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차산 긴고랑 이번 아차, 용마산 나들이는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자리한 긴고랑에서 시작했다. 긴고랑은 아차산과 용마산이 빚은 아차 산의 대표급 자연산 계곡으로 하류에는 인공이 좀 가해지긴 했으나 수량이 많고 자연산 부분도 적지 않아 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아랫 사진의 장소는 긴고랑계곡 직전으로 여기서 용마산1보루와 2보루를 잡으러 용마산으로 올라갔다. 2. 긴고랑에서 용마산1보루, 용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용마산 남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이 구간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하여 흥분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키고자 일부 구간에 계단길 을 닦았다. 3. 용마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지금은 용마산과 아차산을 따로 보고 있지만 용마산도 원래 아차산의 일원이다. 4. 용마..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
1. 여헌성리설(왼쪽)과 명산실기(오른쪽) 여헌성리설은 17~18세기에 살았던 여헌 장현광이 쓴 저술 중에 성리학에 관한 논지만을 모아 엮은 서적이다. 서문과 발문 등이 없어 누가 편집하고 간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오른쪽에 놓인 명산실기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이다. (하얀 피부의 안내문 내용이 너무 흐릿하게 나와서 누구의 실기인지는 모르겠음) 2. 지봉실기(왼쪽)와 태재집(오른쪽) 지봉실기는 황보인의 실기로 1836년에 후손 황보섭, 황보도, 황보학 등이 편집, 간행했다. 그 옆에 있는 태재집은 조선 초 기 문인인 유방선의 시문집으로 1450년에 이보흠의 도움으로 경상도 영천 북습서당에서 초간되었다. 중간본은 1815년에 14대손인 유천식이 부록과 함께 재편집하여 원주 송곡서원에서 간행했다. 3. ..
1. 북쪽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왼쪽 구석에 한옥들이 임고서원의 옛 서원, 가운데 팔작지붕 누각(영광루)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새 서원이다. 현역에서 물 러난 옛 서원 부분은 관람이 통제되어 있고, 새 서원이 임고서원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 (제향, 관람 등) 2. 임고서원 북쪽에 닦여진 용연 용연은 포은 정몽주가 낚시를 하던 곳이라 전한다. 그 서쪽에는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은 정몽주가 낚시를 하던 곳이라 하여 조옹대라 불린다. 허나 후대 사람들은 정몽주가 낚시로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닌 용이라 하여 조룡대란 부르기도 하 며, 낚시를 했던 못을 용연이라 부른다. (결론은 정몽주 찬양) 여헌 장현광이 임고서원 중건상량문에서 '조옹이란 대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은거한 초지일 것이다' 쓰고..
1. 영천 임고서원 은행나무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이곳의 오랜 명물로 500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 20m, 둘레 5.95m의 크고 큰 나무로 원래는 임 고서원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부래산 자락)에 있었으나 1600년경 이곳에 재건하면서 은행나무도 가져왔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나무에게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차려 기도를 올리면 부녀자는 아들을 얻고, 병자는 완쾌된 다고 전하며, 나무를 해치면 크게 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지역 사람들이 꽤 애지중지한다. 2. 하늘 높이 솟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의 위엄 3. 포은선생 숭모기념비 4. 임고서원 앞에 재현된 개성 선죽교 개성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피살된 현장으로 유명하다. 하여 정몽주를 배향한 임고서원 앞에 선..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
1. 남현동 구 벨기에영사관 (남서울미술관) 사당역 서쪽(사당역 6번 출구 밖)에 자리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은 구한말 시절에 지어진 옛 벨기에영사관 건물이 다. 1903년에 짓기 시작해 1905년 완성을 보았는데, 원래는 회현동에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벽돌과 화강암을 적절히 섞어서 지었으며, 좌우 대칭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1919년에 충무로로 이전되어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왜정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둔갑되었으며, 1945 년 이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했다. 1970년에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 불하받아 사용하다가 회현동 주변 재개발과 새 은행 건물 공사로 1983년에 남현동 현 재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때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전문 위원..
