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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원사 칠성각

봉원사 대웅전의 북서쪽 높은 곳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지금은

칠성(치성광여래)의 공간인 칠성각으로 살고 있지만 그는 원래 영조의 장손이자 사도세자의 첫 아들

인 의소세손(1750~1752)의 제각으로 세워진 왕실 원당 건물이다.

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기축 첫번째 기사에 ‘지금 의소묘(懿昭墓)의 원당(願堂)인 봉원사(奉元寺)

의 위전(位田)을 본 고을에 망정(望定)하였다고 합니다~~’란 기록이 있어 봉원사가 의소세손의 원당

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칠성각 관련 기록물에서 중창 이전에 ‘신당(神堂)’이라 불렸다는 점, 그리

고 불단 내부에서 ‘의소제각(懿昭祭閣)’ 편액이 발견되어 현재 칠성각이 영조 때 세운 의소세손의 원

당 건축물임을 알려준다.

 

현재 칠성각은 19세기에 중수된 것으로 봉원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인데, 조선 때 절에 설치된 원

당 건축으로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며, 관련 유물(의소제각 편액)이 남아 있다. 또한 19세기 중수 이후

에 칠성각으로 형태가 변경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의소제각 편액을 떼어내어 칠성각 내부에

은닉했다.

 

2. 칠성각 주변에 피어난 어여쁜 홍련들

이렇게 보면 연꽃이 뿌리를 내린 작은 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은 모두 수조에서 기른 것이다.

즉 수조에 뿌리를 내린 것들이다.

 

3. 남쪽을 바라보고 선 칠성각의 정면 모습

 

4. 칠성각의 주인장, 약사여래상과 치성광여래도

칠성각은 칠성(치성광여래)이 주인장으로 있어야 되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하얀 피부에 파란 머리를

지닌 약사여래상이 주인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약사여래상 뒤에는 칠성 식구들이 그려진 치성광여래도가 걸려있는데, 절에 전하는 '낙양삼각산봉원

사칠성보전신조창건기(洛陽三角山奉元寺七星寶殿新肇創建紀)'에 의해 1864년 6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 연화질과 <상량기원문(上樑祈願文)>에는 고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성신(星神

)들의 보살핌으로써 제왕의 치세가 영원하고 왕실이 안녕하기를 바란다는 호국적인 염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가 연화좌에 앉아 왼손바닥 위에 금륜을 올리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설법인

을 취하고 있으며, 좌우에는 보관에 일상, 월상을 올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합장하며 시립해 있다.

삼존 좌우의 공간에는 위에서부터 칠여래, 칠원성군과 사천왕이 삼단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으며, 칠여

래와 칠원성군이 등장하지만 삼태육성 등 다른 권속들은 일절 나오지 않았고 하단 좌우로 사천왕이 배

치되어 있어 간략하지만 독특한 도상을 이루고 있다.

사천왕 중 여래 좌측(향우)에는 비파와 칼을 든 북방 다문천왕과 동방 지국천왕, 반대편에는 용과 여의

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과 보탑을 든 서방 광목천왕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치성광여래도에

사천왕상이 배치된 사례는 거의 없다.

 

본존의 얼굴과 가슴 부분, 사천왕상의 얼굴 등에는 화폭에 구멍이 나있거나 찢어지는 등의 훼손이 있

으며, 채색 특히 청색은 여러 군데 박락되었다. 이와 함께 적색과 녹색 위주의 단순한 채색, 본존의 원

형 광배와 신광 내연에 칠해진 금색, 옷자락 끝단의 잔잔한 꽃무늬 등의 표현은 19세기 이후 불화들에

흔히 보여지는 양식적 특징이다. 화기는 화면 하단 좌우에 칸을 만들었으나 화기를 기록하지 않아 흰

공란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며, 상호, 채색, 문양 등 전체적으로 19세기 후반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

다.

 

화면 일부에 손상이 있으나 제작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교적 간략한 구성의 도상을 이루

면서 인물 표현과 채색의 경향, 문양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화기란만 설정되어 있을 뿐, 화기는 공란으로 남아있어서 탱화

관련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5. 한글학회 창립한 곳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월에 주

시경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회)를 세

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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