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북한산 영취사 (영취사5층석탑)북한산(삼각산) 기점의 일원인 정릉동 정릉탐방지원센터에서 정릉계곡을 따라 30~40분 정도 올라가면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적막하고 고즈넉한 모습의 영취사가 마중을 나온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북한산(삼각산) 품에 무수히 깃든 절의 하나로 정릉계곡에서 북한산성 대성문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서 이 구간을 이용할 경우 무조건 거쳐가야 된다. (등산로가 절 경내를 지나감)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이 세운 것으로 그렇게 오래된 절은 아니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 선생의 수양녀이기도 했으며, 1947넌 공..

1. 북한산 정릉계곡서울의 오랜 진산이자 대표 지붕인 북한산(삼각산), 그는 나의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그의 품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정릉동에서 시작하여 영취사, 북한산성, 문수사 등 북한산의 주요 명소를 복습하고 왔는데, 정릉 코스(정릉동)는 110(A,B), 143, 162, 1020, 1113번 시내버스를 타고 정릉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에서 110, 143번 / 4호선과 우이신설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62번, 1번 출구 밖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43번 /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 1번 출구에서110,143, 162, 1113번 이용) 2. 경쾌하게 흘러가는 정릉계곡정릉계곡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자락에 있는 계곡이다. ..

1. 문정동 느티나무 (서울시 보호수 24-4호)송파대로에서 가까운 문정동 주택가 속에 590년 묵은 늙은 느티나무 2그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번에 문정동 지역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들로 문정동에 이런 늙은 나무가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울시 보호수 24-4호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추정 나이 590년(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약 530년), 높이 15m, 나무둘레 5.3m의 큰 덩치를 지녔는데, 문정동을 비롯한 송파구 남부 지역이 도시화되기 전에는 나무 주위로 마을이 자리해 그의 일품 그늘 맛을 두고두고 누렸다.허나 개발의 칼질이 송파동을 넘어 가락동, 장지동, 문정동까지 요란을 피우면서 나무 주변 마을과 경작지는 모두 사라졌으며, 졸지에 도시 한복판에 비좁게 자리한 가련한..

1.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2.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 3. 태릉~강릉 숲길 4. 태릉 숲길 5. 태릉 금천교의 흔적 6. 태릉 홍살문 7. 외곽에서 바라본 태릉 능역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8. 태릉 수라간터 9. 태릉 수복방 10. 태릉 비석(표석)을 머금은 비각 11. 태릉 비석(표석) 12. 태릉 정자각 13. 정자각 우측 돌계단 14. 붉은 피부의 제삿상들 (정자각 내부) 15. 정자각 신위평상 16. 관세상(왼쪽)과 축상(오른쪽) 17. 태릉 능침 18. 태릉 숲길 19. 태릉~강릉 숲길 출입구 (태릉 쪽) 20. 태릉~강릉 숲길 (태릉 쪽) 21. 태릉~강릉 숲길 옆을 흐르는 조그만 계곡 22. 태릉~강릉 숲길 고개 정상 23. 태릉~강릉 숲길 (강릉 쪽) 2..

1. 경복궁 동십자각경복궁의 오랜 정문인 광화문, 그 동쪽에 있는 경복궁교차로 북쪽 부분에 동십자각이 우뚝 자리해 있다. 지금은 도로 사이에 외롭게 자리해 있고 동십자각 윗도리로 올라가는 길 또한 막혀있어서 길 건너편에서 그림의 떡처럼 대해야 되는데, 그는 광화문 좌우 담장 끝에 세워진 망루로 간단하게 '궐'이라 부른다. 흔히 왕궁을 궁궐이라 부르는데, 이는 궁과 망루 궐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망루의 모습이 십자(十字)처럼 생겨서 십자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화문 담장 동쪽 끝에는 동십자각, 서쪽 끝에는 서십자각이 자리해 경복궁을 지켰다. 허나 평면 모습은 '십자' 모습이 아닌 사각형이며, 허공에서 볼 때 용마루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모습이다. 또한 망루와 맞닿은 궁장이 십..

1. 창덕궁 금호문금호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북서쪽에 있는 1칸짜리 기와 궁문이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창덕궁을 조성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가 1475년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소 이름을 달게 되었다.금호문이란 이름은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왕궁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며,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하고, 호(虎)는 호랑이로 서쪽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즉 이름 자체가 서쪽 문을 뜻하는데, 이는 돈화문 서쪽이자 창덕궁 서쪽 경계에 자리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단 것이다. 조그만 궁문이라 승정원, 홍문관 등 궐내각사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했는데..

1. 계동 여운형집터 표석창덕궁이 바라보이는 북촌1경 고개에 여운형집터를 알리는 매끄러운 피부의 표석이 누워있다. 정확히는 표석 남쪽에 있는 안동손칼국수집에 여운형집이 있었는데, 그의 기와집은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1919년 4월 의정원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선포했고, 이후 서울로 들어와 조선중앙일보사장을 지냈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선수 사진에서 옥의티보다 더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그 시절 좌익과 우익과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애를 썼으나 실패했으며, 1947년 혜화동에서 불의의 암살을 당했다. (여운형 선생 묘소는 강북구 우이동에 있음)

1. 정독도서관 본관 (구 경기고등학교)북촌한옥마을의 한복판인 화동에는 서울 사람들의 오랜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이곳에는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켰다가 떨려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싹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1. 화동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돌의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아득한 옛날부터 그리고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에 이르기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장, 학용품, 장난감, 중/고등학교 명찰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현되어 있다.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무수하게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두 ..

1. 안국동 조선어학회터안국동 윤보선가 서쪽 골목에는 조선어학회터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으로 그 학회는 주시경(1876~1914) 선생이 1908년 국어 연구와 발전을 위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의 맥을 이은 단체이다.왜정 말기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강제로 중단되고 많은 자료들이 압수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꿔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 수송동 사포서터사포서는 조선 궁궐에 딸린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원래는 북부 준수방(종로구 통인동)에 있었으나 수송동으로 이전되었으며, 1882년에 폐지되었다. 사포서로 쓰인 한옥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키다리 건물과 그에 딸린 정원, 그리고 도로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2. 안국동 안동별궁터(서울공예박물관 자리)안동별궁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왕실 별궁이다. 현재 서울공예박물관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순종이 여기서 가례를 올렸으며, 왜정 때 파괴되어 담장터와 건물터 일부만 겨우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