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강재의 맞배지붕 창고 수강재 동쪽에는 길쭉한 모습의 창고 2채가 있다. 이들은 수강재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낙선재 구역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 재물을 머금던 창고로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은 팔작지붕, 뒷쪽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금은 텅 빈 창고로 굳게 잠겨 있으며, 동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둘러져 있다. 2. 수강재의 팔작지붕 창고 3. 동쪽에서 바라본 낙선재 중심부(낙선재 본채, 석복헌, 수강재)의 외경 왼쪽 부분이 낙선재 본채의 대문간채, 중간이 석복헌의 대문간채, 그리고 오른쪽이 수강재의 행랑채 및 대문간채이다. 이들은 강인한 협동심으로 낙선재 구역 중심부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꽁꽁 품고 있다. 4. 낙선재 우물 낙선재 식구들의 식수를 책임지던 늙은 ..
1. 낙선재 뒷쪽 꽃계단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뒷쪽(북쪽)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4단의 꽃계단(화계)을 닦았다. 꽃계 단에는 키 작은 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 화사하게 꾸몄으며, 꽃계단 앞에는 괴석(수석)과 굴뚝, 석지 등의 장식물을 두었다. 꽃계단 윗도리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기와집 하나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그는 6각 형 건물인 상량정이다. (상량정은 통제구역) 2. 낙선재 꽃계단 앞에 자리한 석지(석조) 크고 견고한 돌을 네모나게 다지고 그 안에 수분 공간을 만든 커다란 석조이다. 이런 석조를 돌 연못 을 뜻하는 석지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곳 석지는 채워줄 수원이 따로 없어 부근 샘에서 물을 가져오거나 하늘이 준 비로 채워야 되는데, 내가 갔을 때는 봄비가 한동안 내리지..
1. 창덕궁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왼쪽부터) 후원입구와 함양문 남쪽에는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라 불리는 기와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 다. 이들은 별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로 연결된 건물로 이들과 주변 숲, 상량정에서 접 근하는 문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후원입구 앞 탐방로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이들은 늘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었음)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는 오래전에 사라진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중희당은 왕세자(황태자)가 살던 동궁의 중심 건물이다.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은 중희당을 중심으로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세월이 잡아간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중희당은 함양문/후원입구 앞 탐방로에 있었다. 동궁의 중심을 이루던 중..
1. 연경당 사랑채의 뒷모습 연경당의 중심 건물인 사랑채 옆으로 안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 앞뜰과 뒷뜰, 그리고 안채 앞 뜰과 뒷뜰 사이에는 담장이 둘러져 서로의 경계를 긋는다. 2. 연경당 서쪽 돌담길 (북쪽 방향) 연경당에서 후원 숲을 가로질러 취규정, 옥류천 구역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여기서 취규정까지 는 약 300m 거리로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내가 갔을 때는 빗장이 풀린 상태였으나 종종 빗장이 걸려 통제되는 경우가 있음) 3. 연경당 서쪽 돌담길 (남쪽 방향) 붉은색 단풍나무와 녹음이 짙어가는 나무들이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사 람들은 그들 사이를 거닐며 봄내음에 푹 잠긴 후원 풍경을 즐긴다. 4. 연경당에서 취규정, 옥류천 구역으로 넘어가는 숲길 5. 연경당의 통..
1. 연경당 농수정 선향재 뒷쪽(동북쪽) 언덕에는 1칸짜리 사모지붕 정자인 농수정이 자리해 있다. 선향재 뒷쪽에 4단의 꽃계단(화계)을 닦고 그 위에 농수정을 상큼하게 얹혀 놓았는데, 선향재 북쪽에 농수정으 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내었으나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돌계단 밑에서 그 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된다. (농수정은 접근 금지) 언제 지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선향재와 비슷한 고종 시절로 여겨지며, '농수'란 이름은 '짙은 빛으로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1884년에 고종과 왕세자(순종) 부자가 농수정에서 그들 생애의 첫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촬영을 한 사람이 미국 사람 퍼시벌 로웰이다. 2. 연경당 선향재 연경당 사랑채 동쪽이자 농수정 밑에 자리한 선향재는 이곳의 서재이다. 사랑..
1. 봄내음이 가득한 연경당 대문(장락문) 앞 애련정 구역 서쪽 숲에는 연경당이란 너른 기와집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선향재, 행랑채, 농수 정, 반빗간 등을 지니고 있어 궁궐 속의 사대부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1827년(또는 1828 년)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와 모후인 순원왕후 김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 과 진작례를 위해 진장각 옛터에 세운 것으로 그 시절 부왕(순조)을 대신해 국정을 살피면서 왕 권 강화를 추구했던 그의 숨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 조선 궁궐에서 거의 흔치 않은 양반사대부가로 99칸을 넘는 120칸(지금은 109칸 반만 남음) 규 모를 자랑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큰 집이다. 이렇게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효명세자가 사대부가 체험을 하려고 지었다는 설, 순조가 ..
