 지닌 석가여래좌상이 대좌(臺座)에 높이 앉아 풍족하게 차려진 공양
물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불상 뒤로는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그 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린 닫집이 있다.


▲  썰렁한 선학원 관불의식의 현장 (1층 기념관 앞)

선학원 아기부처도 거의 1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색채감 넘치는 꽃으로 화사하게 치장된 관
불대에 올라서 시원한 관불의식을 기대하고 있지만 그의 몸에는 물기가 없었다. 물기가 완전
히 마를 정도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늦게 온 것도 아니며 사람들이
한참 오갈 14시대였으니 이렇게 썰렁한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관불의식의 현장은 정말 처
음 본다.

수분을 목말라하며 뻘쭘하게 있는 아기부처를 위해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그의 몸 구석구
석을 시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굳은 표정을 보였던 그의 표정이 잠시 밝아 보인다. 인근
조계사와 앞서 칠보사는 물이 마르고 닳도록 관불의식을 받지만 이곳은 그러지를 못한다. 잠
시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수분을 맛보았으니 그 흥분은 실로 컸을 것이다.

이렇게 선학원과의 첫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행선지로 미련없이 이동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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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6년 5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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