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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곤지암 (곤지암 바위)

광주시 곤지암읍의 중심지인 곤지암리 시내에는 곤지암의 이름 유래가 된 곤지암 바위가 있다. 그는

화강암 바위로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큰 바위와 작은 바위가 1m 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며, 큰 바위

윗도리에는 400년 이상 묵은 늙은 향나무가 뿌리를 내리며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가 곤지암이란 간판을 지니기 전에는 바위 모습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해서 묘바위(고양이바위)라

불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곤지암으로 이름이 갈렸을까?

임진왜란 초창기에 충주 탄금대, 달천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해 군사를 죄다 말아먹고 남한강에 뛰어

들어 자살한 신립의 시신을 전쟁 이후에 군사들이 수습해 곤지암 지역에 장사를 지냈다. (신립묘는

경강선 곤지암역 북쪽 산에 있음)

 

그런데 그 이후, 신립묘에서 가까운 이곳 바위에 이상한 이변이 발생했는데, 말을 타고 바위 앞을 지

나가면 어찌된 영문인지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

야 비로소 말발굽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어이 없는 일이 자꾸 생기자 크게 열받은 지역 선비는 이를 신립의 영혼이 벌인 짓이라 여기고

신립묘를 찾아가

'왜 오가는 행인을 괴롭히냐. 그러면 너의 저승 살림이 풍족해지냐?' 따졌다. 그랬더니 갑자기 천둥소

리와 함께 벼락이 그 문제의 바위에 내리쳐 바위는 두 쪽으로 쪼개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 아

마도 신립이 뒤늦게나마 철이 든 모양이다.

바위의 모습을 보면 뭔가 충격을 받아 갈라졌고, 그 사이 부분이 사라진 것 같은 모습인데, 그 이후

괴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지역 사람들은 마을 뒷산 끝자락 연못이 있는 곳의 바위라고

해서 '곤지암(崑池岩)'이라 불렀다.

 

1872년에 편찬된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는 ‘곤지암(崑池岩)’이라 나와있으나 이후 약간의 변화

가 생겨 곤지암(昆池岩)으로 바뀌었다.

곤지암 연못은 노곡천, 곤지암천, 경안천과 연결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정 때 연못이 파괴되었으며,

이후 바위 주변으로 학교와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바위만 남아 지

역의 명물이자 쉼터로 조용히 살아간다.

 

2. 광주 산이리 고인돌(지석묘)

곤지암에서 광주로 가는 3번 국도 길목에 자리한 초월읍 산이리에 늙은 고인돌 1기가 있다. 고인돌(

지석묘)은 옛 조선의 특허품과 같은 존재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이곳 고인돌은 천하에서 가장 큰 측에 속하는 것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620cm, 무게는 28톤에 이른

다. 받침돌을 네 면에 설치한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혈이

5개 깃들여져 있으며, 2001년 1월 내부를 조사했는데, 출토된 유물은 딱히 없었다.

 

원래는 부근에 있었으나 발굴조사 이후 이곳으로 이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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