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천 농다리, 보탑사 봄맞이 나들이 ' ▲ 진천 농다리 ▲ 보탑사 3층목탑 ▲ 보탑사 금동와불 반년 가까이 천하를 주름잡던 겨울 제국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마 지막 자웅을 겨루던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충북 진천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엄청난 출근 차량의 버벅거림을 간신히 뚫고 진천(鎭川) 땅 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천은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다. 하여 제일 먼저 진천을 찾아 그곳에 깃든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워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경, 문백면에 자리한 농다리에 도착했다. 아직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고 농 다리가 발을 담군 미호천에서 물연기도 살포시 피어올라 이른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고 스란히 남아있었다. ♠ 천하에서 가장 오..
' 금강 상류에 숨겨진 비경, 옥천 둔주봉(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대전 옆에 자리한 충북 옥천(沃川)을 찾았다. 옥천 땅에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그를 찾고자 추 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것이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 한강 건너 영등포역에서 경부선(京釜線) 무궁화 호 열차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2시간을 내달려 옥천역에 이르렀는데, 금강산도 식후경 (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명언에 따라 옥천역 부근에서 따끈하게 순대국 1그릇 말고 둔주봉에서 먹을 김밥 2줄을 구입하여(옥천버스 종점에 가격이 저렴한 괜찮은 김밥집이 있음) 안남으로 가는 옥천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옥천읍에..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1. 죽령고개 정상 소백산 남쪽 자락에 깃든 죽령은 단양과 영주를 잇는 해발 689m의 높고 험준한 고개이다. 백두대간 소백산맥 구간의 주요 고갯길이자 경상도에서 충청도 동부, 경기도, 서울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신라 아달라왕 시절인 158년에 죽죽이 개척했다 고 전한다. 고갯길 개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죽죽은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갯마루에 그의 사당을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고개 이름을 죽령이라 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팽팽한 경계선으로 고구려 장수태왕은 죽령을 넘어 경북 포항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신라 진흥왕은 551년 거칠부 등 8명의 장수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 이북에 10개 고을을 점령했다. 고구려 평원태왕 때는 태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영토를 되찾겠..
1. 의림지 한복판에 두둥실 떠있는 순주섬 2. 의림지 북쪽 둑방길에서 바라본 푸르른 의림지 3. 의림지 동쪽 둑방길에서 바라본 의림지 4. 우록정 의림지 동쪽 둑방에는 우록정이 자리해 있다. (서쪽 둑방에는 경호루, 남쪽 둑방에는 영호정이 있음) 의림지 축조설 중 우록 의 축조설이 있는데, 그는 돌봉재에서 살았다고 전하며 그의 유적으로는 우록당 옛터와 우물인 우록정, 그리고 가야금을 탔 다는 제비바위 등이 있다. 제천시는 2007년 의림지 명소화 사업으로 우록의 예술혼을 기리고자 의림지 동쪽 둑방에 6각형 정자를 짓고 우록정이라 했 다. 그렇다고 이곳이 우록당의 옛터는 아니다. 5. 우록정에서 바라본 의림지 6. 우록샘 표석 우록샘은 우록이 이용했다는 샘터이다. '조선환여승람'에는 우록정이 의림지 동북..
1. 제천 의림지 제천시내 북쪽인 모산동(의림지동)에 의림지가 넓게 누워있다. 의림지는 중/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저수지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원삼국시대(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라 진흥왕 시절에 충주에 머물던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13세기에 제천현감 박의 림이 크고 단단하게 새로 쌓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세종실록에는 의림제라고 나오는데 그 시절 규모는 길이 530 척, 관수 면적이 400결이라 하며, 조선 세조 때 정인지가 체찰사로 이곳을 둘러보고 3도에서 병력 1,500명을 동원해 2차례 보수를 했다. 의림지를 조성한 이유는 바로 농업용수 확보 때문이다. 저수지를 닦고 주변으로 소나무,..
1. 화양계곡 와룡암 와룡암은 화양9곡의 제7곡으로 계곡가에 길게 누운 바위인데, 그 모습이 용이 꿈틀거리며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 와룡암이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바위 피부에 '와룡암' 바위글씨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한문만 알면 의외로 찾기는 쉬움) 2. 계곡가에 길게 누운 주름진 와룡암 3. 와룡암 한복판에 깃든 와룡암 바위글씨 4. 와룡암에서 바라본 화양계곡 상류 쪽 (학소대 방향) 5. 학소대 학소대는 화양구곡의 제8곡으로 청학이 집을 짓고 새끼를 길렀다고 전한다. 청학이 과연 이곳에 살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계곡가에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노송이 우거져 있어 청학도 흔쾌히 찾을 정도로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옛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승지에 보통 ..
