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창덕궁 금호문금호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북서쪽에 있는 1칸짜리 기와 궁문이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창덕궁을 조성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가 1475년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소 이름을 달게 되었다.금호문이란 이름은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왕궁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며,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하고, 호(虎)는 호랑이로 서쪽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즉 이름 자체가 서쪽 문을 뜻하는데, 이는 돈화문 서쪽이자 창덕궁 서쪽 경계에 자리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단 것이다. 조그만 궁문이라 승정원, 홍문관 등 궐내각사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했는데..

1. 창덕궁 후원 애련지, 애련정 2. 관람지와 관람정 3. 주합루와 어수문 4. 창덕궁 돈화문 5. 창덕궁 후원 입구와 함양문 6. 후원입구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돌담길 7. 후원입구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8.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영화당 9. 영화당 10. 영화당 앞에 푸르게 솟은 느티나무 11. 영화당 12. 영화당 내부 13. 부용지와 부용정 14. 부용정 15. 부용지 16. 사정기비각과 물을 쏟아내는 용머리 17. 부용지 우물 18. 주합루와 어수문 19. 주합루 어수문 20. 주합루 동쪽 꽃계단과 담장 21. 부용지 인근에 있는 잘생긴 수석 22. 영화당 옆 춘당대 23. 애련정 불로문 앞 24. 불로문 앞 숲길 25. 불로문 26. 애련정 27. 애련지 28. 금..

1. 창덕궁 후원 돌담길 (후원 뒷길)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 계동캠퍼스)에서 성균관대 교내까지 창덕궁 후원 돌담길(후원 뒷 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아는 이들의 거의 없는 서울 도심의 숨겨진 숲길로 숲이 무성한 돌담 너머가 바로 창덕궁 후원이다. 돌담은 지형을 따라 3~4m의 높이를 보이며 이어지는데, 여기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수구문이 있으나 지나갈 정도는 아님) 후원 돌담길 성균관대 구간에 창덕궁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이 있는데,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 패거리와 그들을 돕던 왜군, 그리고 개화파에 끌려댕기던 고종과 왕실 가족들이 청나라군의 공격을 피해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때 개화파와 왜군은 후원 뒷길을 통해 줄행 랑을 쳤다고 전..

1. 수강재의 맞배지붕 창고 수강재 동쪽에는 길쭉한 모습의 창고 2채가 있다. 이들은 수강재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낙선재 구역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 재물을 머금던 창고로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은 팔작지붕, 뒷쪽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금은 텅 빈 창고로 굳게 잠겨 있으며, 동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둘러져 있다. 2. 수강재의 팔작지붕 창고 3. 동쪽에서 바라본 낙선재 중심부(낙선재 본채, 석복헌, 수강재)의 외경 왼쪽 부분이 낙선재 본채의 대문간채, 중간이 석복헌의 대문간채, 그리고 오른쪽이 수강재의 행랑채 및 대문간채이다. 이들은 강인한 협동심으로 낙선재 구역 중심부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꽁꽁 품고 있다. 4. 낙선재 우물 낙선재 식구들의 식수를 책임지던 늙은 ..

1. 낙선재 뒷쪽 꽃계단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뒷쪽(북쪽)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4단의 꽃계단(화계)을 닦았다. 꽃계 단에는 키 작은 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 화사하게 꾸몄으며, 꽃계단 앞에는 괴석(수석)과 굴뚝, 석지 등의 장식물을 두었다. 꽃계단 윗도리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기와집 하나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그는 6각 형 건물인 상량정이다. (상량정은 통제구역) 2. 낙선재 꽃계단 앞에 자리한 석지(석조) 크고 견고한 돌을 네모나게 다지고 그 안에 수분 공간을 만든 커다란 석조이다. 이런 석조를 돌 연못 을 뜻하는 석지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곳 석지는 채워줄 수원이 따로 없어 부근 샘에서 물을 가져오거나 하늘이 준 비로 채워야 되는데, 내가 갔을 때는 봄비가 한동안 내리지..

