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종서 장군묘 이곳에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처단된 김종서(1383~1453)의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전한다. 이곳 에 묘를 쓴 것은 여기가 김종서 집안의 세장지지였기 때문인데, 무덤 옆에 그의 조부인 김태영, 부친 인 김추(김수)의 무덤이 있다. 김종서의 순천김씨 집안이 공주에 세거하게 된 것은 김태영 시절부터이다. (현재 이곳은 세종시 장군 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공주시 장기면이었음) 원래 거주지인 순천과 서울의 거리가 멀어서 중간보다 조금 윗쪽에 자리한 공주에 집과 농장을 마련했는데, 김태영과 김추는 이곳에 유택까지 마련해 사후 안식처로 삼았다. 김종서 묘는 근래 손질된 것으로 커다란 봉분과 묘비 3기(1748년, 1963년, 근래 지어진 비석), 상석, 문인석, 망주석 등을 지니고 있으며,..
1. 김종서 장군묘 관리사(왼쪽)와 충익사(오른쪽) 장군면 대교리 국사봉 산골에는 조선 초기 재상이자 장군으로 유명한 김종서 장군묘가 숨겨져 있다. 순천김씨 집안인 김종서(1383~1453)는 여기서 가까운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 해지는데,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했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세종 때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조선 조정의 고려사 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길림성과 연 해주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던 여진족과 북쪽 세력을 평정하고 두만강에 6진을 닦았다. 흔히 이때 조 선의 북쪽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며, 조선은 개국 시절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요동, 길림, 연해주의 많은 지역을 점유해 4천리 영토를..
1. 망우역사문화공원 소파 방정환 묘소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방정환 묘소) 소파 방정환(1899~1931)은 아동문학가이자 애국지사로 어린이날과 '어린이'란 용어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서울 당주동 출생으로 어린이에게 나라의 미래가 있다며 어린이 운동에 온 생애를 바쳤는 데, 죽음 직전에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 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란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의 유골은 홍제동 화장터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 등이 나선 모금 운동으로 망우리묘지에 유택을 마련해 안장되었다. 무덤은 흙으로 다진 봉분 대신 쑥돌을 표석처럼 세웠는데,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 오세창은 손..
1. 망우리공원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접근하는 길) 망우리공원은 아차산의 북쪽 식구인 망우산(282m)에서 망우리고개까지 펼쳐진 공원으로 그 유명한 망우리묘지 일대를 일컫는다.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 사이에 넓게 자리한 망우리공원은 면적 832,800㎡ 규모로 서울 관내의 유일한 공동묘지 인데, 왜정 시절(1930년대) 서울에는 이태원와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공동묘지의 과포화에 대비하 고 이태원공동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경기도 양주군 땅이던 망우산 일대 임야 70여 만 평을 확보해 경성부(서울 )의 공동묘지로 정하고 1933년 5월 27일 개원했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되었는데, 연고자가 있는 묘는 망우리로, 무 연..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
'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
'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혜화동~명륜동 나들이 ' ▲ 송시열 집터에 남아있는 증주벽립 바위글씨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겨울 제국(帝國)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월의 한복판, 후배 여인 네와 대학로 북쪽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을 찾았다. 이번 겨울은 제대로 약을 먹었는지 툭하면 강추위에 폭설이 강림해 며칠 전 내린 눈이 아 직도 세상을 덮고 있었다. 하여 햇님의 반격에 겨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14시에 혜 화동로터리에서 그를 만나 장면총리 가옥을 찾았다. 그곳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과학고 , 성북동 방향으로 3~4분 정도 가면 된다. ♠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 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바로 ..
'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