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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해사 경내로 인도하는 은해교

은해사계곡 위에 걸린 은해교를 건너면 은해사의 2번째 문인 보화루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보화루

밑도리를 지나면 바로 은해사 경내로 이어지며, 계곡 옆에 펼쳐진 숲길을 따라가면 은해사의 부속암

자인 백흥암과 서운암, 기기암, 묘봉암, 중암암, 운부암으로 이어진다.

 

2. 은해교 앞에 자리한 하마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 피부에는 '대소인하마비' 6글자가 쓰여있는데, 이는 신분이 높

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절까지 걸어가란 뜻이다.

하마비는 국가와 제왕과 관련된 곳인 궁궐, 관청, 왕릉, 왕실 관련 사당은 물론 향교와 서원 앞에도 세

우는데, 절 같은 경우는 하마비를 지닌 곳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은해사가 그 비싼 하마비는 지니게

된 것은 명종 시절에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인종의 태실을 세우고, 은해사가 그것을 지키는 원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은해사 앞을 흐르는 은해사계곡 (은해교 서쪽)

멋드러지게 솟은 벼랑 밑으로 팔공산이 빚은 은해사계곡이 졸졸졸 흘러간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여

름 가뭄(이때가 6월 말이었음)으로 인해 계곡 수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5. 은해사계곡 벼랑 (은해교 서쪽)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진 추상화가 벼랑에 깃들여져 있다.

 

6. 은해사 보화루

은해사 경내를 가리고 앉은 보화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누각으로 그를 들어서면 극

락보전을 중심으로 한 은해사 경내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7. 은해사 향나무 (영천시 보호수)

청풍당 옆구리에 풍채가 좋은 향나무가 솟아있다. 그는 높이 10m, 가슴둘레 3m 규모로 2009년 영천

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안내문에 나무의 나이가 쓰여있지 않아서 나이는 잘 모르겠다. (200년 정

도 묵은 것으로 여겨짐)

 

8. 은해사 삼천불전

근래 장만한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이 봉안되어 있다.

 

9. 은해사 조사전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은해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혜철국사의

진영을 중심으로 동곡당일타대종사, 법전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10. 조사전 내부 (혜철국사, 동곡당일타대종사, 법전대종사의 진영)

 

11. 삼천불전 불단

조그만 덩치의 석가여래상이 중심에 있고, 그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석가여래삼존

상을 이룬다. 그 좌우로 금동 피부를 지닌 조그만 금동불 3,000구가 가득 자리해 그야말로 두 눈을 부

시게 한다.

 

 

12. 도선당에서 바라본 은해사 경내 중심부 (극락보전, 심검당 주변)

은해사는 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세운 해안사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한반도부터 만주, 중

원대륙에 많은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는 8세기 말 이후부터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권력 다툼

에서 희생된 원혼을 달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해안사는 현재 은해사 자리가 아닌 운부암으로 가는 길목 부근인 해안평에 있었는데, 1270년에 홍진

국사가 중창했고, 1275년에 원참이 중건했으며, 1485년에 죽청과 의찬이 은해사의 부속암자인 묘봉

암을 중창했다.

 

1545년 화마의 기습으로 절이 전소되었는데, 1546년 조선 조정에서 하사금을 넉넉히 내려 천교화상

이 현재 자리에 중창했다. 이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했고, 은해사 서북쪽 산능선에 인종의 태실을 닦았

는데, 이때 은해사로 간판을 바꾸었다. 은해사란 이름은 부처,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있는 것

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와 같다고 해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며, 은해

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

사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듬해에 묘진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 자리에

게 중창하고 절의 규모를 확장했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며, 1651년에 건물

에 단청 불사를 벌였다.

1712년 은해사가 왕실 종친부에 귀속되었으며, 1714년에는 절 입구 토지를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으

니 그것이 금포정이다.

 

1761년에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했으며, 도봉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 임금은 왕자 시절에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는데,

영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어제완문이라 하여 절을 지키는 듬직한 방패가 되었다.

허나 1847년 큰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1,000여 칸의 건물을 모두 한줌의 재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 은해사에 전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사라졌으며, 건물은 극락전만 달랑 살아남았다.

 

그 시절 영천군수인 김기철은 자신의 녹봉과 관아 재정을 싹 털어 절 중건 비용을 보탰으며, 경상감영

은 물론 왕실에서도 돈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해사는 인종 태실을 지키는 왕실 원찰이자 영조가

내린 어제완문을 보유한 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만 냥을 확보해 3년에 불사 끝에 1849년 중창불사

를 마무리 지었다.

 

왜정 때는 31본산의 일원이 되었으며, 1943년까지만 해도 건물 35동, 245칸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경북 5대 본산의 일원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극락전)을 비롯해 보화루, 설선당, 심검당, 삼천불전, 지장전, 청풍당 등 20

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기기암, 묘봉암, 백흥암, 서운암, 운부암, 중암암, 거조

사 등을 지니고 있다. 이중 거조사를 빼면 모두 은해사에서 가깝다. 그리고 경북과 대구 일대에 50여 개

의 절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과 청동북 및 북걸이, 염불왕생첩경도와 지방문화재인

극락보전 후불탱화 및 삼장탱화, 극락보전 등이 있으며, (백흥암과 거조사 등 부속암자에 있는 것들은

제외했음)조선 후기에 조성된 탱화 여러 점과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글씨 등이 전한다.

그리고 경내 동쪽에는 성보박물관을 두어 은해사와 그 부속암자, 그리고 말사의 문화유산을 듬뿍 간직

하고 있다. (성보박물관 내부는 촬영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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