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둔덕기성 고려시대 건물터 (3-10, 3-11호 건물터)둔덕기성 내부에서는 고려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터 11곳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성 내부 남쪽 평탄지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는데, 그중 3-10, 3-11호 건물터가 양호하게 남아있었다. 이들 건물터는 동쪽으로 집수지, 남쪽으로 남문터와 인접한다. 3-10호 건물터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건물터의 석축을 활용해 그 윗도리에 장방형 석축대지를 남~북 방향으로 닦은 다음 북쪽으로 치우친 형태의 상부 기단을 조성했다.3-11호 건물터는 3-10호 건물터 동쪽에 자리해 있어 3-10호 건물터의 부속 건물로 여겨진다. 우리 민족의 특허품인 온돌이 닦여진 곳으로 3열의 줄고개 둑 상부에 두께 20cm 내외의 비교적 두꺼운 구들장을 덮었다.열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개..
1. 거제 둔덕기성 (둔덕기성 남쪽 성곽)별학산(336.2m) 북쪽 자락 300m 고지에 둔덕기성이라 불리는 오래된 산성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신라 중기인 7~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산성 유적으로 동문터는 이 땅에서 흔치 않게 현문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려 중기인 12세기에 수축되었으며,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에서 폐위된 의종이 여기서 3년 정도 유배살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 인해 폐왕성(제왕에서 폐위된 사람이 있던 성)이란 우울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의종(1127~1173, 재위 1146~1170)은 고려 제18대 제왕으로 인종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국정도 잘 살폈고 무신들도 잘 챙겨주었으나 슬슬 개판으로 변하면서 툭하면 문신, 환관들과 술..
1.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2.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 3. 태릉~강릉 숲길 4. 태릉 숲길 5. 태릉 금천교의 흔적 6. 태릉 홍살문 7. 외곽에서 바라본 태릉 능역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8. 태릉 수라간터 9. 태릉 수복방 10. 태릉 비석(표석)을 머금은 비각 11. 태릉 비석(표석) 12. 태릉 정자각 13. 정자각 우측 돌계단 14. 붉은 피부의 제삿상들 (정자각 내부) 15. 정자각 신위평상 16. 관세상(왼쪽)과 축상(오른쪽) 17. 태릉 능침 18. 태릉 숲길 19. 태릉~강릉 숲길 출입구 (태릉 쪽) 20. 태릉~강릉 숲길 (태릉 쪽) 21. 태릉~강릉 숲길 옆을 흐르는 조그만 계곡 22. 태릉~강릉 숲길 고개 정상 23. 태릉~강릉 숲길 (강릉 쪽) 2..
1. 둔덕기성으로 인도하는 남파랑길27코스 산길오량성을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둔덕기성을 보고자 그곳으로 인도하는 남파랑길27코스 산길로 들어섰다. 남파랑길27코스는 통영 신촌마을에서 거제대교를 건너 청마기념관으로 이어지는 10.1km의 도보길이다. 견내량 바다를 건너고 시래산(264.9m)과 별학산(336.2m) 자락을 넘어가는 산과 바다, 들판을 지나는 길로 이번에 오량성 서쪽에 있는 오량교차로에서 둔덕기성까지 그의 신세를 졌는데, 1차선 크기의 잘 닦여진 비포장 임도로 경사도 완만하여 거닐기가 좋다.평일에 갔음에도 남파랑길 도보꾼들을 여럿 봤으며, 숲이 삼삼하고 가까이에 남해바다가 보이는 등 풍경도 무지 곱다. 2. 남파랑길27코스 산길에서 바라본 오량리와 오량성오량리 마을 한복판에 나무가 좀 우..
1. 경복궁 동십자각경복궁의 오랜 정문인 광화문, 그 동쪽에 있는 경복궁교차로 북쪽 부분에 동십자각이 우뚝 자리해 있다. 지금은 도로 사이에 외롭게 자리해 있고 동십자각 윗도리로 올라가는 길 또한 막혀있어서 길 건너편에서 그림의 떡처럼 대해야 되는데, 그는 광화문 좌우 담장 끝에 세워진 망루로 간단하게 '궐'이라 부른다. 흔히 왕궁을 궁궐이라 부르는데, 이는 궁과 망루 궐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망루의 모습이 십자(十字)처럼 생겨서 십자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화문 담장 동쪽 끝에는 동십자각, 서쪽 끝에는 서십자각이 자리해 경복궁을 지켰다. 허나 평면 모습은 '십자' 모습이 아닌 사각형이며, 허공에서 볼 때 용마루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모습이다. 또한 망루와 맞닿은 궁장이 십..
1. 거제 오량성거제대교에서 까운 사등면 오량리 거제대로 남쪽에 오량성이란 늙은 성곽이 있다. 이 성곽은 조선 연산군 시절인 15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조그만 보(보루) 형태로 조성되었다. 보루는 성곽보다 작은 석성으로 나중에 큰 성곽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오량성이 있던 곳에는 역참이 있었는데, 고려 때 신설된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고려 후기에 폐지되어 고성에 있는 송도역에 통폐합된 것을 1425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오량성의 둘레는 약 1,150m, 성벽 너비 4.5m, 높이 4m 정도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고, 성곽을 앞으로 돌출시킨 치성이 8곳이 있었다. 성벽은 아래에 받침돌을 놓고 큰 돌을 안쪽으로 약간 들여서 쌓은 다음에 그 위로 작은 돌을 눕혀 쌓은 형식이며, 성 밖에는 해자를..
1. 창덕궁 금호문금호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북서쪽에 있는 1칸짜리 기와 궁문이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창덕궁을 조성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가 1475년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소 이름을 달게 되었다.금호문이란 이름은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왕궁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며,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하고, 호(虎)는 호랑이로 서쪽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즉 이름 자체가 서쪽 문을 뜻하는데, 이는 돈화문 서쪽이자 창덕궁 서쪽 경계에 자리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단 것이다. 조그만 궁문이라 승정원, 홍문관 등 궐내각사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했는데..
1. 계동 여운형집터 표석창덕궁이 바라보이는 북촌1경 고개에 여운형집터를 알리는 매끄러운 피부의 표석이 누워있다. 정확히는 표석 남쪽에 있는 안동손칼국수집에 여운형집이 있었는데, 그의 기와집은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1919년 4월 의정원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선포했고, 이후 서울로 들어와 조선중앙일보사장을 지냈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선수 사진에서 옥의티보다 더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그 시절 좌익과 우익과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애를 썼으나 실패했으며, 1947년 혜화동에서 불의의 암살을 당했다. (여운형 선생 묘소는 강북구 우이동에 있음)
1. 정독도서관 본관 (구 경기고등학교)북촌한옥마을의 한복판인 화동에는 서울 사람들의 오랜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이곳에는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켰다가 떨려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싹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1. 화동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돌의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아득한 옛날부터 그리고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에 이르기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장, 학용품, 장난감, 중/고등학교 명찰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현되어 있다.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무수하게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두 ..
1. 안국동 조선어학회터안국동 윤보선가 서쪽 골목에는 조선어학회터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으로 그 학회는 주시경(1876~1914) 선생이 1908년 국어 연구와 발전을 위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의 맥을 이은 단체이다.왜정 말기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강제로 중단되고 많은 자료들이 압수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꿔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