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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계족산 용화사, 옥류각, 비래사


~~~~~  대전 계족산 나들이 (용화사, 비래사) ~~~~~

계족산 용화사 석불입상

▲  계족산 용화사 석불입상

비래사 옥류각 용화사 숲길

▲  비래사 옥류각

▲  용화사 숲길

 


♠  계족산 용화사(鷄足山 龍華寺)

▲  읍내동 느티나무 - 대전 보호수 6-5-1호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대전(大田) 땅을 찾았다. 경남 동부에서 서울로 돌아오면
서 잠시 대전을 거치게 되었는데,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그냥 지나치기가 좀 아쉬웠다.
그래서 접근성이 착한 미답처(未踏處)를 물색하다가 계족산 용화사를 주목하고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읍내동 현대아파트(제월당)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리니 용화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나
온다. 그의 안내로 계족산으로 이어지는 계족로740번길로 들어서 경부고속도로의 굴다리를 지
나니 녹음(綠陰)이 깃든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지면서 늙은 느티나무와 임천이란 우물, 바위
글씨들이 나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저 용화사만 생각하고 왔지 그들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호기심을 활활 풍기며 그들의 손짓에 응했다.

길가 벼랑에 자리한 읍내동 느티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420년(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때 추
정 나이가 약 380년)으로 높이 약 16m, 나무둘레 4.5m이다. 나무 옆에 신작로가 닦이면서 처
지가 조금 딱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건강은 여전하여 진한 녹음과 고품질의 그늘을 선사한다.


▲  임천(林泉) 바위글씨

느티나무 밑 벼랑에는 임천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임천이란 우물이 있다. 바위에 선명하
게 깃든 '임천'은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그 뜻을 풀이하면 '숲속의 샘'이 된다. 그것을
더 확장하면 '숨은 선비가 있는 곳'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곳은 용화사까지 포함하여 '뒷골'이라 불렸는데, 대전의 북부 지역을 관할했던 회덕(懷德)
고을의 중심지(읍내동)에서 무지하게 가깝다. 또한 풍경도 아름다워 지역 선비와 양반들이 즐
겨 찾았으며, 그들이 남긴 낙서(읍내동 암각군)가 여럿 전하고 있어 옛날의 풍치를 아련하게
귀띔해준다.


▲  왼쪽 바위면의 '회(懷)' 바위글씨(윗쪽에 있음)와
오른쪽 넓은 면에 있는 '덕원(德源)' 바위글씨


'임천' 주변 바위를 조사하다가 '회'와 '덕원' 2개의 글씨를 더 발견했다. 이들은 한 바위에
각각 다른 면에 새겨져 있는데. 그들을 합쳐 풀이하면 '회덕 물줄기의 근원'이 된다. 여기를
지나는 계곡이 회덕 지역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물줄기의 주요 상류라서 그렇게 새긴 듯 싶다.


▲  무늬만 남은 임천 우물
대전 지역에 몇 남지 않은 늙은 우물이나 상하수도 보급과 물줄기
변화 등으로 지금은 무늬만 남았다.

▲  읍내 방죽

읍내동 느티나무에서 5분 정도 올라가면 읍내방죽이란 조그만 저수지가 나온다. 계족산이 베
푼 물을 모아놓은 방죽으로 회덕 지역 경작지에 물을 제공하고자 조성되었는데, 지금은 계족
산을 조촐하게 수식하는 방죽이자 낚시터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이곳은 시내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산기슭에 자리한 탓에 방죽을 괴롭힐만한 요소가 전
혀 없어 그야말로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다 보니 물고기들도 이곳에 마음껏 뿌리를 내렸는데,
물고기 중에는 붕어가 많다고 하며 낚시꾼들의 발길이 잦다.
허나 2019년 3월 물고기들이 갑자기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발생하여 방죽의 건강에 잠시 비상
이 걸리기도 했다. 방죽이 생긴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방죽의 평화에 갑자기 찬
물을 확 껴얹은 이 사건을 대덕구(大德區)에서 조사했는데, 용존산소(溶存酸素)의 고갈로 죽
은 것이라고 답을 내놓았다. 허나 그 역시 정확한 답은 아니라며 의견이 분분하다. (방죽은
곧 평온을 되찾았음)

둑방에 올라서면 대전 시내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며 산바람과 방죽 바람이 어
우러져 매우 시원하다.