1. 필동(필동로) 남쪽 구석에서 남산 북측순환로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남산 복측순환로로 접근하기 좋게 낮은 경사를 보이며 지그재그로 펼쳐져 있다. 2. 늦가을에 잠긴 남산 북측순환로(남산공원길) 남산 북측순환로는 남산북측순환로입구 정류장(01번 정차)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소파로까 지 이어지는 2차선 길이다. 남산 남측순환로와 함께 남산 자락을 도는 산악도로로 1980년대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했으나 차량 접근을 금하고 남산셔틀버스 등 일부 차량만 바퀴를 들이게 했다. 허나 그마저도 금하면서 1990년대부터는 뚜벅이들의 완전한 도보길로 살아가고 있다. 남산 숲에 푹 묻힌 북측순환로는 봄꽃(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여름 녹음, 늦가을 단풍, 겨울 설 경 등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달달한 숲길로 ..
1. 옥인동 윤씨가옥 (대문간채와 계단) 윤택영의 친형이자 악질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악명을 떨친 윤덕영(1873~1940)이 1910년대에 지 은 고래등 한옥이다. 윤덕영은 옥인동47번지 일대(옥인동의 거의 절반 크기)에 20여 채의 집을 짓 고 가족, 첩들과 모여 살며 그 작자의 작은 세상을 일구었는데, 그가 지은 집 가운데 프랑스식으로 지은 벽수산장이 꽤 유명했다. 허나 막대한 부채로 벽수산장과 주변 집들을 모두 팔아먹으면서 집은 하나 둘 사라졌고, 지금은 딸 부부에게 지어준 2층 양옥인 박노수가옥(현재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과 첩이 살았던 옥인동 47- 133번지 한옥의 일부만 겨우 남아있다. 박노수가옥은 화가 박노수가 매입하여 살면서 유일하게 살 아남았고, 옥인동 47-133번지 한옥은 서민들이 ..
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몸채 바깥쪽 (사랑채와 안채 바깥 부분) 2.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왼쪽)과 관훈동 민씨가옥(오른쪽) 윤택영과 민씨가옥의 주인이었던 민영휘는 모두 악질 친일매국노 잡것들이다. (윤택영 재실과 관 훈동 민씨가옥 안내문에서 윤택영과 민영휘가 악질 개친일파라는 내용이 빠져 있음) 3. 옥인동 윤씨가옥 윤택영의 친형이자 악질 친일파로 더러운 이름을 떨쳤던 윤덕영(1873~1940)이 1910년대에 지은 한옥이다. 윤덕영은 옥인동47번지 일대(옥인동의 거의 절반 크기)를 차지하여 20여 채의 집을 짓 고 가족,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그 작자가 지은 집중에서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벽수산장이 꽤 유 명했다. 허나 막대한 부채로 벽수산장과 주변 집들을 모두 팔아먹으면서, 하나 둘 ..
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사랑채 이 한옥은 순종의 장인이자 순정효황후의 부친인 친일파 윤택영이 지었다.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위인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윤택 영과 순종은 장인, 사위 관계이나 순종보다 2살이 어렸으며, 황후에 오른 딸도 순종과 무려 20살 이나 차이가 났다. 윤택영은 1910년까지는 그런데로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으나 1910년 이후 안면을 싹 바꾸고 친 일파로 악명을 떨쳤다. 낭비벽과 경제관념이 꽝인 작자라 돈을 펑펑 써댔고 사치가 대단하여 주변 으로부터 빌린 돈이 상당했다. 하여 '채무왕' , '차금대왕(借金大王)'이란 별명까지 지녔다. 그의 빚은 고종이 일부 갚아주기도 했으나 그래도 빚은 여전했으며, 순종과 ..
1. 관훈동 민씨가옥 안채 관훈동 민씨가옥은 악질 친일파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1852~1935)란 작자의 저택 일부이 다. 그는 종로구 관훈동에 고래등 기와집을 여러 채 짓고 가족들과 호의호식하며 살았는데, 이곳에 있는 가옥은 관훈동 30-1번지에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행랑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중문간채만 남아있으며, 1998년에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면서 사라졌던 안채 건넌방을 되살리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새로 지어 채워넣었다. 전체 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가 있으며, 담장 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서울 지역 한옥의 안채는 보통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 'ㄱ'자' 구조를 보이기 마련인데, 이 집은 부 엌과 안방을 나란하..
1. 남산골한옥마을 돌담길 (북쪽 방향,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가옥과 관훈동 민씨가옥 사이) 2. 관훈동 민씨가옥 내 소나무 관훈동 민씨가옥은 악질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민영휘(1852~1935)란 작자의 저택 일부이다. 그는 종로구 관훈동에 집을 여러 채나 짓고 가족들과 호의호식하며 공기를 축내며 살았는데, 이곳 에 있는 한옥은 관훈동 30-1번지에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행랑채도 있었으나 소유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축소되어 안채와 중문간채만 겨우 남았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면서 이전에 사라졌던 안채 건넌방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새로 지었는데, 전체 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 채가 있으며, 담장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서울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