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빙고동 은행나무 (남쪽 밑에서 바라본 모습)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동빙고동 산비탈에 490년 묵은 늙은 은행나무가 도도하게 자리해 있다. 경 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서빙고역~한남역 구간을 지날 때, 한강과 반대 방향(북쪽 방향)에 보이는 동빙 고동 산동네를 유심히 바라보면 주택들 사이로 큰 나무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동빙고동 은 행나무이다. 서울시 보호수의 작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그는 추정 나이 약 490살(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430년), 높이 14m, 나무둘레 4.5m로 한강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애지중지했던 나무로 지금도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2. 동빙고동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주택들로 가득한 동빙..
1. 동빙고 부군당 동빙고동 주택가 속에 자리한 동빙고 부군당은 조선 초기(14세기)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동빙고 주 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마을 제당으로 천하의 시조인 단군성조와 성비가 봉안 되어 있는데, 고약했던 왜정 시절에도 제사 전통을 유지했으며, 1945년 이후 뜻 있는 인사들이 사당 을 중수하고 사당 유지 비용을 담당하는 등, 그런데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6.25시절 사당 일부가 총탄으로 파괴되었고, 탱화까지 분실되었으며, 윗당(동빙고동17번 지)이 건물 노후로 파손되자 아랫당(동빙고동 62번지)으로 제신을 옮겼다. 현재 부군당은 1992년 11월에 보수한 것으로 사당과 대문, 부속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대지 39평, 건평 27평 규모이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
1. 서빙고동 부군당 반포대교 북단 서쪽인 서빙고동 주택가 속에 부군당이란 늙은 기와집 사당이 있다. 이곳은 서빙고 사람들이 마을 안녕과 수호를 위해 세운 제당으로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이곳 서쪽인 용산 미군 부대 자리에 있었다. 1910년대 초에 왜정이 그 자리에 훈련장을 만들면서 지금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1635년에 사당을 고쳐지은 내용을 머금은 기문과 1927년 중수기까지 잘 남아있어 이곳 부군당의 오랜 내력 을 알려준다. 부군당은 서울 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마을 제당으로 제사를 지내는 제당과 제사를 준비하는 제물 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에는 기와담장을 두르고 남쪽애 맞배지붕 대문을 두었는데, 제당은 1 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작은 크기이며, 내부에는 부군당의 ..
1. 영축산 망해사로 인도하는 숲길(망해2길) 울주군청 북쪽에 솟아있는 영축산(404m) 동쪽 자락에 신라 후기 부도탑을 지닌 망해사가 있다. 그곳 을 찾으려면 율리공영차고지와 문수사입구 교차로 사이에 있는 망해2길로 진입하여 1km 정도 올라 가야 된다. 2. 솔내음이 그윽한 망해사 가는 길(망해2길) 3. 영축산 망해사 표석 4. 망해사 대웅전 영축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시절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시절 신라는 남한과 북한 땅을 비롯하여 요동, 남만주, 그리고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다스렸던 큰 나라였다. (신라는 최소 한반도와 요동, 남만주를 장악하고 있었음) 헌강왕이 어느 날 왕족과 신하들을 대동하여 세죽해변으로 나들이를 나왔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
1.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왼쪽)과 석불입상(오른쪽) 안성은 미륵불의 고장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늙은 석불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안성 시내인 아양동 주택가 속에 오랫동안 미륵불로 애지중지되던 석불 2기가 있는데, 왼쪽에 키가 큰 석불은 아양 동 보살입상, 오른쪽에 키가 작은 석불은 아양동 석불입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양동 보살입상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어느 젊은 장수가 무예 수련을 위해 도기리 탑산에서 훌쩍 뛰어올라 알미산을 딛고 비봉산 장수 바위로 넘어가던 중에 실수로 여미륵(아양동 보살입상)의 목을 차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그것 때문인지 그 장수는 전쟁에서 전사했고, 마을 분위기도 조금은 흉흉해져 마을 사람들이 ..