▲  숲 그늘에 묻힌 계족산 용화사 표석

▲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용화사

읍내방죽에서 조금 각박해진 오르막길을 6분 정도 오르면 용화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용화
사는 계족산(423m) 정상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불입상이 있다. 이곳에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절이 있었는데, 이름
과 역사는 딱히 전하지 않으며, 다만 그 석불을 통해 신라 말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회덕현 불우조(佛宇條)'에 계족산 동북쪽에 봉주사(鳳住寺)란
절이 있었다고 나와 있어 그곳이 이곳에 있던 절의 전신(前身)으로 보이며, 절은 사라지고 석
불 또한 의지처가 오랫동안 사라지면서 대자연에 의해 다리 중간 부분까지 파묻힌 채, 방치되
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 주지가 그를 발견하면서 이곳에 그를 내세운 절을 짓기로 결심했고, 1961년 12월
여기 주지로 들어와 오래된 석불을 미륵불(彌勒佛)로 삼아 절 이름을 용화사라 했다. 1962년
용화전(龍華殿)과 요사채를 세웠으며, 1981년에 기존의 용화전을 증축하여 대웅전으로 삼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잘생긴
석불입상이 전하고 있다.

용화사는 옛 절의 내력은 산산히 흩어졌지만 창건설화는 간직하고 있다. 이 설화가 옛날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1961년 이후 절을 세우면서 그럴싸하게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언제인지 모르는 아주 먼 옛날, 나라를 잘 통치하던 제왕이 있었다. 그는 왕자가 없어서 크게
근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비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깊은 영산(靈山)에 절을 짓고 100일
기도를 하면 왕자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하여 적당한 기도처를 물색하다가 계족산
현 자리를 발견하여 석불과 절을 세운 다음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그렇게 기도를 한지 딱 100일째 되던 날, 난데 없이 하늘에 오색구름이 휩싸이고 그 오색구름
이 절로 퍼지더니 갑자기 청룡으로 변했는데, 그가 법당 안으로 들어가 왕과 왕비가 기도하는
곳에서 오색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후 왕비는 태기가
있어 왕자를 낳으니 그의 이름을 청룡이라 하고 절 이름을 용화사라 했다고 한다. (용화사란
이름은 1961년에 붙인 것임)
그 설화를 속세에 격하게 어필한 탓에 아들 낳기를 기원하러 오는 수요가 많다고 하며, 석불
의 가피로 아들을 얻은 이가 많다고 한다.

▲  검은 피부의 커다란 석불
근래 조성된 것으로 대전 시내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  용화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과 후불탱

보통 대웅전 불상과 보살상들은 일부 늙은 문화유산을 제외하면 모두 개방되어 있다. 허나 이
곳은 유리막을 씌워놓아 다소 답답한 모습이 되었다. 그렇다고 저들이 오래된 존재들인가? 그
것도 전혀 아니다. 아마도 장차(100년 이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새싹들이라 벌써부터 크게
아끼는 모양이다.

▲  법당(대웅전) 지킴이, 신중탱

▲  대웅전에 얹혀사는 독성탱과 산신탱


▲  용화사 석불입상 - 대전 유형문화유산 26호

대웅전 옆구리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석불입상이 오랜 세월을 비껴간 듯, 생생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그는 1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라 후기 석불(石佛)로 대전 지역에서 가장 늙은
석불로 꼽힌다. 높이는 광배(光背)를 포함해 2.5m이며, 광배를 제외한 불상은 사람 키와 비슷
하다.