1. 관악산 관음사 일주문 관음사는 관악산 북쪽 자락 남현동에 자리한 산사로 절 이름 그대로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남태령 관음사', '승방골 관 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895년에 도선국사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고자 비보사찰로 세웠다고 전하나 관련 유물과 사료는 전혀 없는 실정이며, 다 만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 긴 시간 동안 사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인물인 변계량(1369~1430)이 쓴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어 조선 초에도 법등을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18세기에 제작된 범우고와 가람고, 여지도서 등에도 관음사가 짧게 소개되어 있고, 1977년에 극락전을 해체했을 때 나온 상량문..
1. 관악산의 품으로 (남현동 우림루미아트아파트 기점) 이번 관악산 나들이는 남현동 우림루미아트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우림루미아트아파트와 남현한일유앤아이아파트(아파트 이름도 참 길고 난해하다;;) 사이로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들어서면 효민공 이경직 묘역이 금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들을 보고자 이 코스로 길을 잡았다. 2. 화사한 꽃문이 마중을 하다. 저 꽃문을 들어서면 늦가을의 향연이 한참인 관악산의 품이 펼쳐진다. (조금만 들어가면 효민공 이경직 묘역이 나옴) 3. 늦가을에 잠긴 관악산 숲길 (효민공 이경직묘역 주변) 4. 효민공 이경직묘역 앞 숲길 오른쪽 철책 너머가 바로 효민공 이경직 묘역이다. 묘역 앞 숲길에는 쉼터 등이 닦여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고려청자와 고 려백자의 파..
* 김포 용화사 운양산 북쪽 자락 한강변에 자리한 용화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사이다. 비록 한강변에 있지만 절 바로 앞에 금 포로와 김포한강로가 차례대로 닦여져 있고, 길 북쪽은 군사작전지역이라 한강변에 있지만 한강으로 가는 길이 끊겨있다. 그러니 절과 한강과의 체감거리는 뻔히 바라보임에도 지구-달 거리 이상만큼이나 길어진 실정이다. 이 절은 1405년 정도명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정도명은 조세로 거둔 곡물을 싣고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다가 운양산 앞에 잠시 배를 정박하고 쉬었다. 그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부처가 나타나 배 밑에 석불이 있으니 그를 찾아 절을 짓고 잘 살펴달라고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배 밑 강속을 조사하니 정말 석불 하나가 잠수를 타고 있는 것 이다...
1. 김제 청운사 무량광전 호남평야의 일원인 드넓은 김제평야 한복판에 청하산이란 키 작은 산이 누워있다. 바로 그 산자락에 청운사가 조촐히 둥 지를 틀며 백련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청운사는 19세기에 어느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계룡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광이 아른거리는 곳이 있 어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으니 김제평야 한복판인 청하산이었다. 하여 그곳에 1칸짜리 초가를 지어 머물면서 매일 불공을 올렸다. 그러다가 보천이란 승려가 찾아왔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수도가 부족함을 깨닫고는 그곳에 눌러앉아 도를 닦았다 고 전한다. (보천이 1칸짜리 초가로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1925년 3월 초가 법당을 짓고 태고종의 그늘로 들어갔으며, 1927년 승려 월인이 초가 법당을 3칸으로 늘리고 ..
1. 청운사입구 호제 김제 청운사는 전북의 이름난 연꽃 명소로 절 입구에 자리한 호제(저수지 이름)와 안쪽 논두렁, 경내에 있는 하소백련지까 지 하얀 연꽃인 백련을 가득 심어 백련 명소로 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홍련과 수련 등의 다른 연꽃은 거의 없음) 2. 호제 안쪽 논두렁에 가득 피어난 백련들 너른 호제보다는 안쪽 논두렁과 하소백련지에 백련들이 매우 많다. (호제는 거의 푸른 연잎들만 가득함) 3. 청운사 경내 앞 하소백련지의 백련들 4. 뽀송뽀송하게 피어난 순백의 백련들 5. 활짝 만개한 어느 백련 6. 하얀 백련과 푸른색 연잎의 조화, 하소백련지 7. 탐스럽게 열린 백련들 저기서 심청이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인다. 백련이 피부가 하얀 색이라 연분홍 홍련이나 수련보다는 조금 덜 아름답 게 보..