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암동 전생서터 후암동 영락보린원 정문에는 전생서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먼 과거 속으로 사라진 전생서는 조선 때 왕실에서 각종 제사나 행사에 사용할 소(황우, 흑우)와 양, 염소, 돼지를 기르던 관아로 태조 때 설치되어 전구서라 했다. 전구서는 고려 때 비슷한 역할을 했던 장생서에서 이름만 바꾼 것으로 1460년에 전생서로 이름을 갈고 둔지방(후암동)으로 옮겼다. 여기서는 황우 3마리, 흑우 28마리, 양 60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330마리를 항상 사육했다. 그리고 매년 왕실에 황우 3마리, 흑우 35마리, 양 57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521마리를 공급했다. 제왕이 친히 참석하는 대제(종묘대제, 사직대제 등)에는 추가로 공급했으며, 별제향 또한 사용하는 양에 제 한을 두지 않았..
1. 후암동 김상옥 의사 항거터 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선 후암동 주택가(후암동 304번지) 한복판에 김상옥 의사의 항거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다. 김상옥(1889~1923)은 고약했던 왜정 시절, 야학을 설립해 청년들을 가르쳤고,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과 민중계몽운동을 펼친 위인이다. 암살단의 계획이 왜정에게 발각되자 서해바다를 건너 우리의 옛 땅인 상해(백제와 신라의 옛 영역) 로 넘어갔는데, 상해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의열단에 가입, 폭탄과 권총을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들어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그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왜경 다수를 부상 입히고 후암동(왜정 때는 '삼판통'이라 불림)에 있..
1. 회현동 쌍회정터 회현동(남창동) 일신교회 동쪽에는 쌍회정터를 알리는 벽돌 표석이 있다. 남산 북쪽 밑인 이곳은 한 양 장안에서 상큼한 경치를 자랑했던 곳으로 오성 이항복의 집이 있었다. 그는 집 앞에 전나무 2그루 를 심어 이곳의 풍광을 달달하게 돋구었는데, 이후 이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이곳을 매입한 사람은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쌍회정이라 했는데, 여기서 '쌍회'는 전 나무 2그루를 뜻한다. 쌍회정과 오성 이항복의 집, 그리고 전나무 2그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일신교회가 들어앉았는데, 교회 옆에 쌍회정터 표석을 세워 허무하게 사라진 그를 추억한다.
1. 북아현동 복주우물터 안산 자락과 맞닿은 북아현동 북쪽 구석 그늘진 곳에 복주우물터가 있다. 우물에 붙여진 '복주'란 귀 인을 뜻하는데, 우물 뒤쪽에 있는 안산(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무지하게 맑아서 예로부터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복수산(福壽山)이라 했고, 그것이 변해서 복주산(福主山 )이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산아랫 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은 복주우물이 되었다. 그렇게 착했던 복주우물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사라지고, 우물이 있던 자리에 이렇게 표석 을 세워 그를 추억한다. 서울 장안에는 이름난 우물과 샘터가 무지하게 많았는데, 20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 (복주우물터 표석 뒷쪽과 동쪽에는 석축이 닦여져 있으며, 석축 위로는 높은 돌담..
1. 효창동 만리창터 표석 공덕동에서 원효로, 삼각지로 넘어가는 효창동 용마루고개에 만리창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만리 창은 공물로 받은 쌀과 베, 돈의 출납을 담당하고 관리하던 선혜청의 별창으로 황해도와 전라도의 공 납과 군납을 주로 관리했다. (만리창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됨) 만리창은 새창, 신창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들을 만리창계라 불렀으며,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효 창공원 서남쪽에 있는 삼의사묘 앞과 청파초교 뒷산 중턱, 그리고 효창원(효창공원) 부근 철도사택, 도원동 접경 부근 새창마을로 보고 있다. 현재 표석(용마루공원 정류장 서쪽이자 도로 건널목 남쪽) 이 있는 곳은 도원동 새창마을 부근으로 표석을 세울 자리가 여의치 않아서 이곳에 세웠다.
1. 산천동 부군당 삼호정터 표석과 안내문을 지닌 산천동 마을마당 북쪽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산천동 부군당이 있다. 부군당이란 서울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마을 제당으로 주로 '부군'이란 신을 봉안해 마을의 안녕 을 기원한다. 이곳 부군당은 1,6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한강변이라 물놀이 사고는 물론 배 침몰, 사고 등이 빈번했다. 하여 그 액운을 막고자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한강변인 산천동 173번지(산천동 리버힐삼성아파트 남쪽)에 있었는데, 용산 지역 부군당 중에서 이곳의 명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부군당의 위치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회색빛 아파트 단지에게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다. 부군당 자리에 아파트 와 그를 보조하는 ..
