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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
승가굴이라 불리는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의 역할과 직무를
대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대륙 출신의 승려로 선비족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
던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고려 초인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
(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고 한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피부가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났다.




2. 정면에서 바라본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
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마치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은 포근
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
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장만한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
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
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
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
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
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 이상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
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
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유형문화유산)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
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
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3. 옆에서 바라본 석조승가대사좌상의 위엄
승가대사상 옆에는 물이 나오는 샘터가 있다. 허나 그는 승가대사상과 절 불상에게 공양으로 올리는
샘물이라 물 섭취 및 공양 이외의 사용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애써 건드리지 않기 바란다.


4. 정면 가까이에서 바라본 석조승가대사좌상


5.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인 비봉(碑峰, 560m) 동쪽 밑 430m 고지에 자리한 승가사는 756년에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 시절 중생들로부터 생불로 칭송을 받던 승가대사
(僧伽大師)의 행적에 크게 감동을 먹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승가사라 했는데, 동문선(東文
選)에는 1107년에 이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추었
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1024년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
종(宣宗)의 명을 받아 중수했다고 한다. 109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남경(南京)을 찾아 장의사(藏義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
다. 허나 고려의 남경은 서울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 장의사와 승가사가 과연 서울에 그들
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고려는 3경체제의 큰 나라로 남경은 중원대륙 강남에 있던 것으로 보고 있
음)
1422년 세종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줄을 섰으며, 그
시절 고승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이곳까지 기어들어온 청나라군
에게 다시 파괴되고 만다. 이후 중건했으나 숙종(肅宗) 시절, 인현왕후(仁顯王后) 복귀로 궁지에 몰린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이곳에 관련 죄인을 숨겼는데, 그것이 발각되자 절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정조 임금은 1782년에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바로 의빈성씨(宜嬪成氏) 소생인 문효세자
(文孝世子, 1782~1786)이다. 1784년 7월 불과 2살에 불과한 그를 세자로 봉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만
주족(여진족)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는 경축의 뜻을 보내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미얀마
에서 보낸 옥불(玉佛)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정조는 그 옥불의 거처를 두고 고심하다가 왕실의 원찰이던 승가사를 중건해 그곳에 두었다. 절 중건
은 당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맡았으며, 옥불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
는 불상이라 하여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였고, 그 불상이 담긴 건물은 장수전(長壽殿)이라 불렸다.
장수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던지 몇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은 너무 화려
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었다.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구슬을 아로새겼고 한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건륭제가 준 시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 유리상자 안에 옥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보기가 힘든 미얀마산 불상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
아와 절은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 왕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절은 자연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허나 옥불의 바램과 달리 문효세자는 겨우 4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었으니 장수불과 장수전
의 존재 이유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장수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수불 또한 행방
이 묘연하니 아마도 정조가 화가 나서 슬쩍 없앤 모양이다. (조선에 청나라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그들
이 없어지는데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 것임)
19세기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도공(道空)이 중수했
다. 이후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렸으나 6.25 때 절이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를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71년에
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
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려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정신없이 건물을 닦았으며, 법당인 대웅
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
고 있다.
큰 전쟁 때마다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랐으나 구기동 마애여
래좌상과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국가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 옛 석탑의 부
재(部材)와 비좌 등이 남아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고 일품 조
망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때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막사
(三幕寺), 동쪽의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도 이곳에 안겨 다음의 걸쭉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6. 승가사에서 바라본 북한산 남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산줄기
첩첩히 둘러진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산줄기 너머로 서울 시내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
다.

7.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
처럼 살아야 됨)

8. 위쪽에서 바라본 호국보탑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임을 천하에 내세우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동시에 절
의 위세도 강조할 겸 많은 돈을 들여서 장만했다. 그러다 보니 호국보탑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 호
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 만든 것으로 1987년에 짓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로 9층석탑이며, 탑
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 재현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
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도록 했다. 사방으로 놓인 계
단을 통해 감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나 다소 좁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탑 주위로는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 12지신상을 빼곡히 배치했으며, 탑신 뱃속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을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
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구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9질을 봉안했다.


9. 소나무가 무성한 승가산림초소 숲길 (비봉4길)
간만에 승가사 경내를 복습하고 거친 산악길의 모습을 지닌 비봉4길을 통해 구기동으로 내려왔다. 속
세에서 승가사로 가는 길은 흙길의 구기동계곡길과 산악도로의 비봉4길 2개가 있는데, 비봉4길이 조
금 지름길이다. 허나 경사가 좀 각박하며, 차량 접근을 위해 길 포장까지 해놓았으나 자연과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노면 상태는 영 좋지가 못하다. 그런 길을 건덕빌라 기준으로
30~40분 정도 오르면 승가사 갈림길이 나오면서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 사진 답사기 > 북한산(은평,종로,성북,강북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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