1. 창덕궁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왼쪽부터) 후원입구와 함양문 남쪽에는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라 불리는 기와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 다. 이들은 별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로 연결된 건물로 이들과 주변 숲, 상량정에서 접 근하는 문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후원입구 앞 탐방로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이들은 늘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었음)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는 오래전에 사라진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중희당은 왕세자(황태자)가 살던 동궁의 중심 건물이다.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은 중희당을 중심으로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세월이 잡아간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중희당은 함양문/후원입구 앞 탐방로에 있었다. 동궁의 중심을 이루던 중..

1. 취규정에서 관람정, 존덕정으로 이어지는 숲길 옥류천 구역에서 관람정 구역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2개가 있다. 하나는 동쪽 길로 조금 돌 아가는 길이며, 중간에 창덕궁~창경궁 돌담과 만나 남쪽으로 같이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 길은 질러가는 길로 관람정 구역 북쪽 끝에 자리한 존덕정으로 바로 연결된다. 또한 서쪽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있는데, 그 길은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래나무와 신 선원전으로 이어지는 길로 내가 갔을 때는 금지된 길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 길은 속세에 열리는 경우는 별로 없어 아직까지 미답 공간으로 남아있는데, 신선원전을 넘어 창덕궁 중 심 구역, 돈화문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다. 2. 존덕정 옆 돌다리와 여러 돌기둥들 계곡 위에 작게 걸린 귀여운 돌다리 주변으로 돌기둥 3개가 자..

1. 소요암에 깃든 숙종의 오언절구 시 숙종 임금이 옥류천을 찬양하며 지은 오언절구 스타일의 시가 소요암에 선명하게 깃들여 져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폭포는 삼백척인데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보고 있으면 하얀 무지개 일고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속종이 이런 시를 짓고, 사람을 시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이런 것을 각자, 바위글씨라고 부 른다. 2. 소요암에 희미하게 깃든 옥류천 바위글씨 옥류천 일대를 처음 개발했던 인조가 1636년에 남긴 것이라 전한다. 하여 창덕궁 및 조선 궁궐에 깃든 바위글씨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3. 소요정 소요정은 1칸짜리 사모지붕 정자로 1636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탄서정이라 불렸으며, 숙종과 정조, 순조 등이 즐겨찾아 이곳의 경치를 시로 남겼는데, 청의정, 태극..

1. 봄내음이 가득 내린 창덕궁 후원 관람지 애련정 구역에서 북쪽으로 1~2분을 가면 관람지, 관람정을 중심으로 한 관람정 구역이 마 중을 한다. 관람정 구역은 후원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진 곳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관람지를 중심으로 관람정과 승재정, 폄우사, 존덕정 등이 자리하여 이곳의 운치를 돋군다. 관람지는 마치 한반도 비슷한 모습이라 왜정 시절부터 반도지라 불리기도 했는데, 원래는 네모꼴의 두 연못과 둥근 연못 1개로 이루어져 있던 것을 왜정 때 현재 모습으로 성형되었 다. 하여 한반도 비슷한 곡선형 연못과 존덕정 북쪽에 둥근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관람정 구역에서 북쪽(옥류천 구역)으로 이어지는 숲길 (창덕궁, 창경궁 돌담길) 3. 관람정 관람지를 굽어보고 있는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의 기와지..

1.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서다 (후원입구에서 부용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창덕궁은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시대 서울 5대 궁궐의 일 원이다. 1405년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별궁)으로 세운 것으로 경복궁 다음급의 궁궐이 었으며, 경복궁 부재 시절(1592~1868)에는 조선의 중심 궁궐(법궁)로 바쁘게 살았다. 1405년 인정전과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후원 등이 지어졌고, 1412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세워졌다. 창덕궁 뒷쪽에는 62,000평의 후원을 달달하게 두었는데, 1463년 그 후원을 15만여 평으로 크게 늘려 창덕궁 영역을 상당히 불렸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47년에 광해군이 세웠던 인경궁 건물을 가져와 복구했으며, 1917년 큰 화재로 대조전과..

1.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조선시대 궁궐 대문 중 가장 늙은 건물이 다. 1412년 5월에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9년에 중수했다. 문의 이름인 '돈화'는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문의 이름을 내건 현판이 없었으나 성종 때 서거정을 시켜 문 이름을 지어서 현판 을 걸었으며,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서 정오와 인정, 파루에 시각을 알려주었는데, 정 오를 알리고자 북을 치니 이것을 오고라 했고,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고자 28번 종을 치는 것이며, 파루는 통행금지 해..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