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귀포 엉또폭포, 고근산 (제주올레길7-1코스) ' ▲ 말라버린 엉또폭포 ▲ 제주올레길7-1코스 엉또로 ▲ 고근산 차디찬 겨울 제국이 조금씩 빈틈을 보이던 2월의 한복판에 따사로운 남쪽 땅, 제주도(濟州島)를찾았다.이번 제주도 나들이는 당일치기로 아주 짧고 굵게 진행을 했는데, 제주도는 당일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곳이라 보통 2~3일 이상은 잡고 갔었다. 하지만 비행기의장점을 살려아침 일찍 넘어가 저녁에 돌아오는 방식으로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하여 종종평일을 틈타 여러 번 당일치기로 그곳을 오갔다. (그만큼 ..

1. 서귀포 엉또폭포 2. 제주올레길7-1코스 엉또로 3. 고근산 4. 말라버린 악근내(악근천) 5. 엉또폭포로 인도하는 월산로(제주올레길7-1코스) 6. 월산로에서 만난 귤나무 농장 7. 귤농장에 한가득 쌓인 귤 8. 악근천 9. 엉또폭포입구 (제주올레길7-1코스) 10. 엉또폭포 나무데크 숲길 (제주올레길7-1코스) 11. 엉또폭포 전망대 12. 엉또폭포 13. 엉또폭포 밑에 모인 푸른빛 물 14.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조용히 웅크린 엉또폭포 15. 엉또농원 16. 제주올레길7-1코스 엉또로 17. 엉또로에서 바라본 엉또폭포 주변 18. 제주올레길7-1코스 엉또로~신월동로 사이 구간 19. 올레길에서 만난 현무암 돌담 (엉또로~신월동로 사이 구간) 20. 누런 억새밭을 지나는 올레길 ..

1. 관음사 천왕문천왕문은 관음사의 2번째 문(1번째 문은 삼문 형태로 이루어진 일주문)으로 석가여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공간이다. 왜정 때 세워졌으나 1948년 4.3사건 때 파괴되었으며, 1973년에 김해정이 돈을 지원하고 이재은이 화주가 되어 중건했다. 2 천왕문에서 관음사 경내로 인도하는 길길 좌우로 현무암으로 다진 탑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탑 위에는 석불이 앉아 지나가는 중생들 구경에 여념들이 없다. 3.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이 털린 관음사 왕벚나무들 4. 해월당 봉려관 스님 행적비현재 한라산 관음사를 개산한 해월당 봉려관(안봉려관)은 1865년 제주시 화북동 안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9년 한 노인에게서 우연히 받은 관세음보살상에 크게 감동을 먹고 34살이란 늦은 나이에 출가를..

1. 대정읍 하모리 신령수(신령물)대정읍내 하모리교차로 남쪽에는 신령수라 불리는 용천수 샘터가 있다. 이 샘터는 대정읍내에서 운진항으로 이어지는 도로(최남단해안로) 서쪽 길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조선 후기부터 있던 지역의 명물 샘터로 조선 영조 시절에 이곳을 지나던 풍수가가 물을 마셔보고는 '물맛이 무지하게 좋네. 마치 신령이 보내준 물 같구나' 하여 신령수(신령물)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화산의 뜨거운 놀이터였던 제주도는 현무암 피부로 이루어져 있어 수분이 진득하게 모이기 힘들다는 함정이있다. 하여 제주도에 있는 계곡과 하천은 대부분 메마른 모습을 보인다.그렇다면 현무암 피부가 다 빨아들인 수분은 어디로 가는걸까? 그들은 지하로 내려가 어둠의 경로를 타고 상당수 바닷가로 빠진다. (내륙에도 그..

1. 한라산 존자암 종무소종무소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길쭉한 맞배지붕 집이다. 종무소 뒤로 법당인 대웅전(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로 국성재가 있으며, 경내에서 가장 구석이자 하늘과 가까운 곳에 이곳의 보물로 현무암 피부를 지닌 늙은 세존사리탑이 있다. 2. 종무소 옆에 수습된 건물터 주춧돌존자암터에서는 5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그 폐허 위에 종무소, 대웅전, 국성재를 세워 17세기 이후에 사라진 존자암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대웅전과 종무소 옆으로 옛 건물의 주춧돌이 수습되어 있다. 3. 존자암 대웅전(대웅보전)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4. 잔디가 입혀진 대웅전 서쪽 공터 5. 한라산 존자암을 뒤로 하며 (종무소 앞 현무암 계단) 6. 한라산 존자암과 조..

1. 옛 존자암터 (존자암 경내)한라산 서쪽 자락이자 볼음오름 남쪽 산골 1,130~1,140m 고지에 숨겨진 존자암은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이다. 창건 시기와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한라산 산신도 물음표를 던질 정도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경내 뒷쪽에 늙은 부도탑이 있고, 조선 때 이곳과 관련된 여러 기록이 있어서 고려 때 창건되어 16~17세기에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존자암 왕년 시절에는 나라의 지원을 받던 비보 사찰이기도 했으며(고려 때), 조선 떄는 제주도 3개 고을(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수령이 모여 국성재를 지내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사라진 것을 1993년과 1994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터 5곳과 배수시설, 청자 조각, 백자 조각, 분청사기 조각, 청동신중상 등을 건졌다...

