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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 맞이 국립현충원(서울) 나들이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거의 본능적으로 국립현충원(國立顯忠園, 국립 서울현충원)을 찾
는다. 그곳에 가족이나 일가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애국심 또한 대단한 것도 아
니다. (애국심은 거의 없음) 다만 석가탄신일에는 그날 본능에 따라 절을 찾듯이 현충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현충원을 찾아 호국(護國)의 신(神)으로 산화한 이들을 기리며 현충일의 분위
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현충원이 국가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보니 나들이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저 무덤
밖에 없는 재미 없고 딱딱한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생
시절 소풍으로 간 것이 고작인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그곳에 가자고 하면 다들
'엥 현충원에 나들이를 가자고? 거기 뭐 볼 거 있나?' 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나들이로 가기
에는 왠지 부담이 가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지 둘
은 모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北漢山), 북악산(北岳山), 남산(南山)과 더불어 서울의 대
기를 정화시키는 듬직한 허파로 숲이 울창하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게다가 현충원을
외곽으로 둘러싼 산책로는 어디에 던져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로 상도동과 사당동
, 흑석동 후문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의 갑(甲)을 이룬다.
또한 거기서 머물지 않고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장사, 부안군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9호, 이번에는 못봤음~~) 등의 문화유적과 오래된 절까지 소리소문 없
이 품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덩달아 선사한다. 현충원은 삼척 동자도 다 아는 곳이 분명하
지만 그곳의 숨겨진 속살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은 것이다.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전국에 우후죽순 흩어진 6.25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에는 지명
을 따서 '동작동국립묘지(銅雀洞國立墓地)'라 불렀으나 200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름
을 갈았다. (국립현충원이라 많이 부르며,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
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
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
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
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
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에 호국의 신들을 모셨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
건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시원치 못하다.

올해도 변함없이 밝아온 현충일을 맞이해 후배 여인네와 함께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날이 날
인지라 동작역부터 사람들로 엄청 미어터진다. 마치 서울 인구의 절반 정도가 이곳에 집결한
듯, 사람들의 물결을 간신히 뚫고 정문을 들어서 현충원의 속살을 찾아 나섰다.


♠  국립현충원의 오랜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의 배꼽 부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묘역이 있다. 그 서쪽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현충원의 숨겨진 속살인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자리
해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이 조
선왕실의 오래된 무덤이 박혀있으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 말
이다.
허나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묘역은 이곳에 오랜 주인으로 이 일대가 대부분 그
의 묘역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1954년 이곳에 국립묘지를 만들면서 묘역은 크게 축소되기 시작
했고 1965년 이승만의 묘역을 창빈묘역 북쪽에 쓰면서 묘역의 동쪽이 떨어져나갔다. 상황이 이
러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그야말로 잉여로운 존재가 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을 바로 남쪽에
쓰면서 남쪽 부분까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런 점은 2011년 이후 묘역 북쪽에 그의 묘
역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음)
그래서 '이 무덤은 뭐지?' 호기심 삼아 찾는 이의 발걸음이 조금 늘었다.

내가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마침 현충일이 다가오고 해서 그곳을 찾아가보
았다. 허나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현충원 안내도에는 창빈묘역이 없다. 지금은 인터
넷이라도 있지 그 당시에는 정말 적당한 정보도 없었다. 그때는 현충원 한복판에 있을 것 같지
는 않고 외곽 숲에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현충원 산책로를 따라가며 있을 만한 곳을 탐색했으나
결국 찾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 현충원 한복판인 이승만묘소 옆에 있다는 것을 알고 등잔
밑이 어두웠던 내 자신을 원망했다.

묘역의 주인인 창빈안씨(1499~1549)는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집
안이 어려워 1507년 궁녀(宮女)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고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德望)이 높
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어
미의 후원에 힘입어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얼마 뒤 숙용<淑容, 내명
부 종3품>으로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
(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명종 4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처음에는 양주땅 장흥(현 양주시 장
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에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로 하
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호강을 하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권과는 거리
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여러모로 무시를 받았던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
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공을 들인다. 1577년에는 할머니
에게 창빈(昌嬪)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장
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서 동작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은 백성들의 입소문과 막대한 돈을 이용해 덕릉(德陵)으로 높였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선조는 그릇이 작고 생각이 좁았던 군주로 마땅한 업적은 없다. 임진왜란도 잘 대처했으면 일찍
종료를 시키거나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안일한 생각과 간신배들과 짜고친 무능한 대처로 국토
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한참 손녀뻘되는 왕비<인목
대비(仁穆大妃)>와 재미를 보느라 정신이 잃기도 했다.
그런 선조가 1608년 승하하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으로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숙종 9년) 왕명에 따라 묘역 남쪽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
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중종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
다. 심지어 어린 애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은 오늘날 고위 공직자 등의 권력층과 돈만 많은 졸부들이
배워야 될 인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
尉)가 전부이다. 그의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경직된 표정의 문인석(文人石)

