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래읍성 북문으로 인도하는 숲길 (동래사적공원) 동래읍성은 옛 동래부의 중심부이다. 지금이야 동래가 부산의 그늘에 있지만 조선 후기까지는 그 반대로 부산의 천하(기장군, 강서구 제외)가 동래부 그늘에 있었다. 동래읍성은 마안산과 충렬산 뒷산인 망월산에 걸쳐져 있는데, 산지와 평탄지에 조성된 평산성 스 타일로 조성되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읍성으로 언제 처음 조성되었는지는 마안 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에 있었다는 독로국 을 동래 지역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왜열도 쓰레기 학자들과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지들 멋대로 비 정한 것이라 100% 정답이 아님) 고려 현종 시절인 1021년에 동래군 성을 수리했다고 하는데, 그 동래군 성을 동래읍성..
1.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2.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돌탑 3. 숙용심씨묘표 4.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5.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6.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경천군 송금비) 7. 경천군 송금비 주변 8.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9. 200년 이상 묵은 중골마을 느티나무 10. 여기소터 표석 11.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램핑장 주변) 12.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북쪽 시작점 13.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14. 마실길 돌탑 구간 15. 마실길 느티나무 16. 마실길 돌탑들 17.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8. 영산군 이전 묘역 19,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 20. 이종 내외묘와 묘비 (영산군 이전 묘역) 21. 영산군의 손자인 이..
1. 이봉창 의사 집터 효창동 용산KCC스위첸아파트 102동 뒷쪽에는 이봉창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이봉창은 이곳 에서 1931년까지 살다가 상해로 건너갔으며, 상해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왜열도 동경으로 넘어갔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코쿄(황거, 왜왕과 그 떨거지들이 서식하 는 곳)로 돌아가던 왜왕에게 폭탄을 던져 왜왕 패거리를 살처분시키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훈련 및 준비 부족으로 명중시키지 못하고 붙잡히면서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그해 10월 왜국은 비공개 재판을 벌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며칠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의 시신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집 근처인 효창공원에 고이 안장되었다. 이봉창의 의거 이후, 이봉창 가족들은 왜정의 극..
1. 청파배다리터 청파배다리는 지금은 강제 생매장되어 사라진 만초천에 있던 배다리로 서울(한양) 도성에서 원효로, 청파동, 산천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그 배다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고, 청파동 3거리에 그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그의 제자리는 아니며, 여기서 북쪽으로 300m 떨어진 경부선 철길에 있었는데, 그 철길은 물론 주변에도 표석을 심을 자리가 없어서 다소 거리가 있 는 이곳에 세운 것이다. (서울 장안에 세워진 역사문화유산 표석 중 제자리에서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경우가 꽤 많음)
1. 후암동 전생서터 후암동 영락보린원 정문에는 전생서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먼 과거 속으로 사라진 전생서는 조선 때 왕실에서 각종 제사나 행사에 사용할 소(황우, 흑우)와 양, 염소, 돼지를 기르던 관아로 태조 때 설치되어 전구서라 했다. 전구서는 고려 때 비슷한 역할을 했던 장생서에서 이름만 바꾼 것으로 1460년에 전생서로 이름을 갈고 둔지방(후암동)으로 옮겼다. 여기서는 황우 3마리, 흑우 28마리, 양 60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330마리를 항상 사육했다. 그리고 매년 왕실에 황우 3마리, 흑우 35마리, 양 57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521마리를 공급했다. 제왕이 친히 참석하는 대제(종묘대제, 사직대제 등)에는 추가로 공급했으며, 별제향 또한 사용하는 양에 제 한을 두지 않았..
1. 후암동 김상옥 의사 항거터 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선 후암동 주택가(후암동 304번지) 한복판에 김상옥 의사의 항거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다. 김상옥(1889~1923)은 고약했던 왜정 시절, 야학을 설립해 청년들을 가르쳤고,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과 민중계몽운동을 펼친 위인이다. 암살단의 계획이 왜정에게 발각되자 서해바다를 건너 우리의 옛 땅인 상해(백제와 신라의 옛 영역) 로 넘어갔는데, 상해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의열단에 가입, 폭탄과 권총을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들어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그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왜경 다수를 부상 입히고 후암동(왜정 때는 '삼판통'이라 불림)에 있..