1. 도명산 채운암(채운사) 화양계곡(화양구곡)의 제6곡인 능운대 북쪽에 채운암(채운사)가 자리해 있다. 화양계곡의 유일한 오래된 절로 능운대 옆 에 절로 인도하는 길이 있어 그 길을 조금 오르면 채운암이 활짝 모습을 드러낸다. 채운암은 원래 화양9곡의 제5곡인 첨성대 안쪽에 있던 절로 1277년에 도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1610년에 중창했다 고 하며, 1896년 동학군을 토벌하며 개난리를 피우던 왜군이 절을 불질러 대웅전만 겨우 살아 남았다. 이후 1948년 산사태 로 절이 파괴되자 요사채의 일부를 가져와 현 자리에 있던 환장사에 합치고 절 이름을 채운암으로 갈았다. 환장사는 1653년에 혜일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송시열이 화양계곡에 말뚝을 박으며 팔자좋게 놀고 있을 때 사신편을 통해 수집한 명태..
1. 금사담 금사담은 화양계곡(화양9곡)의 제4곡으로 화양9곡 식구 중 가장 빼어난 곳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금사담이란 이름은 수정 처럼 맑고 깨끗한 물 속에 잠긴 모래가 마치 금가루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계곡에는 암반과 바위들이 즐비하며 물놀이 에 좋게 모래밭까지 갖추고 있어 천연 풀장을 이룬다. 계곡 건너 벼랑에는 암서재란 정자가 있는데 그곳은 송시열이 화양동에 은거할 때 지은 별장이다. 2. 금사담과 늘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암서재 암서재는 노송이 울창한 층암벼랑 위에 닦여진 팔작지붕 정자이다. 송시열이 별장으로 지어 팔자좋게 머물던 곳으로 그는 여기서 '시냇가에 바위 벽이 열리어 / 그 사이에 집 1간을 지었네 / 고요히 앉아 성인의 교훈 받들어 / 한치라도 더위잡고 올라 보 려네' 시..
1. 만동묘 성공문에서 바라본 화양서원 경내 가파른 계단 밑으로 보이는 맞배지붕 문은 만동묘의 외삼문인 추양문이다. (왼쪽은 존사청과 풍천재, 오른쪽은 증반청) 2. 만동묘 내부 만동묘는 화양서원의 일원으로 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송시열의 유언으로 1704년에 세운 명나 나 신종, 의종의 사당으로 황색 단 위에 그것들의 위패를 봉안했다. 보통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그 서원에서 중심적으 로 띄워주는 존재의 사당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는 엉뚱하게도 명 신종, 의종의 사당을 두어 망해버린 명에 대한 꼴사나운 꼴통 사대주의를 징그럽게 보였다. 3. 만동묘 앞 석주 지역 유생과 조선 조정이 얼마나 만동묘를 애지중지했는지 키가 큰 석주까지 닦아놓아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돋 ..
1. 화양계곡 만동묘 화양계곡(화양구곡) 제4곡인 금사담 주변에 만동묘와 화양서원 묘정비가 있다. 17세기 문인이자 성리학의 대표급 인물로 쓸데없이 큰 이름을 지닌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화양계곡 경치에 퐁당퐁당 반해 이곳에 별서를 짓고 팔자좋게 머문 인연이 있는데, 그는 조정에 출사를 했다가 그만두고 이곳에 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고 전한다. 그는 왕세자 책봉 문제로 숙종에게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심문을 받고자 상경하는 중에 정읍에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먹고 82세의 나이로 강제 사망했다. 그는 골로 가기 전, 자신의 열성제자였던 수암 권상하에게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지을 것을 요구했다. 하여 권상하와 그 떨거지들은 아름다운 화양계곡에 명에 대한 꼴통 사..
1. 운영담 운영담은 화양9곡의 제2곡으로 계곡과 소(못), 직각으로 솟은 벼랑이 어우러진 경승지이다. 운영담이란 이름은 소(못)에 뜬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쳐서 유래된 것으로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벼랑 밑도리에는 '운영담'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2. 운영담 동쪽 벼랑 운영담은 피서의 성지로 물놀이에 좋은 곳이나 벼랑 쪽은 수심이 깊으니 금줄 안쪽은 가급적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3. 화양계곡에 깃든 우암 송시열 유적 안내도 (화양서원, 만동묘) 4. 읍궁암 비석 읍궁암은 화양9곡의 제3곡으로 계곡에 있는 너른 바위이다. 화양계곡에서 팔자좋게 머물던 송시열이 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매일 새벽마다 이곳 바위에서 서울 쪽을 향해 弓처럼 엎드려 통곡했던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