▲  무덤의 주인이 쓰인 묘표(墓表)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의 묘역은 그녀의 청렴함처럼 조촐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후궁의 무덤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
는 소용돌이 모양의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새겨진 이수(螭首)를 지닌 묘표(묘
비)와 상석(床石), 조그만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서 있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 1쌍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홀을 들며 무
덤을 지킨다. 

         ◀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이 비석은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3m이
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다른 신도
비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곧
게 솟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
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
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있다.


♠  국립현충원 뒷쪽에 아늑하게 안긴 오래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  경내로 오르는 계단길

현충원 꼬리 부분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이름도 매우 우
아한 공작봉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처음에는 현충원을 조성하고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절로 여기고 들어가
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그곳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당기기 시작했다. 문
화유산을 풍부하게 소장한 제법 오래된 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한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은 북쪽으
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나오는 것이다. 그 서기
가 나오는 곳을 가보니 그곳에는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솟아나고 있었는데, 자리를 보니 기
가 막힌 명당자리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처럼 과
연 도선이 세웠는지 강하게 의문이 들며,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선조 10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
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래가지
못하고 망했다가 되었다가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하고 화장암(華藏庵)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창빈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移葬)되고, 1577년 선조가 동작릉으로 무덤의 격을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고 하며,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
(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의 일화(아마도 해
우소 사건인 듯)는 널리 알려져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 페이지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 1663년 중수를 했으며, 영조 때 산경표(山經表)로 유명한 신경준(申景濬)의 '가람고(伽
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꾸준히 법등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고종 7년)에는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고종 30)에는 경운(慶雲)
,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
년에 대방을 수리하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북쪽에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사찰이 되면서 그에 맞추고자 지장도량(地藏道場)으로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의 신들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
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줄여서 '지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
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이승만 전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는데,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이곳에 잠시 들려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부분 동향(東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은 북향) 경내 동쪽에는 약수가 흘러나와
인근 상도동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
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구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10여 점을 가지고 있으며, 철불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불화(
佛畵)이다. 이들은 괘불을 빼고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근래에 만든 요사(대웅전 좌측) 내
부에 담겨져 있으므로 관람은 가능하다. (단 봉안된 위치는 종종 바뀔 수 있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자리하여 산사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또한 경내
에서 현충원 일대와 한강, 강북 지역(용산구와 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등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아 이승만이 괜히 침을 흘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절을 먹여살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충원이
아니었다면 주택가에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준 호국신들의 극락왕생과 내세(來世)에서 보다 행복한 존재로 환생
하길 간곡히 기원하며 절 관람을 시작해보자. 참고로 지장사는 호국신의 명복을 비는 곳이라 현
충원 홈페이지와 현충원 안내도에 나와있어 찾기는 편하다.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2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2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민원실과 사진/유품전시관, 현충관 등은 동절기에 한해 토요일과 휴일에 휴
  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으로 이어지는 정문과 측문(정문 동쪽), 동문(측문 동쪽
  )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문의 ☎ 02-815-0625 / 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97)

▲  지장사 느티나무의 앞모습과 뒷모습 - 서울시보호수 20-5호

지장사입구에서 절로 오르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다소 가파르다. 이 길은 현충원내부순례
길(상도동 후문~호국지장사~사당동 후문)의 일원으로 상도동 후문과 동작충효길로 이어지는데,
절과 상도동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중생을 맞는다.
이 나무는 나이가 320년 정도 된 느티나무(안내문에는 315년이라 나옴)로 높이 15m, 둘레 4.5m
에 이른다. 한참 녹음(綠陰)의 절정을 누리며 오르막길에 땀육수를 제대로 빼는 중생들을 격려
하며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울러펴지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가 보다.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이 샘터는 석
조나 돌통에 모인 물을 떠마시거나 흐르는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통제하는 형태로
약합을 쥐어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로 중생을 굽어본다. 그런 보살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있어 기분을 깨게 한다. (물론 그냥 마셔도 됨)
물을 한바가지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오장육부가 시원하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물맛은
글쎄 다른 약수터와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 것 같다.