1. 안성 이해룡 고가 서운산 청룡사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청룡리 마을에 이해룡 고가란 늙은 집이 있다. 초가 와 기와집이 혼합된 18세기 주택으로 안채 상량문을 통해 1797년에 사랑채와 안채가 건립되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집은 남서향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에 'ㅡ'자형의 초가집 행랑채가 있고, 그곳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ㅡ'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가 연결된 'ㄷ'자형의 기와집 본채 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남쪽에는 중문이 있어 최근 손질된 행랑채와 연결되며, 사랑채는 4칸 반 크기로 민도리집인데, 남쪽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이 있고, 북쪽에는 대청 안채 건너방과 이어져 있다. 안채는 건넌방, 대 청,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
1.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2.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3. 창덕궁 후원 돌담길 (후원 뒷길) 4. 계동 은행나무 5. 6.10만세 기념비 6. 중앙고 원파도서관 7. 노백린집터 8. 3.1운동책원비 9. 중앙고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10. 중앙고등학교 본관 11. 중앙고등학교 본관의 뒷모습 12.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13. 중앙고등학교 서관 14. 중앙고등학교 동관 15. 원파 김기중 동상 16. 중앙고등학교 히말리야시다나무 17. 중앙고 삼일기념관 18.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19. 중앙중고 운동장과 중앙중학교 20. 창덕궁 신선원전 21. 창덕궁 의효전 22. 창덕궁 괘궁정 23.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24.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25...
1. 남사당 바우덕이 사당 청룡사 부도군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남사당 바우덕이의 사당이 있다. 안성 남사당패는 조선 후기에 꽤 잘나갔던 남사당 광대패로 바우덕이는 그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공사를 크게 벌리던 시절,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가 그곳을 찾아가 신명나게 공연을 펼쳤다. 그 공연에 감동을 먹은 흥선대원군은 그들에게 친히 정3품 벼슬이 사용하 던 옥관자를 수여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천하 남사당패 중에서 최고의 기량을 지닌 남사당패로 명성 을 누리게 된다. 안성 남사당패는 청룡사가 있던 청룡골이 근거지로 바우덕이도 여기서 기량을 익히고 몸을 풀었다. 그는 젊어서 사망했는데, 청룡사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산자락에 묻혀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 지 않았..
1. 청룡사 봉향각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봉향각은 'ㄱ' 구조의 팔작지붕 집으로 선방 및 요사로 살아가고 있다. 2. 청룡사 명부전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 승) 식구들의 공간이다. 3.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 푸른색 승려 머리를 지닌 금동 피부의 지장보살상이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 의 인사를 받는다. 그들 뒤로 화려한 색채의 지장시왕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는데, 그는 1874년에 화 승 한봉 창엽과등삼 등이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다. 그때 석가여래삼불회도와 아미타여래회 도도 같이 조성되었다. 조성시기와 제작자, 봉안처가 분명한 탱화로 전체적인 도상과 설채법 등이 19세기 후반 서울 및 경기..
1. 청룡사 사천왕문(천왕문) 안성의 대표 명산인 서운산(548m)에는 석남사와 청룡사 2곳의 고찰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중 청룡 사는 서운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청룡사는 1265년 몽골 원나라에서 넘어온 명본국사가 창건하여 대장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건했는데, 이때 청룡이 서기가 가득 서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 다. 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 절 이름을 청룡사로 갈았다. 과연 청룡이 구름을 타고 하강했는지는 모르 겠으나 1372년에 청룡사에서 간행한 능엄경이 전하고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은 명확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서별당, 청룡당, 종각..
1. 청룡사 사적비 청룡사 직전인 청룡마을회관앞 3거리에 청룡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사적비가 있다. 2차선 도로(청룡 길) 한복판에 조금은 외롭게 자리해 있는데, 이는 도로 확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며, 길이 좁기 때문에 비석 접근과 관람에 그리 어려움은 없다. 이 비석은 1712년에 세워졌다. 비문 내용은 승려 나준이 지었고, 글은 직산현감을 지낸 황하민이 썼 으며, 사헌부지평 김진상이 전액을 썼다. 비문에는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이곳 절을 중창했을 때,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만난 인연으로 산과 절 이름을 서운산 청룡사라 했다는 것과 조선 숙종 시절에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중건한 사실 등이 담겨져 있다. 비좌 위에 빗돌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지붕돌 귀퉁이마다 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