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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라산 존자암 (존자암 종무소)

한라산 서쪽 자락이자 볼래(불래)오름 남쪽 자락 1,130~1,140m 고지에 존자암이란 조그만 암자가

숨겨져 있다. 한라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감쪽 같이 들어앉은 산중암자로 절의 이

름인 '존자'는 석가여래의 열성제자인 16나한, 나반존자를 뜻한다고 한다.

 

이곳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한라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경내에 늙은 사리탑이 있고 절과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이 다수 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 제주도 불교의 숨겨진 발

원지로 추정하기도 한다.

 

1507년 홍유손이 작성한 '존자암개구유인문'에는 '제주에서 고씨, 양씨, 부씨 세 성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된 고찰이자 비보소(고려 때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국가 공인 사찰로 조정으로부터 토지 등의

지원을 받았음)이며, 제주도 3개 고을(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수령이 국성재(나라의 안녕을 기원하

는 재)를 지냈다. 국성재는 폐지된지 6~7년이 되었다'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20년에 제주도로 유배 온 충암 김정이 존자암을 둘러보고 쓴 '존자암 중수기'에도 앞서 홍유

손이 쓴 내용이 거의 그대로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존자암은 한라산 영실에 있고 그곳 골짜기에 도를 닦는 모습의 바위들이 있

어서 수행골이라 불렸다'는 내용이 있으며, '김치'의 '유한라산기'에는 '존자암에서 6,7리를 가는 영실

골짜기가 옛날 존자암터이며, 천길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500여 나한 형상의 괴석이 늘어서

있다' 기록했다. 그리고 1651년 이경억은 그의 '존자암' 시에서 황폐한 터에 늙은 탑만 있다고 표현했

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석가여래의 열성제자인 16나한 가운데 발타라존자가 석가의 법을 전

하고자 탐몰라주에 들어와 수행하면서 불교를 전하던 도량이라 전한다.

 

존자암은 오랫동안 폐허의 상태로 속세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벌이다가 20세기 이후에 발견되었는데,

1993년과 1994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터, 목탑 추정터, 부도터, 배수시설, 고려 후기 명

문 기와, 상감청자,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을 발견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존자암터 인근에서 수행

굴을 확인했는데, 굴의 크기는 40여 명 정도 들어갈 정도였다. 발견 유물과 유적, 기록을 통해 적어도

고려 때 창건되어 16~17세기까지는 법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8년부터 존자암 중창에 들어가 2004년까지 대웅전, 국성재각, 종무소 등을 다시 세웠고, 절

로 들어서는 산길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라산 산주름에 묻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대웅보전)을 비롯해 국성재, 종무소, 요사채 등

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세존사리탑이 있다. 그

리고 존자암은 존자암지(터)라는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실주차장에서 존자암까지는 별도 탐방 예약이 필요없는 자유 공간이나 그것은 존자암과 존자암으

로 인도하는 산길에만 해당되며, 절과 산길을 벗어나면 절대로 안된다.

 

2. 종무소 앞에 있는 석조(샘터)

한라산이 베푼 물이 늘 쏟아져 나와 존자암과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샘터 옆에

는 용왕상이 용을 의자로 삼아 앉아있는데, 용왕은 물을 관리하는 존재이다.

 

 

3. 존자암 종무소

300년 이상 폐허로 쓰러져 있던 존자암을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중창을 벌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앞부분에 자리한 길쭉한 맞배지붕 건물은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데, 절에는 승려나 신도들이 딱히 상

주하지 않는듯했다. 내가 갔을 때는 절에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며, 절 승려와 관계자는 1명도 없었는

데, 승려와 절 일을 돌보는 사람들은 인근 절이나 속세에서 이곳을 왔다 갔다하면서 관리하는 모양이

다.

 

 

4. 종무소 뒷쪽 석축 위에 자리한 대웅전(대웅보전)

존자암은 작은 암자이나 법당과 종무소, 그리고 늙은 사리탑까지 갖출 것은 거진 갖추고 있다.

 

 

5. 존자암 대웅전(대웅보전)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내부에는 금동
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해 신중탱 등의 여러 탱화와 산신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6. 금동 피부를 지닌 대웅전의 주인장, 금동석가여래좌상

존자암을 재건하면서 마련된 것으로 석가여래상 위에는 붉은색 닫집이 장엄하게 치장되어 있으며, 불
상 뒷쪽에는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다.

 

 

7. 하얀색 산신상과 신중탱, 칠성탱(오른쪽 탱화)

신중탱과 칠성탱 앞에는 하얀 피부의 산신상이 있다. 보통 산신은 호랑이를 거느리기 마련이나 이곳
은 사슴의 산인 한라산에 걸맞게 사슴을 옆에 끼고 있다. 이렇게 사슴과 함께 하는 산신상은 천하에
서 이곳이 유일하다.

 

 

8. 하얀 피부의 산신과 사슴 (대웅전 내)

 

9. 존자암 국성재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국성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삼성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국성재란 이름은 옛날에 존자암에서 제주도 고을 수령들이 모여 국성재를 지냈다고 해서 붙인 것이

며, 지금은 옛날처럼 거창하게 국성재를 지내지는 않는다.

 

 

10. 국성재 식구들

용왕탱과 석가여래후불탱, 산신탱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탱화들 사이로 천하 제일의 국기인 태극

기가 걸려있어 존자암이 조선 때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성재를 지낸 현장임을 상징하고 있다.

 

 

11. 국성재 산신탱

금색 필법이 돋보이는 탱화로 사슴을 거느린 대웅보전 산신상과 달리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다.

 

 

12. 국성재 용왕탱

용왕과 용, 동자 등 용왕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13. 국성지위 비석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으로 귀부와 비신, 지붕돌을 지니고 있다. 비석은 현무암으로 이

루어져 있는데, 비신에는 '국성지위' 4자가 쓰여 있어 이곳이 국성재를 지낸 현장임을 알려준다. 이 비

석은 옛날 것이 아닌 1998년 이후에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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