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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우역사문화공원 계용묵묘

소설가 계용묵(1904~1961)은 1904년 평북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부친 계항교와 모친 죽산박씨 슬

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1918년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순흥안씨 안정옥과 결혼했다.

 

1919년 졸업 후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보통학교 시절인 1920년 소년 잡지 '새소리'의 문예 공모에 시

'글방이 깨어져'로 응모해 2등으로 입선한 것을 기회로 문학에 진출했다. 조부 몰래 상경해 중동학교

와 휘문고보를 잠깐 다녔으나, 그때마다 신문학을 반대하는 조부에 의해 귀향해야만 했다.

 

서울에서는 김억과 같은 하숙집에서 숙식했다. 이때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우하며 문학에 더

욱 뜻을 두었는데,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1928년 왜열도로 건너가 도요

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했으며, 야간에는 정칙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허나 1931년 집안이 파산하면

서 학업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했다.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상환'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실렸다. 이때 작품을 심사하고 추천한 작가는

서해 최학송이었다. 그는 이어 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蛛)'를 발표했고, 1927년 조선문단에 응모

한 단편 '최서방'이 재차 당선되면서 문인으로서의 앞날을 확고히 했다.

두 작가는 티격태격 부딪치는 라이벌 관계로 알려졌다. 허나 서해가 1932년 먼저 생을 마감하자, 그의

유족을 도와주었으며, 서해의 문학을 정립하는데 힘을 다했다.

 

1935년 정비석, 석인해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海潮)' 발간을 도모했으나 무산되었으며, 1938년 조선

일보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1943년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왜왕에 대한 불경 혐의로 검거되어 2달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 왜정의 강압으로 고향 선천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가 해방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조선출판사에서 그의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를 펴

냈다. 이어 정비석과 1945년 12월 종합지 '대조'를 창간하나 3호까지 내고 종간했다.

 

1946년에 '금단'과 '인간적'을 발표했고, 1949년에는 분단의 아픔을 그린 '별을 헨다'를 비롯해 '바람은

그냥 불고' , '치마' , '일만오천환' , '짐' , '이불'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1948년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세웠으며, 여기서 1950년 '별을 헨다'를 간행하고, '물매미' , '수

업료', '거울' , '희롱' 등을 발표했다. 1952년 월간지 '신문화'를 창간했지만 역시 3호까지 내고 종간했다.

 

1935년경부터 5~6년 동안 심장병과 위장 질환에 시달린 이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여 오

래도록 병약한 상태로 살았는데, 1960년에 이르러서는 너무 쇠약해져 수술을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

었다. 이후 며칠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서

'모든 것은 신이 지배하는 것이다'란 한 마디를 가족에게 남기며 1961년 8월 9일 서울 정릉동 집에서 숨

을 거두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는 ''백치 아다다' , '인두주지' , '별을 헨다' 등 40여 편의 소설과 수필집인 '상아탑'을 남겼다. 그의 작

품은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엿보인다. 그중 대표작 '백치 아다다'(1935)에 이르러 초기

작품에서 보 였던 경향성을 벗어나 소박하고 일상적인 삶의 국면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박한 행

복에 대한 기대와 기대의 좌절’을 연민 섞인 관조적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생의 비애와 삶의 질곡을

담담하게 성찰했다. 그의 소설은 궁극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상실된 인간성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2. 계용묵묘의 뒷모습

봉분과 검은 피부의 묘비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이곳은 사색의길 서쪽 구간 남쪽 부분에 있으

며, 사색의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야 된다.

 

3. 계용묵묘에서 바라본 천하 (북쪽 방향)

중랑구 지역(망우동, 면목동, 신내동, 묵동)과 봉화산, 불암산, 수락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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