1. 사계리 들판에서 바라본 산방산의 위엄 산방산은 395m의 뫼로 그 유명한 산방굴사를 품고 있는 화산 출신의 바위 뫼이다. 사계리에서는 어 디서든 산방산이 장엄하게 바라보이는데, 저곳은 아직까지 미답처로 남아있다. 2. 사계리 들녘에서 바라본 단산(바굼미오름) 단산은 해발 158.1m의 낮은 뫼로 대정향교 뒷쪽에 자리한다. 화산 출신의 오름으로 산은 작지만 경 사가 다소 있고 벼랑이 많아서 오르기가 약간 힘들다고 한다. 3. 사계리 들녘길 (남쪽 방향) 4. 두툼한 모습의 산방산 산방산 서남쪽 사계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산 자체가 거대한 요새처럼 단단하게 보이는데, 산 전체 가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서 산방산주차장~산방굴사 구간만 통행이 가능하다. 5. 사계항 대정읍 사계리에 자리한 ..

1. 대정향교 앞길(향교로) 단산(바굼지오름) 남쪽 자락에 자리한 대정향교는 제주도에 전하는 3개 향교의 일원이다. 향교는 조 선 조정에서 지방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제주도에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해 향교를 두었는데, 대정향교는 대정현(대정고을)의 교육을 담당했다. 1420년 대정성 북쪽에 지어진 이래,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1653년 현재 위치에 안착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남쪽에 자리해 있고, 그 북쪽에 내삼문을 두었으며, 그 문을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나온다. 명륜당은 1835년에 중건된 것으로 초가지 밑의 조각이 특이하며, 장식이 간결하고 단청이 없어 강건 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2. 활짝 열린 대정향교 정문 예전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20년 이후 제..

1. 서쪽에서 바라본 단산(바굼지오름) 옛 대정고을의 남쪽이자 대정향교 뒷쪽에 자리한 단산은 해발 158.1m의 낮은 뫼이다. 지금은 평범 한 뒷동산으로 그렇게 누워있지만 원래는 무시무시한 화산 출신으로 제주도에는 왕년에 360개가 넘 는 크고 작은 화산들이 용암 놀이를 했다고 전한다. 바굼지오름의 예전 이름은 바구미로 바구미는 박쥐의 제주도 방언이다. 산이 박쥐처럼 생겨서 바구 미오름이라 불렸다가 바구니(바굼지의 방언), 바굼지로 이름이 변화했으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 이 단산이다. 여기서 '단'은 바구니를 뜻한다. 단산사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산은 비록 작지만 벼랑이 많고 경사가 각박해 오르기가 조금 힘들 다고 한다.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올라가지 않았음, 단산 왼쪽에 보이는 뫼는 ..

1. 대정읍성(대정성지) 내부 경작지 옛 대정고을의 중심지였던 대정읍성 내부에는 밭두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집들 사이로 펼쳐진 밭두렁에는 녹색 기운을 머금은 농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대정고을 시절부터 성내에 경작지를 닦아 고을 식량을 충당했다. 2. 대정우물터 대정읍성 남문터 동북쪽에 자리한 대정우물터는 이곳 읍성의 유일한 우물이다. 두레박으로 물을 떠올 렸다고 해서 '두레물'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을 한자식으로 '거수정'이라 했다. 이 우물은 대정고을에 유력한 명관이 추대되면 물이 마른 상태임에도 물이 마구 솟아났다고 하며, 어 리석은 사람이 추대되면 물이 풍부함에도 금방 말라버렸다고 한다. 허나 지금은 상하수도 보급으로 인해 여기서 물을 충당하는 사람은 없는 실정이라 대정고을을 ..

1. 우학산인서실 1930년대 예산 추사고택의 별가로 여겨지는 집에 걸려있던 편액이다. (이곳 편액은 모조품) 2. 모거리 이곳 모거리는 추사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그는 위리안치(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 형)의 형을 받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집에 꽁 박혀있어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여기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다. 특히 그의 자랑인 추사체가 여기서 태어났는데, 추사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벼루 10개를 구 멍 내고 붓 1,000자루 이상을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전한다. 3.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다담 모습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 의순(1786~1866)은 동갑내기 벗이다. 그들은 1815년 처음 만났는 데, 이후 추사는 그에게 걸명시를 보냈고, 종종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1.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유배지) 대정읍성(대정성지) 동문 안쪽에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유적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억울 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강제 유배되어 1848년까지 머물렀는데,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서 여러 해 신세를 지다가 추사의 열성 제자로 대정고을의 지주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강도순의 집이 바로 이곳이다. 추사는 이곳에서 지역 유생들과 백성들에게 학문과 서예, 유학을 가르쳐 제주도 지역 학문 발전에 크 게 이바지했으며, 차를 매우 좋아하여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눴다.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찾아왔음) 하여 제주도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로 추앙을 받는다. 또한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