1. 회현동 쌍회정터 회현동(남창동) 일신교회 동쪽에는 쌍회정터를 알리는 벽돌 표석이 있다. 남산 북쪽 밑인 이곳은 한 양 장안에서 상큼한 경치를 자랑했던 곳으로 오성 이항복의 집이 있었다. 그는 집 앞에 전나무 2그루 를 심어 이곳의 풍광을 달달하게 돋구었는데, 이후 이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이곳을 매입한 사람은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쌍회정이라 했는데, 여기서 '쌍회'는 전 나무 2그루를 뜻한다. 쌍회정과 오성 이항복의 집, 그리고 전나무 2그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일신교회가 들어앉았는데, 교회 옆에 쌍회정터 표석을 세워 허무하게 사라진 그를 추억한다.
1. 북아현동 복주우물터 안산 자락과 맞닿은 북아현동 북쪽 구석 그늘진 곳에 복주우물터가 있다. 우물에 붙여진 '복주'란 귀 인을 뜻하는데, 우물 뒤쪽에 있는 안산(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무지하게 맑아서 예로부터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복수산(福壽山)이라 했고, 그것이 변해서 복주산(福主山 )이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산아랫 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은 복주우물이 되었다. 그렇게 착했던 복주우물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사라지고, 우물이 있던 자리에 이렇게 표석 을 세워 그를 추억한다. 서울 장안에는 이름난 우물과 샘터가 무지하게 많았는데, 20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 (복주우물터 표석 뒷쪽과 동쪽에는 석축이 닦여져 있으며, 석축 위로는 높은 돌담..
1. 효창동 만리창터 표석 공덕동에서 원효로, 삼각지로 넘어가는 효창동 용마루고개에 만리창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만리 창은 공물로 받은 쌀과 베, 돈의 출납을 담당하고 관리하던 선혜청의 별창으로 황해도와 전라도의 공 납과 군납을 주로 관리했다. (만리창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됨) 만리창은 새창, 신창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들을 만리창계라 불렀으며,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효 창공원 서남쪽에 있는 삼의사묘 앞과 청파초교 뒷산 중턱, 그리고 효창원(효창공원) 부근 철도사택, 도원동 접경 부근 새창마을로 보고 있다. 현재 표석(용마루공원 정류장 서쪽이자 도로 건널목 남쪽) 이 있는 곳은 도원동 새창마을 부근으로 표석을 세울 자리가 여의치 않아서 이곳에 세웠다.
1. 산천동 부군당 삼호정터 표석과 안내문을 지닌 산천동 마을마당 북쪽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산천동 부군당이 있다. 부군당이란 서울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마을 제당으로 주로 '부군'이란 신을 봉안해 마을의 안녕 을 기원한다. 이곳 부군당은 1,6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한강변이라 물놀이 사고는 물론 배 침몰, 사고 등이 빈번했다. 하여 그 액운을 막고자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한강변인 산천동 173번지(산천동 리버힐삼성아파트 남쪽)에 있었는데, 용산 지역 부군당 중에서 이곳의 명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부군당의 위치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회색빛 아파트 단지에게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다. 부군당 자리에 아파트 와 그를 보조하는 ..
1. 산천동 삼호정터 산천동부군당 남쪽에는 산천동 마을마당이란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삼호정터를 알리는 표석과 안내문이 있어 고색을 좋아하는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삼호정은 조선 순조~철종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로 헌종 시절 의주부윤을 지낸 김덕희가 지은 별장이 다. 그는 김금원이란 아리따운 소실(첩)을 두었는데, 김금원은 시에 능한 여류시인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 5명과 '삼호정시사'란 모임을 만들어 여기서 종종 시회를 가졌다. 그 삼호정시사가 바로 이 땅 최초의 여성 문학 모임이다. 삼호정은 원래 이곳이 아닌 바로 북쪽인 용산성당 성직자묘역 아래로 여겨지는데, 인근에 있던 심원정, 함벽정, 담담정과 함께 한강 명소로 크게 명성을 날렸다. 여기서 바라보는 한강과 주변 풍경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