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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우리 사잇길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잇길)

망우리 사잇길은 사색의길 서쪽 구간 북쪽 시작점에서 망우산 능선길과 망우산 정상으로 빠르게 인

도하는 산길이다. 경사가 조금 있지만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며, 10여 분 정도 오르면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서 올라온 능선길과 만난다.

 

2. 무성한 숲을 지나는 망우리 사잇길

사색의길 서쪽 구간과 동쪽 구간 사이를 지나서 '망우리 사잇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구간에

는 능선길 전까지 무덤은 거의 없으며,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정도로 숲이 삼삼하다.

 

3. 조금 급한 경사를 보이는 망우리 사잇길 (망우산 능선길 직전)

 

4. 망우산 능선길과 만나다. (망우리 사잇길과 망우산 능선길이 만나는 곳)

 

5. 망우산 능선길에서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내려가는 길

망우산 능선길은 구리전망대(한강전망대), 망우산2보루터, 망우산3보루터, 망우산 정상, 망우전망대

를 지니고 있는데, 산길 주변으로 무덤들이 많이 들어앉아 있다. 특히 유명 인물의 무덤도 많이 들어

있어 그들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며, 사색의길 동쪽 구간과는 가깝게 거리를 두고 있어 서로를

이어주는 산길이 중간중간 손을 내민다.

 

6. 아사카와 다쿠미묘

망우역사문화공원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의 무덤도 약간 자리를 축내

고 있는데, 그중에는 왜정 총독부에서 관리를 지냈던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가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왜열도 산이현(야마나시현) 출신으로 조선에 먼저 건너간 그의 형 노리다카(1884

~1964)를 따라 1914년 이 땅으로 들어와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 땅의 산

림 녹화에 크게 힘을 썼는데, 이는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닌 총독부와 왜국을 위한 것이다.

그는 조선 민예에 관심이 많아 민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등의 서적을

쓰기도 했으며, 그들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예술관의 큰 영향을 주어 그들이 함께 조선민족

미술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1931년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급성폐렴을 만나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는 이 땅에서 갑질

온갖 개짓거리를 일삼던 대부분의 왜인들과 달리 아주 특이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

그 정신에 근거한 코즈모폴리턴으로 철저히 조선말을 하고 조선 옷을 즐겨 입었으며, 조선인의 이웃

으로 살면서 조선의 마음 속에서 살다간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물론 왜정 때 조선으로 넘어온 왜

인의 상당수는 조선말을 익혔으며, 왜인 공무원과 교사, 군인 등은 조선말을 잘해야 승진이 가능했다.

 

그는 망우리묘지에 묻혔는데, 무덤 옆에 세워진 항아리(청화백자추초문각호) 모양의 석물은 친형인

노리다카가 직접 만들어서 1주기 때 세웠다. 산림과학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당시 선배들의 뜻을

이어서 묘를 관리하고 있으며, 허공에 뜬 개소리인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크게 주목을 받아서 기일 전

후로 우리나라 사람과 왜열도 원숭이들이 참석하여 추도회를 열고 있다.

 

7. 아사카와 다쿠미묘의 상석

1891년 1월 15일 우리의 옛 해양 영토인 왜열도 산이현(야마나시)에서 태어나 1931년 4월 2일 서울

시 청량리동(홍릉수목원 임업시험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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