무려 1,000년 이상 묵었음에도 보존 상태가 나이를 무색할 정도로 아주 정정한데, 광배와 광
배의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석불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돋음새김으로 묘사되었으며 불상의
얼굴과 신체, 수인(手印), 법의(法衣) 등이 세련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경직된 듯
보이나 너그러운 인상이며, 얼굴 뒤에는 별도로 검은색의 두광(頭光)이 표현되어 그의 광명(
光明)을 표현한다. 양 어깨에 걸친 옷에는 형식적으로 두꺼운 옷주름선이 표현되었는데, 오른
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배 앞에 대고 있다.
얼굴과 체구의 형태가 단아하고 얕음새김으로 새겨진 볼륨감과 세부적인 선, 옷주름선이 다소
딱딱하긴 하나 9세기 후반의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  옆에서 바라본 용화사 석불입상의 위엄

마치 돌에서 진하게 현신한 듯 생생하고 감동적인 모습이라 20세기에 조성된 석불 같다. 석불
밑에는 근래 달아놓은 하얀 피부의 연꽃 대좌가 있는데,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생생한 피부
라 늙은 돌(불상과 광배)과 어린 돌(대좌)이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그에게는 여러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 1가지만 끄집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에 소를 잃어버려 근심에 빠진 농부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용화사를 찾아와 석불에게
소를 찾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꿈에 석불이 현몽하여 소를 훔쳐간 도둑을 잡았다.
그 도둑은 관아에 잡혀가 감옥살이를 하였고, 감옥에서 풀려난 후, 용화사 석불이 현몽했다는
소문을 듣고 뚜껑이 뒤집혀 도끼를 들고 절을 찾아가 석불의 목을 쳤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
서 즉사했다고 전한다. 그때 인근 동네 주민 3명이 꿈에서 뒷골(용화사가 있는 동네) 석불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지역 주민들이 절에 알려준 것이라고 하
며, 석불 목에 금이 간 부분이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나는 그 설화를 몰라서 그
부분은 확인하지 않았다.

* 용화사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산1 (계족로740번길 185, ☎ 042-673-2316)
* 용화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화사를 뒤로 하며


♠  계족산 비래골 옥류각, 비래사(飛來寺)

▲  비래골 느티나무 - 대전시 보호수 6-5호

겨울의 한복판에 찾아간 비래골은 계족산 남쪽 산골에 묻힌 골짜기이다. 동춘당 송준길(同春
堂 宋浚吉, 1606~1672)이 유유자적한 공간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그와 관련된 옥류각, 비래사,
초연물외 바위글씨 등이 있으며, 늙은 느티나무 2그루와 고인돌 3기(비래동 고인돌)가 있어
비래골의 오랜 역사를 대변한다. 또한 비래골 밑에 자리한 마을(비래골 마을)은 고성이씨가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이기도 하다.

대전 시내에서 이곳으로 가려면 송촌동 선비마을5단지에서 들어가면 되는데, 5단지 뒷쪽에서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시골 풍경 그윽한 비래골이 펼쳐진다. 이곳도 앞서 용화사(뒷
골)처럼 분명 대전이란 대도시 한복판이건만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상반되는 모습
을 보이니 도시에서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비래골에 들어서니 마을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듯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가 나를 맞이
한다. 이곳의 소중한 정자나무이자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守護木)으로 약 600년 묵은 것으로(
1990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570년) 여겨지며, 높이 16m, 둘레는 5.6m에 이른다.


▲  정면에서 바라본 비래골 느티나무 형제 (오른쪽 나무가 보호수)
비래골을 자주 찾았던 송준길도 이들 나무의 그늘 맛을 즐겼을 것이다.
당시 나무의 나이는 200살 정도로 지금보다 좀 작았다.

▲  동춘당 생애길 석물

비래골은 동춘당 송준길의 즐겨찾기 명소로 그의 체취가 진하게 남아있다. 그의 집인 동춘당(
同春堂)과도 매우 가까우며, 특히 문중(은진 송씨)의 원찰(願刹)이자 서당(書堂)이던 비래사(
비래암)가 있어 마실 외에도 집안일과 후손/후학 교육을 위해 자주 들락거렸다.