1. 산천동 삼호정터 산천동부군당 남쪽에는 산천동 마을마당이란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삼호정터를 알리는 표석과 안내문이 있어 고색을 좋아하는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삼호정은 조선 순조~철종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로 헌종 시절 의주부윤을 지낸 김덕희가 지은 별장이 다. 그는 김금원이란 아리따운 소실(첩)을 두었는데, 김금원은 시에 능한 여류시인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 5명과 '삼호정시사'란 모임을 만들어 여기서 종종 시회를 가졌다. 그 삼호정시사가 바로 이 땅 최초의 여성 문학 모임이다. 삼호정은 원래 이곳이 아닌 바로 북쪽인 용산성당 성직자묘역 아래로 여겨지는데, 인근에 있던 심원정, 함벽정, 담담정과 함께 한강 명소로 크게 명성을 날렸다. 여기서 바라보는 한강과 주변 풍경은 가..
1. 마포 담담정터 표석 마포대교와 강변북로가 만나는 마포대교 북단, 그 남쪽에 가파른 언덕이 솟아있다. 마포대교 북단과 산천동 사이에 솟은 강변 언덕으로 빌라와 주거지가 가득 씌워져 있는데, 그 언덕 정상부에 벽산빌라 가 있다. 그 빌라 정문 서쪽에 담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우두커니 자리해 있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담담정은 조선 세종 시절에 안평대군(세종의 3남)이 세운 정자이다. 그는 이곳 에 1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그의 측근와 문신들에게 종종 시회를 베풀었는데, 세조(수양대군)가 집 권한 이후 신숙주가 접수하여 별장으로 삼았다. 이곳은 마포나루 남쪽 언덕으로 강쪽으로 각박한 벼랑이 펼쳐져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냈다. 또한 여 기서 바라보는 한강과 마포나루, 강 너머 풍경 조망이 일품이라 한강..
1. 이태원부군당(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서 바라본 천하 (서북쪽 방향) 푸른 하늘(이때가 5월이었음) 아래로 이태원동과 용산동, 후암동, 남영동, 남산 자락이 두 망막에 들 어온다. 2. 이태원부군당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이태원동과 용산미군기지, 용산구 서부 지역) 3. 이태원부군당에서 바라본 이태원동과 남산(목멱산) 남산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꼭대기와 송신탑이 있는 남산 동쪽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4. 이태원부군당 이태원시장(6호선 녹사평역과 이태원역 사이) 북쪽 언덕에 이태원 부군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1619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데, 원래는 여기보다 북쪽인 남산 중턱(남산외인주택 자리로 추정됨) 에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훈련소를 짓는다며 개난리를 피워 1917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
1.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 서양 냄새와 유흥가의 기운이 지나치게 심한 이태원, 그 이태원에 고색의 명소가 하나 숨겨져 있다. 바로 이태원시장(이태원로) 북쪽 언덕에 있는 이태원 부군당이다. 이태원 부군당이 자리한 곳은 남산의 남쪽 자락이다. 남산은 이태원과 보광동, 한남동까지 산자락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이곳 부군당은 앞에 자리한 부군묘 비석에 1619년에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이곳보다 북쪽인 남산 중턱(남산외인주택 자리로 추정됨)에 있었으 나 왜정이 훈련소를 짓는다며 아주 개난리를 부려서 1917년에 부득불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군당은 서울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마을 제당으로 한강 주변에 많이 분포한다. 17세기 이후 한강 을 중심으로 한 경강상업이 발전하..
1. 보광동 흥무대왕 김유신사당 보광동 오산중고등학교 동쪽 가파른 곳에 김유신 장군 사당이 둥지를 틀고 있다. 속세에서 이곳을 찾으려면 서빙고로에서 각박한 계단길을 올라가거나 리버빌아파트에서 계단을 이용해야 되는데, 사당은 아쉽게도 제사일(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과 김유신장군 사당 제향(보통 11월 중/하순에 하 고 있으며, 용산구청에서 지원하는 지역 행사로 자리를 잡음) 등 일부 날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 외에는 사당 정문인 용화문까지만 접근할 수 있음) 김유신 장군(595~673)은 신라 중기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가락국(금관가야) 왕족 출신이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신라 땅을 북쪽으로 만주, 요동까지 확장시켰으며, 당나라군도 토벌해 신 라를 반석 위에 올렸다. 그 공으로 사후 흥무대왕으로..
1. 동빙고동 은행나무 (남쪽 밑에서 바라본 모습)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동빙고동 산비탈에 490년 묵은 늙은 은행나무가 도도하게 자리해 있다. 경 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서빙고역~한남역 구간을 지날 때, 한강과 반대 방향(북쪽 방향)에 보이는 동빙 고동 산동네를 유심히 바라보면 주택들 사이로 큰 나무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동빙고동 은 행나무이다. 서울시 보호수의 작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그는 추정 나이 약 490살(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430년), 높이 14m, 나무둘레 4.5m로 한강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애지중지했던 나무로 지금도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2. 동빙고동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주택들로 가득한 동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