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봉원사 극락전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방정토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애수'란 어여쁜 이

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

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2. 봉원사 만월전

만월전은 봉원사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유형문화유산)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서울 유형문화유산),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유형문화유산)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꽤 왔음에도 단 1번도 그의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이곳은 봉원사 경내에서 안산, 안산자락길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산꾼, 나들이꾼들이 많이 지나간다.

 

3. 봉원사 명부전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의 공간으

로 이 건물은 원래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사당 건물인 명부전이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

의 능인 정릉 부근에 원찰인 흥천사를 세우고 신덕왕후 강씨와 지장보살을 위한 명부전을 세웠는데,

삼봉 정도전에게 명부전 현판을 쓰도록 명을 내렸다.

 

명부전 건물은 정릉이 정릉동으로 추방된 이후, 그런데로 살아남았으나 흥천사가 중종 시절 폐사되

면서 사라지거나 용도가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들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름) 현재 건물은 1794

년 팔도승풍규정소가 있던 봉원사로 이건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 천불전으로 이름을 갈았다고 전

한다.

이후 중건을 하면서 삼봉이 쓴 편액을 개안했다. 명부전 현판의 왼쪽 상단을 보면 작은 글씨로 '정도

전 필'이라고 양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삼봉의 친필임을 알려준다. 편액의 규격은 가로 164cm,

세로 60cm이고, 글자는 가로 43cm, 세로 41cm 크기이다.

 

4. 명부전 주변에 화사하게 피어난 연분홍 홍련

 

5. 봉원사 칠성각과 하얀 피부의 석조관세음보살상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지금은 칠성(치성광여래)의 공간인 칠성각으로 조

용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원래 영조의 장손이자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1750~1752)의

제각으로 세워진 왕실 원당이다.

 

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기축 첫번째 기사에 ‘지금 의소묘(懿昭墓)의 원당(願堂)인 봉원사(奉元寺)

의 위전(位田)을 본 고을에 망정(望定)하였다고 합니다~~’란 기록이 있어 봉원사가 의소세손의 원당

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칠성각 관련 기록물에서 중창 이전에 ‘신당(神堂)’이라 불렸다는 점, 불단

내부에서 ‘의소제각(懿昭祭閣)’ 편액이 발견된 된 것을 통해 칠성각이 영조 때 세운 의소세손의 원당

건축물임을 알려준다.

 

현재 칠성각은 19세기에 중수된 것으로 봉원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이며, 조선 때 절에 설치된 원당

건축으로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19세기 중수 이후에 칠성각으로 형태가 살짝 변경된 것으로 보이

며, 그 과정에서 의소제각 편액을 떼어내어 칠성각 내부에 은닉했다.

 

6. 개화파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7. 두툼한 화사석을 지닌 특이한 모습의 석등 (20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것임)

 

8. 대웅전 앞에 펼쳐진 연꽃 밀림

봉원사는 연꽃 시즌이 되면 대웅전 앞과 뜨락, 경내 곳곳에 연꽃 수조를 꺼내둔다. 연꽃을 수조에 길

러서 내놓은 것으로 예전(2020년 이전)에는 서울연꽃문화축제란 이름으로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거창

하게 열었는데, 그때는 경내를 연꽃 수조로 거의 도배를 했었다. 허나 2020년 이후, 더 이상 연꽃축제

를 하지 않으며, 내놓는 연꽃도 크게 줄였다.

예전(2020년 이전)에는 대웅전 앞에 너른 뜨락을 연꽃 수조가 완전 장악했다고 보면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