그래서 대전시에서 그의 체취가 서린 현장을 관광 명소로 키우고자 이곳에 짧게 '동춘당 생애
길'을 닦고 그의 어록 3가지를 머금은 석물을 세웠다. 허나 그게 전부로 딱히 특별한 것은 없
으며,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계족산 둘레길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  송준길이 손자인 송병하(宋炳夏, 1646~1697)에서 써준 어록

송준길이 남긴 글씨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1669년 4월, 증손자인 송병하를 위해 써준 것이다.
송나라 양시(楊時)의 7언 절구인 '저궁관매기강후(渚宮觀梅寄康侯)'를 장지(壯紙) 4장을 이어
붙여 대자 행초로 작성한 것으로 그의 필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무엇보다도 글이 작성
된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는 몇 없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현재 이 어록은 '송준길 행초 서증 손병하(宋浚吉 行草 書贈 孫炳夏)'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672-2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겨울에 잠긴 비래골 (비래사 방향)

▲  '초연물외(超然物外)' 바위글씨

옥류각을 몇m 앞둔 곳에 검은 피부의 넓다란 바위가 있다. 그 피부의 한문 4글자가 의연한 모
습으로 깃들여져 있는데, 이것이 송준길이 썼다고 전하는 초연물외 바위글씨이다.
초연물외란 '세속의 바깥에 있고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는 뜻으로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
나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글씨가 매우 큼지막하고 모습이 생생하며, 이들을 지나면 바로 비래골의 상징, 옥류각이 나타난다.


▲  옥류각을 살짝 가리고 선 느티나무 - 대전시 보호수 6-5-4-3-2-1호
보호수 지정 번호가 참으로 특이한 나무로 약 160년 정도 묵었다.
(높이 15m, 둘레 2m)

▲  바위를 타고 속세로 흘러가는 비래골 냇물
물줄기가 마치 내 인생처럼 썩 시원치가 못하다. 계곡 주변에는
누렇게 뜬 낙엽이 수북히 쌓여 세월을 원망한다.

▲  옥류각(玉瀏閣) - 대전 유형문화유산 7호

계곡 위에 들어앉아 비래사를 가리고 앉은 옥류각은 비래골의 화려한 눈썹 같은 존재이다. 정
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주변 경관을 건드리지 않고 건물이 들어앉을
자리만 약간 손질하여 세웠다. 그야말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지은 것이다.

옥류각은 송준길이 이곳에서 강학을 하던 것을 기리고자 그의 열성 제자인 제월당 송규렴(霽
月堂 宋奎濂, 1630~1709) 등이 중심이 되어 1693년 비래암(비래사) 앞에 세웠다. 옥류각이란
이름은 송준길이 지은 시 가운데 '골짜기에 물방울 지며 흘러내리는 옥 같은 물방울(層巖飛玉
溜)'에서 따온 것으로 골짜기 이름을 딴 '비래수각(比來水閣)'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그만
큼 이곳 계곡이 아름답고 그들을 무지하게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계곡 사이의 바위를 의지해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닦았으며, 앞면이 계곡을
향해 있기 때문에 부득이 옆에 계단을 낸 점이 특이하다. 정면의 좌측 1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 2칸은 마루를 두어 누각 형태를 취했으며, 옥류각 현판은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그
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공부하러 온 수재들은 벽에다 낙서를 하여 새 재사 건물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1647년 송준길 집안에서 승려들
을 시켜 비래암을 중창하게 하고 그 공사가 끝나자 송준길이 직접 써준 것이다.

이처럼 비래암과 더불어 좋은 자리에 들어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던 옥류각이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그 경관이 다소 망가졌다. 옥류각과 동거동락하던 조그만 암자, 비래암이 1980년부
터 서서히 덩치를 불리면서 옥류각 옆구리까지 건물이 들어섰고, 옥류각 뒷쪽에는 넓게 터를
다져 계곡을 묻고 주차장까지 닦았다. 그래서 졸지에 옥류각이 비래사의 부속 건물처럼 보이
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래암을 옥류각의 부속 건물로 여길 정도였으나 장대한 세
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위치도 반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보호 난간을 주변에 두르면서 꼼짝없이 갇힌 모습처럼 되었고 내부도 들어갈 수가 없
어 옛날의 운치를 누리기가 어렵다. 그만큼 세월은 옥류각이 비루해질 정도로 많이 흘렀다.