이곳은 물을 뜨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며 가뭄 때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호국의 신과 자연이 베푼 마르지 않는 듬직
한 수원(水源)이 있는 모양이다.

▲  흥이 오른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열이 나보이는 좌측 사천왕상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天王)들은 비파(琵琶) 연주에 흥
이 난 표정인데 반해,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
이 난 표정 같다.


▲  능인보전(能仁寶殿)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석축(石築) 위에 터를
닦은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의 오래
된 문화유산과 태국에서 가져온 5좌의 여래좌상 등 여러 보물이 자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
야 되는 건물이다. 겉과 달리 속은 보물들로 눈이 부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철불(鐵佛)은 말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많이
나타나며, 이 불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
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여
기까지 흘러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빛좀 보게 해달라
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는 다음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장소로 가보니 글쎄 녹슨 채
버려진 불상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상을 수습하여 깨끗히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유별난지 그게 아
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곳 화장사(지장사)에 기증했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또한 어부(漁夫)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
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
로 인해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꿈까지는 아니지만 불상이
떨어져 있다면 발견되는 것은 가능하다.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
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나 단련을 한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몇 안되는 약사철불좌상으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료라
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의 화
승(畵僧)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
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공간을 가지며 빼곡히 들어차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들의 소망을 담아 하나씩 제작된 원불(願佛)
로 대략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대
표적인 신들이 모두 묘사되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
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  지장보살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  지장사 대웅전(大雄殿)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
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훨씬 크다. 상당히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 박물관을 이룬다, 그
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하여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의미들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욕심이 큰 만큼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는데, 원래는 경주 남산(南山)에 있던 신
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아님) 그러다가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옮겨와 경상도를 상징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
하여 보수를 했다고 한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근래에 보수를 해서 새로 달았다.


▲  대웅전 내부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태국에서 가져온 금동석가불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거느리며 3존불을 이루
고 있다. 원래는 아미타불이 중심에 있었으나 석가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뒤에는 나
무로 조각해 도금을 입힌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는데, 죄다 금색 투성이라 눈
이 너무 부셔 두 안구에 너무 많은 부담을 안긴다.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변
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들의 모습과 산수
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
세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나눠 담은 그림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
렸다. 이곳의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
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영입된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
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
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
격을 높였다.


▲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아미타불도는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렸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권속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
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
색의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극락9품도(極樂九品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와 현왕도(現王圖,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119호
)가 있는데, 모두 1893년에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같이 있었으나 지금은 별
도의 공간에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과 마주한 지장사 종무소(宗務所)

▲  지장사 삼성각(三聖閣)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내부를 장식하는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는 지방문화재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삼성각 불단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치성광여래(칠성)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석가불과 많이도
닮았다. 가슴과 가슴선을 진하게 드러내고 있어 눈길을 끌며,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
리워져 있다. 그리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들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
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낸다고 하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
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의 뒤에 걸린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대칭으
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구조이다.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은 20
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
 와 독성상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
서 몸을 일으켜 출세한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인다.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부
분 대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여 웃음
을 자아내게 한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
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는 독성 할
배의 모습을 그렸는데, 전형적인 19세기의 독성
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
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
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
 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
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를 쓱쓱 쓰다듬는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
한들 산신 앞에서는 꼬랑지를 살랑살랑거리는
귀여운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이나 앳되 보여 할배와 손자가 나란
히 있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
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풍의 나무와 폭
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의 산신도 양식
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던 당
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
한 점이 특징이다.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
굴 묘사가 돋보인다.

▲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2,500좌
가 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선 지장보살입상 일대를 지
장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전(殿)
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에 서린 오랜 보물도 중요하긴 하
지만 현재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기 때문이다.
지장전은 1983년에 주지 혜성(慧惺)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통
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지
장보살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한가
득 만들었는데 무려 2,500좌가 넘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5층석탑이 2기 서 있는데,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인다. 허나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애를 태우게 한다. 적
당한 정보도 없고 탑의 때를 봤을 때 왜정(倭政)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
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잠든 호국신들이 하나의 낙
오자도 없이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국립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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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6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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