* 옥류각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467 (비래골길 47-74)


▲  비래사(飛來寺) 경내
(소나무 뒤에 보이는 팔작지붕 집이 대적광전)


옥류각 뒷쪽에 자리한 비래사는 계족산 남쪽 자락의 끝, 응봉산(매봉산) 비래골에 안긴 조그
만 산사이다.
원래 이름은 비래암(飛來庵)으로 창건 시기는 딱히 전하지 않으나 계족산성(鷄足山城)을 지원
하는 사찰로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작성된 '비래암고사기(古
事記)'에 '고을의 은진송씨 문중 사람들과 승려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협력해 비래암을 중창
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온갖 지리서에 비래암과 별도로 '비래사'가 따로 수록되어 있
는 점으로 보아 규모는 작지만 상당히 고색을 머금은 절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회덕에 살던 은진송씨 집안의 서당이자 원찰로 송준길도 이곳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의 제자들이 비래암 앞에 옥류각을 세우자 승려를 시켜 암자를 중창하기도 했다. 이후 문중
의 조그만 암자로 옥류각의 부속 건물처럼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비래골을 생매장해 그 위
에 터를 다지고 법당과 주차장 등을 닦아 규모를 불렸다. 절을 불린 것은 좋으나 그 덕에 옥
류각이 마치 비래사의 부속 건물처럼 밀려난 감이 있으며, 옥류각의 운치가 적지 않게 퇴색되
었다는 큰 함정이 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과 삼성각, 2층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2014년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호수인 소나무가 있다.

대전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이를 비웃듯 산주름 속에 묻혀있으며, 산사의 고즈넉한 내음을
느끼기에 그리 부족함은 없다. 이곳에서 둘러볼 주요 포인트는 앞서 옥류각과 극락보전 안에
담긴 목조비로자나불좌상, 그리고 보호수인 소나무이다.


▲  키 작은 비래사 소나무 - 대전시 보호수 6-5-4-2-3호
약 240년(1990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210년) 묵은 소나무로 높이
8m, 둘레는 1.7m이다. 옥류각 뒷쪽에 자리해 있어 은진송씨 집안이나
이곳을 찾은 유림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벼랑 밑에 얕게 파인 조그만 석굴과
비래사 공덕비(오른쪽 비석)

▲  대적광전 옆구리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829호

이곳의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비래사 제일의 보물인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의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을 선보이며 금빛 피부를 자랑하는 그는 등신대(等身大
)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는 나발이다. 밝은 표정을 지닌 얼굴은 거의 네모나며, 조그만 입술에는 조촐하게 미소가 드
리워져 있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를 지나 왼쪽 어깨 뒤로 넘어가면
서 가슴에 넓은 'U'자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드러난 속옷은 수평을 이룬다. 두 손을 가
슴 앞에 모아 오른손 검지 위에 왼손 검지를 올린 지권인을 취하며 오른쪽 발바닥을 드러낸
길상좌(吉祥坐)로 앉아있다.

이 불상은 감사하게도 밑면에 불상 조성 관련 묵서(墨書)가 있었다. 1651년 조각승인 무염(無
染)이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상 양식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어주며, 균형이 괜찮은 안정
적인 신체에 옷주름 표현도 섬세해 17세기 초/중기에 활약한 무염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
래서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그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
어왔으며, 비래사의 중심 불상으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법당도 대적광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 동그란 햇님도 육중한 몸을 뉘우고자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퇴근 시간을 좀 늦췄으면 좋으련만 퇴근 본능이 발동한 그에게는 어림도 없다. 햇
님이 커텐을 치니 땅꺼미는 더욱 짙어지고, 고적한 산사 비래사에도 시커먼 어둠과 밤추위가
몰려와 절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 초라한 나그네도 나의 원래 자리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 비래사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468 (비래골길 47-74, ☎ 042-673-3674)


▲  대적광전 앞에서 바라본 옥류각과 소나무
옥류각 지붕에는 겨울이 보낸 눈들이 포진하여 절을 감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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